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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연위결 (129/241)
  • 연위결

    “나태가 죽었다?”

    “그래.”

    글러트니는 자신의 보라색 천막 안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천막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남자의 목소리는 테이블 위의 수정구슬에서 나오고 있었다.

    “흐음...”

    남자의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속이 거북해질 정도로 굵고 묵직했다. 슬로스가 죽었다는 소식에도 남자의 목소리와 어조에는 전혀 변화가 없지, 오히려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크라시스에 나태를 죽일 수 있는 인간이 있던가? 마스터인 크릭스와 기사단전체가 달려들지 않는 이상 상처하나 못 낼 텐데?”

    “슬로스가 당할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누구에게 당했지?”

    “...”

    글러트니는 잠시 침묵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렌 록스.”

    “유렌 록스. 들어본 이름이군. 이오칼에서 성자소리를 들었던 인간인가. 암기를 사용하고?”

    “맞아.”

    “다른 인간은?”

    “...없어.”

    “없다?”

    “슬로스는 유렌 록스 한 명에게 당했다.”

    “호오...”

    지루함이 가득 담겨 있던 남자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흥미가 스며들었다.

    “나태를 인간 혼자서 잡았다고? 오랜만에 재밌는 인간이 나왔군. 그가 어떻게 나태를 죽였지?”

    “유렌 록스는 88개의 무기를 한 번에 날려서 슬로스의 전신을 꿰뚫고 그의 핵을 가루로 만들었다.”

    “무기를 한 번에 날린 거야 그렇다 치고, 그 무기들이 슬로스의 피부를 뚫을 수가 있나?”

    “유렌 록스가 사용한 모든 무기에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위력이 오러 블레이드 이상이었고.”

    “크크크! 대단하군!”

    남자는 유렌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진 것 같았다. 슬로스의 죽음은 이미 그의 머리에서 사라졌고, 유렌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놈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이번 일은 물론이고 과거까지. 전부.”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한다.”

    “크큭. 세상이 재밌는 이유가 그런 인간들이 툭 튀어 나오기 때문이지.”

    웃음기를 담은 남자의 목소리에서 끈적한 욕망이 느껴졌다. 그것은 슬로스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 유렌의 능력에 대한 흥미일 뿐이었다.

    “다른 놈들은 뭐하고 있지?”

    “자신들의 욕구를 풀고 있겠지.”

    “후후, 그건 네가 최고겠지. 폭식. 나태도 네 욕구를 처리해주다 죽은 거 아닌가?”

    “...”

    남자의 말에 글러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투명한 수정구슬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남자와의 대화를 그만두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 대륙의 강자라고 할 만 한건 겁에 질린 머저리들과 늙은이들뿐이라, 지루했는데. 유렌 록스라 앞으로 재밌겠어.”

    “전해야 할 것은 전했다. 슈페르비아. 그날에 다시 연락하지.”

    글러트니는 슈페르비아의 대답을 듣지 않고, 수정구슬에 손을 올려 통신을 끊었다.

    “유렌 록스.”

    글러트니는 슬로스의 무력을 믿었기 때문에 전투를 보지 않고, 예언자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본 장면은 자폭을 하려던 슬로스에게 멸락을 펼치는 유렌의 모습뿐이었다.

    그 장면에서 글러트니는 녹아내리는 슬로스가 아니라, 거만하게 서있는 유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욕망을 느낀 것이다. 유렌을 먹어치워서, 그의 능력과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강렬한 욕망을.

    “오만 따위에게 넘길 수는 없지. 그놈은 내꺼야.”

    글러트니의 입에서 인세의 그것을 벗어난 무언가가 날름거리고 있었다.

    **

    “이 기술들은...”

    새로 개방된 기술들은 전부 당천위가 슬로스에게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기술들의 이름을 보니 살짝 걱정이 되었다.

    “그분은 이 기술들 쓸 때 상단전을 사용 하던데, 지금의 내가 쓸 수 있을까?”

    상태창을 켜서 정보를 보려고 할 때 누군가가 복도를 부술 것처럼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유레님...”

    “아린?”

    첫 번째로 달려온 것은 아린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아린이 저렇게 큰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나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린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다가왔다.

    “괜찮으신가요?”

    “멀쩡해.”

    침대로 다가온 아린은 내 손을 꼭 잡았다.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아린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리해서 그래. 정말 괜찮아.”

    “성녀님이 유렌님의 상처를 치료하고, 축복과 각성을 걸어도 일주일동안 일어나시지 않아서 모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이나 잤나...”

    생각보다 오랫동안 기절해있던 것 같다. 사실 꿈의 세계에서 일 년은 넘게 있었던 것 같으니, 일주일이면 오히려 짧은 편일지도 모르겠다.

    “유렌!”

    “일리아.”

    아린 다음으로 들어온 일리아는 침대로 올라와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옅은 향기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흑...”

    일리아가 계속 끌어안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너 일주일 동안 시체나 다름없었다고!”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고 있던 일리아가 나를 놓아주며, 팔을 잡고 흔들었다.

    “이제 괜찮아. 왜 울고 그러냐. 너 평생 울지 않는다며.”

    “울긴 누가 울어! 이 자식아!”

    이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일리아가 눈을 비비며 눈물 자국을 지웠다.

    “유렌님!”

    “성녀님.”

    “정말 걱정했어요! 흐윽...”

    이레아는 내 방에 오기 전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나 보다. 벌써부터 얼굴 전체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누가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듯 달려와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치료를 해도 일어나시지 않으셔서, 제가 너무 무능해서...죄송해요. 흐으윽...”

    “아니에요. 그냥 피곤해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흐으으...”

    이레아는 내 목소리를 들을수록 심하게 울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우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다 지금 상황이 좀 요상했다.

    “음...”

    지금 난 아린의 손을 잡고, 일리아와 어깨를 대고 앉아서 이레아에게 허리를 끌어 잡히고 있는 상당히 웃기는 상황이었다.

    “네가 우리를 구하려고 그 악마에게 달려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 때는 정말, 정말 미안해...”

    “맞아요. 저희가 유렌님의 지시를 어기고, 움직여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흐윽.”

    “죄송합니다. 유렌님.”

    일리아와 이레아, 아린은 내 말을 어기고, 나와 슬로스와 싸우던 곳으로 달려온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었다.

    나를 돕기 위해 왔지만 오히려 방해를 했다는 충격과 미안함에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그 일을 계속 후회했던 거 같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잖아.”

    솔직히 답답한 상황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슬로스의 거대한 힘을 느끼고도 날 돕기 달려와 준 것이 고마운 것도 사실이다.

    “다만 나중에 혹시라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땐 꼭 지시를 따라줘.”

    “네. 흐윽...”

    “알겠어.”

    여자들은 대답을 하면서도 계속 울고 있었다. 모두는 일어나지 않는 나를 걱정하며 자기반성을 심하게 했던 것 같다.

    “이제 괜찮으니, 그만 울어.”

    여자들의 등을 두드려 줄 때 로디엔이 들어왔다. 그녀는 이들처럼 울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으로 감싸진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귀왕살.”

    천으로 감싸진 물건은 당천위가 마지막에 날려 보냈던 귀왕살이었다. 이게 그녀에게 있는 것을 보니, 당천위는 그녀와 싸우고 있던 무언가를 이것으로 저격했던 것 같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지시하신 일은 완수했습니다.”

    로디엔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이라가 어떻게 됐을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로디엔의 말을 들어보니, 문제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일어나셔서 다행이에요.”

    로디엔은 이들과는 다른 반응으로 내 회복을 축하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 역시 이전과 무언가가 변한 것 같았다.

    쾅!

    문이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록스 후작이었다.

    “유렌!”

    “후작... 아버지.”

    후작님이라고 부르려다 아버지라고 말을 바꿨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그에게 일부러 아버지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당천위의 꿈을 보고나서 생각을 바꿨다.

    “괜찮으냐?”

    후작은 거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역시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걱정시켜드려 죄송합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계속해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후작의 마음이 전해져서 코끝이 찡해졌다.

    그를 계속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시끌거리는 문쪽을 보았다. 파이란과 페루, 마이라, 기라녹스, 크라이드, 브리카까지 모든 사람들이 와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

    이곳에서 생활하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쌓고, 이들 모두가 진심으로 내 걱정을 해주었다는 것에 더욱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유렌 자작.”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을 때 후작이 내 이름 뒤에 자작을 붙여서 부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영지를 지키느라 정말 수고했다. 너는 이 나라 누구보다 훌륭한 영주다. 누구도 너처럼 행동하지 못했을 거다.”

    후작은 나를 아들로써 걱정했고, 영주로써 인정을 해주었다.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

    사람들은 3시간이 지나도 내 방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약 후작이 모두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내 침실은 지금도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그래도 고마운 건 사실이지.”

    내가 기절해 있던 동안 성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영지민들도 내 걱정을 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빽.”

    “그래. 너도 고맙다.”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빽빽이의 머리를 살짝 긁어주었다.

    “별 문제도 없어서 다행이고.”

    빠르게 대피를 했기 때문에 사상자가 적었고, 국왕과 다른 영지의 영주들이 복구지원을 해줘서 영지는 빠르게 복구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이린은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이제 조용하니. 상태 좀 봐볼까.”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서도 한쪽으론 새로 얻은 기술들이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

    “전투 경험이 천무지체와 만독자전신기에 축적되었다고 했지.”

    상태창을 열어, 그 내용을 찾아보았다.

    [천수암왕의 전투경험 전승] -0%

    “이렇게 되는 거군.”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퍼센트에 따라 내가 꿈과 현실에서 얻었던 당천위의 전투경험들이 내 몸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전투 경험을 넘어서 이번에 새로 얻은 기술들을 찾아보았다.

    “역시 바로 쓰지는 못하는군.”

    [삭비(削匕)](사용불가 : 연위결(聯爲結)필요)]

    [뇌엽(雷葉)]

    [멸락(滅落)](사용불가 : 연위결(聯爲結)필요)]

    뇌엽을 제외한 삭비와 멸락은 연위결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연위결?”

    연위결은 듣도 보도 못한 단어다. 예상을 해보자면 당천위가 말했던 상단을 키우는 무공 같은데 왜 이게 개방되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연위결...일혼역루화(日魂易縷化)단고동위강(段鼓動爲講). 어?”

    연위결에 대해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전혀 모르는 구결이 튀어나왔다. 처음 들어보는 것이지만, 내 머릿속에선 그 내용과 뜻이 실타래 풀리듯 술술 나오고 있었다.

    “이게 그분이 말했던 안배인가...”

    당천위는 시스템이 아니라, 내 뇌리에 연위결을 새겨놓았던 것 같다. 그가 이렇게 한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이 느껴졌다.

    “잠은 충분히 잤고, 이제 다시 움직일 시간이군.”

    바로 바닥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눈을 감고, 연위결의 구결을 읊으며 상단전의 개방을 시작했다.

    **

    깨어 난지 한 달이 지났다.

    영지민들이 걱정을 하지 않게, 얼굴을 보여준 후 부상을 회복한다는 핑계를 대며 개인 연무장에서 주구장창 수련만 했다.

    내공과 외공수련에 절반, 나머지 절반의 시간 동안 연위결의 구결을 외우며 상단전을 개방하기 위해 노력했다.

    “답답하군.”

    많은 시간을 사용했지만, 생각만큼 효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연위결은 여태까지 했던 수련과는 좀 다른 형태의 무공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공이 아닌 정신 수양 같은 느낌이다.

    “진짜 어렵네.”

    “빽.”

    그늘 아래 누워 자두를 쪼아 먹고 있던 빽빽이가 힘내라는 듯 한쪽 날개를 퍼덕였다.

    “너 주인 잘 만나서, 팔자 좋은지 알아라.”

    “빽.”

    빽빽이가 ‘나 신경 쓰지 말고 수련이나 하시지’ 라는 듯 내게 시원한 바람을 뿌려주었다.

    “그래. 수련이나 하자.”

    지켜야 할 사람은 많아지고, 싸워야 하는 괴물들은 강해지고 있다. 당천위만 믿고 있을 수 없다. 결국엔 내가 강해져야 한다.

    “다시 해보자고.”

    눈을 감고, 연위결의 구결을 되뇌었다. 한 달의 수련동안 상단전이 조금 열린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헛바퀴를 돌리는 느낌이었다.

    “후, 또 실패인가.”

    이번에도 큰 수확을 얻지 못하고 눈을 떴다. 다음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더욱 조급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시스템에 너무 의존했던 걸지도 몰라. 연위결은 명상 같은 정신 수련에 가까우니까. 조금 더 천천히 마음을 내려놓고... 잠깐만 명상?”

    갑자기 내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자가 생각났다.

    “명상에 미친놈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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