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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당천위 강림 (3) (127/241)

당천위 강림 (3)

하늘을 수놓은 수십 개의 무기들이 생명을 가진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검은 묵직함을, 비수는 가벼움을, 도끼는 용맹함을, 창은 날카로움을. 무기들은 제각각의 성격을 내뿜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슬로스는 당천위의 멸락을 보고 죽음을 느꼈는지, 양손에 자신의 모든 힘을 응축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이슬처럼 맺혀진 검은 원은 조금씩 커지더니, 슬로스를 집어삼키고도 멈추지 않고 그 크기를 더욱 불리고 있었다.  

슬로스는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힘을 폭발시켜 이 영지 전체를 재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천위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침착했고 여유로웠다.  

‘저놈은 지금 자폭을 하려고 합니다.’ 

“알고 있다.” 

‘빨리 처리를 해야 합니다. 저게 폭발하면 이곳이 모두 날아갈 겁니다!’ 

“괜찮다.” 

당천위의 침착한 목소리를 듣자, 슬로스의 자폭이 폭죽을 터트리는 것 같지 가벼운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정도로 믿음직스러웠다. 

“느껴라.” 

‘예?’ 

“저 괴령의 기가 모이는 중심이 느껴지는가?” 

당천위의 말을 듣고, 슬로스를 쳐다보았다. 창조주의 눈을 쓸 수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놈의 힘이 계속 모여드는 것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그리고 세밀하게 느껴라. 저 괴이한 힘의 중심과 괴령의 중심을.” 

‘...알겠습니다.’ 

슬로스를 잘못 건드리거나, 시간이 지체되면 이곳이 날아갈 위험한 상황에서도 당천위는 내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다. 한 번 믿었으니, 끝까지 그를 믿기로 했다.  

보는 게 아니라, 느끼라고 했지. 

더 이상 시각으로 슬로스를 살피지 않았다. 저 원에서 나오는 힘 자체를, 원에서 일렁이는 어둠 자체를 보았다.  

‘저것 인가...“ 

검은 구의 중심, 자폭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슬로스가 가진 핵의 고동이 느껴졌다.   

“그래. 그것이 제대로 보는 것이고, 제대로 느끼는 것이다.” 

당천위는 빙긋 미소를 짓고, 손을 내렸다. 그의 손이 내려감과 동시에 공중을 유영하던 수십의 무기들이 유성우처럼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슈아아앙! 

무기들에 들어있는 힘은 그저 낙하에서 오는 힘만이 아니다. 검, 창, 도, 비수, 도끼까지 모든 무기에 어검의 묘리가 깃들어 당천위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파아앙! 

무기들은 슬로스의 검은 원을 그대로 뚫어버리고, 놈의 핵에 모조리 박혀버렸다. 평범한 검과 창이 당천위의 손에선 희대의 명검과 명창이 되어 슬로스의 질기고 질긴 피부를 가볍게 꿰뚫어버렸다.  

“커...어...” 

슬로스가 자폭을 위해 모으던 거대한 파괴의 힘은 허공에 흩어져버렸고, 놈의 전신은 수십 개의 무기가 박혀 있어 고슴도치같은 모습이 되었다.  

“진...짜...귀...찮아...” 

쿵! 

핵이 가루가 되어버린 슬로스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자신이 만든 대지의 균열에 그 거대한 머리를 쳐 박았다. 놈은 모든 힘을 잃은 듯 몸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죽는...것도...” 

슬로스는 자신이 파괴한 대지 사이로 흘러내려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나와 당천위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모든 것을 지켜본 사람들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하겠지. 당천위의 멸락은 나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는 위력과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고, 슬로스가 모으던 힘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저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별거 아닐세. 저 정도의 괴령이 존재하다니, 이곳은 참 신기한 곳이야.” 

‘아쉽게도 저런 놈들이 더 있습니다.’ 

“그런가?” 

당천위는 별 반응을 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그건 이제 자네가 상대해야지. 길은 만들어 놓았으니, 할 수 있을 걸세.” 

좀 전에도 길을 만들어 놓았다고 했는데, 그가 내게 무슨 안배를 해놓은 것 같았다.  

‘길이라고 하신다면...’ 

“자네가 걸어야 할 길을 자네의 몸에 새겨 놓았네. 재밌게도 자네 몸은 하늘이 내린 신체다보니, 내가 만들어 놓은 길을 스스로 더욱 발전시키더군. 자네는 나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천무지체가 무언가를 한 건가.  

당천위의 말은 지금으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래도 일단 그에게 감사를 전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당천위는 다시 내 몸을 살펴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네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군.” 

‘네? 그게 무슨...’ 

“신체와 영혼 사이가 조금 떨어져 있어.”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지금 자네의 신체를 움직이는 게 나지 않나. 그래서 알 수 있었네.” 

당천위가 별거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 혼이 신체를 벗어나야 하지만 자네의 혼은 특이하게도 신체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어. 신기한 현상이야. 자네는 정말 여러모로 새로운 인간이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직은 없네. 다만...” 

‘네?’ 

“아니야. 내 생각일 뿐이니...” 

당천위는 자신의 생각일 뿐이라고 하며 말을 아꼈다. 그 내용이 궁금했지만, 한 번 닫힌 그의 입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네. 먼 세계의 후예여.”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난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은 사람들을 한 번 쳐다 본 후 말했다.  

“후후, 자네와는 왠지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저도 꼭 다시 뵙고 싶습니다. 아니, 뵐 수 있을 겁니다.’ 

“그때는 내가 낸 숙제를 해결하길 바라네. 그렇게 되면 그땐 진정한 만천화우를 전해주지.” 

‘진정한 만천화우...’ 

만천화우는 사천당가 최후, 최종의 암기술이자, 내 목표 중에 하나였다. 당천위의 말을 들으니, 그의 만천화우는 단순히 시스템의 힘으로 배우는 기술과 다른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숙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꼭 해내겠습니다.’ 

“그래. 그럼...” 

사라질 거라 생각했던 당천위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바닥에 박혀있던 귀왕살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이왕 온 거 끝은 내고 가야겠지.” 

귀왕살은 하늘 위로 떠오른 뒤 에킬산이 있는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당천위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피식 웃었다.  

당천위가 한 행동은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테니, 구태여 묻지 않았다. 

“끝났군. 이제 정말 가야겠어.” 

‘네...’ 당천위는 잠시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여전히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가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부탁이라기보다는 내 바람이지만.”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할 수 있다면 이곳에 당문를 세우고, 그 무예를 전해줬으면 좋겠네.” 

‘당가가 아니라 당문인가...’  

꿈에서 본 것이 생각났다.  

반으로 갈라진 사천당가의 현판, 불타오르는 전각, 죽어있는 사람들. 그 앞에서 무표정으로 깊은 슬픔을 참아내던 당천위의 모습이 그려졌다.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당천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도 준비해 놨지만, 내 바람일 뿐이야. 부담가질 필요는 없네. 그럼 정말 가야겠어.” 

‘정말 감사했습니다.’ 

“먼 곳에서 만난 후예가 내 마음에 쏙 들어서 나도 정말 좋았네. 그럼...” 

번쩍! 

눈이 시릴 정도의 밝은 빛이 내 몸에서 빠져나와 허공으로 사라졌다. 

내 몸에 있던 당천위의 존재감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다리와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어?” 

내 의지와 다르게 내 몸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쓰러졌다. 뒤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희미하게 보며 정신을 잃었다.  

** 

글러트니가 마이라를 노릴 것을 알고도 유렌이 마을 쪽으로 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를 보호하는 사람이 로디엔이었기 때문이다.   

로디엔의 색적능력은 유렌을 제외하면 가이린 제일이었다. 그는 로디엔의 감각과 능력을 믿고 마이라를 보호하는 중요한 일을 맡겼다.  

“이건...” 

유렌이 슬로스와 정면으로 맞붙었을 때 마이라의 감각에 개미보다 못한 아주 미세한 감각이 잡혔다.  

부우웅! 

그녀는 등에 매고 있던 대검을 뽑아서 자신의 앞을 향해 휘둘렀다.  

쩌엉! 

빈 허공에서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허공에 백의를 입은 검사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반쯤 뽑혀 있는 흰색 검이 잡혀 있었다.  

“음...” 

검사는 깜짝 놀란 와중에도 로디엔의 검을 간신히 막아낸 모양이다.  

“너 뭐냐?” 

로디엔이 자신의 검을 어깨에 걸치며 물었다.  

스으윽. 

검사는 로디엔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검을 끝까지 뽑고, 검집을 땅에 던졌다. 말은 필요 없다는 것 같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다만 좀 거칠 걸?” 

로디엔이 검사의 목을 날려버리기 위해 대검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검사는 그녀가 휘두르는 검을 튕겨내며 오른쪽으로 이동한 뒤 자신의 몸을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지게 만들었다.  

“똥 싸고 있네.” 

로디엔은 검사를 비웃으며 오러를 두른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챠앙! 검사는 로디엔의 검을 피해내지 못하고 막을 수밖에 없었다. 검이 맞부딪치자 다시 검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기술은 충격을 받으면 풀리는 것 같았다.  

“으음...” 

“헛짓하지 말고, 그냥 덤비라고.” 

“어쩔 수 없군.” 

검사는 고개를 저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의 표정은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그래. 제대로 붙어보자고...너!” 

검사는 그 검으로 로디엔을 노리지 않고, 자신의 왼팔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떨어진 검사의 왼팔이 피를 뿌리며 퍼덕였다.  

“이런 미친!” 

그 모습을 본 로디엔이 경악을 하고 있을 때 검사는 다시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피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숨으려고...” 

로디엔은 자신의 말과 달리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느꼈다. 피 냄새는 바닥에 떨어진 남자의 팔에서만 나고 있었다. 

 거기다 좀 전까지 느낄 수 있었던 검사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흡사 제물을 바쳐 능력을 강화한 것 같았다.  

컁!  

“큭!”  

로디엔은 간신히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검을 막아내었다. 1초만 늦었어도 그녀의 머리에 구멍이 났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챠앙!  

이번엔 로디엔의 왼쪽 허리를 노리고 검이 휘둘러져왔다. 겨우 막긴 했지만 그녀의 허리에 작은 상처가 생겼다.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지랄 맞네.” 

카아앙! 

검사는 그녀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왔다. 심장은 로디엔이 예상했던 부위였기 때문에 검을 세워 막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검사의 위치는 오리무중이었다.  

챵! 

쩌엉! 

로디엔은 계속해서 검사의 검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막을 수 있었지만, 그의 위치는 특정 하지는 못했다. 대신에 그녀의 몸에 조그마한 상처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제길...” 

마을 쪽에서 천신과 마신이 싸우는 것 같은 굉음과 빛이 연속해서 들려오다가 조용해졌다. 유렌이 걱정된 로디엔은 결국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로 결정했다.  

“넌 진자 뒤졌어!” 

로디엔이 반지를 뽑아서 자신의 정령력을 개방하려고 할 때였다. 그녀의 감각에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고 미친 듯이 쏘아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퍼억! 

그것은 오른쪽 구석으로 쏘아져 허공에 틀어박혔다. 날아온 것은 길고, 얇은 단검이었는데, 무언가에 박힌 듯 허공에 멈춰 있었다.  

잠시 뒤 단검의 날에서 주르륵 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단검이 머리에 박힌 검사의 모습이 스르륵 드러났다. 검사는 절명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 단검...” 

로디엔은 검사의 머리에 박힌 귀왕살을 뽑아보고, 유렌이 가지고 다니 던 물건임을 알아챘다.  

“유렌님.” 

** 

지옥이 현신한 것 같았던 전투가 끝났다.  

마을은 초토화되었지만, 사상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비전투인원을 미리 대비시켰고, 슬로스를 보자마자 유렌이 재빠르게 움직여서 전투인원도 대피시켰기 때문이었다.  모든 영지민들은 유렌과 당천위의 활약을 뒤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가슴 속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영지의 복구 작업을 하고 싶어 했지만, 페루와 파이란의 만류로 복구와 보고는 내일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하는 것으로 미뤄졌다.  

불침번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잠에 들었을 무렵.  

당천위의 멸락이 떨어진 곳이자 슬로스가 죽은 장소에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나타났다. 걸어 온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온 것처럼 그는 그 자리에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바닥으로 향했다. 슬로스 때문에 갈라졌던 대지가 움찔움찔 거리더니, 그 안에서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완벽한 검은색 돌조각이 떠올랐다.  

떠오른 돌 조각은 부르르 떨더니, 그의 손에 액체처럼 흡수되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 보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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