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천위 강림 (2)
“너는...누구...인가...”
슬로스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의 존재감에 속이 울렁거리고, 호흡이 점차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륙의 모든 인간을 벌레로 보는 슬로스지만, 당천위 앞에선 그 따위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대체...어떻게...인간...따위가...”
슬로스는 자신의 앞에선 당천위가 좀 전에 자신에게 쓰러진 유렌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 따위라, 버릇이 없군.”
당천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가 하니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으...”
슬로스는 처음으로 귀찮다 이외의 감정이 자신에게 들어온 것을 느꼈다. 인간을 벌레로 봤기에 그저 눌러 죽인다고 생각하던 것에서 ‘꼭 죽여 버리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슬로스의 나태함 속에 감쳐진 깊숙한 본능이 당천위를 최대한 빠르게 죽여야 한다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꾸우욱!
쿠우우우.
슬로스가 주먹을 꽉 쥐자,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가 발에 힘을 준 압력으로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슬로스와 마주보고 있는 당천위는 그 모습을 보고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하게 서있었다.
그는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데, 밤하늘이 그를 위해 광대한 빛을 내려 보내고 있었고, 땅에 남아 있는 생기가 그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세계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영주님...”
“어떻게 사람이 저런 모습을...”
“천신이다. 천신이 강림하셨어.”
슬로스의 압박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던 사람들은 홀로 빛나고 있는 당천위를 보며, 슬로스에 대한 공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앞에 선 남자의 등은 그 어떤 악마가 와도 막아 줄 것처럼 듬직하고 거대했다.
“영주님!”
“영주님! 힘내세요!”
슬로스의 존재감으로 입조차 떼지 못했던 사람들이 유렌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당천위가 슬로스 내뿜는 압박과 공포를 막아주기 때문이었다.
“홀로 피할 수 있었을 터인데, 막는 선택을 하다니 사람을 잘 못 보지는 않았군.”
당천위는 유렌이 도망치지 않고, 뒤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슬로스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유렌의 그 의기가 기꺼워 직접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스윽.
당천위가 아래에 떨어진 비수를 쳐다보자, 비수는 실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의 눈앞으로 떠올랐다. 그는 그 비수를 잡아 한 바퀴 돌렸다.
“나쁘지 않군.”
“귀...찮은...인...간...”
콰아앙!
슬로스가 전신의 힘을 응축 시킨 뒤 밟고 있는 땅을 폭발시키며 당천위에게 돌진했다.
그 충격에 주변의 건물이 폭탄에 맞은 것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인간은 그 근처에만 가도 종이처럼 찢겨나갈 것 같은 압력에서 당천위는 슬로스를 비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그저 힘뿐인 괴령이로구나.”
슬로스의 충격파와 압력은 당천위에겐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천위는 산들바람 속을 걷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달려드는 슬로스를 향해 나아갔다.
“이...놈...”
슬로스는 거대한 주먹을 유성처럼 내뻗어 당천위를 내리쳤다. 닿지도 않았지만, 압력만으로 대기가 찌부러지는 것 같았다.
“삭비(削匕).”
당천위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슬로스의 주먹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
거대한 압력을 연어처럼 헤쳐나간 당천위의 비수는 슬로스의 주먹을 두부처럼 뚫어버리며, 그 안에 담긴 모든 힘을 깎아 버렸다.
하늘을 부술 것 같았던 슬로스의 주먹이 작은 비수 하나에 완벽하게 막혀버렸고, 역으로 슬로스가 피해를 입어버렸다.
두두둑.
비수가 박힌 슬로스의 주먹에서 흐르는 검은 피가 갈라진 대지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어떻게...이런...”
슬로스는 작은 비수에 꿰뚫려 피가 흐르고 있는 자신의 주먹을 보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크...”
슬로스는 자신의 주먹에 박힌 단검을 뽑아 찌부러뜨렸다. 그는 그저 쥐는 것만으로 가루가 되어버리는 단검에 자신의 힘이 밀린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몰라... 다...눌러죽...인다...”
슬로스의 전신이 더욱 커지고, 부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파괴의 의지를 담은 검은 오오라가 흐르기 시작했다.
빠드득.
슬로스의 주변으로 퍼져나간 파괴의 힘으로 인해, 대지가 지진이 난 듯 갈라지고 무너져 내렸다. 그 힘은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원을 그리며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 파괴의 힘조차 당천위를 넘어서지 못했다. 슬로스의 능력은 당천위 앞에서 성냥불처럼 사그라졌다.
슬로스가 어떤 힘과 무슨 능력을 사용해도 당천위는 넘을 수 없는 철옹성처럼 우뚝 서있었다.
쿠우우우!
슬로스는 퍼져나가던 파괴의 힘을 자신의 전신에 응축시켰다. 이번엔 주먹이 아니라, 자신의 온 몸을 탄환삼아 당천위에게 돌진했다.
콰아아아.
슬로스의 전신은 파괴와 죽음의 힘이 담겨있는 사신의 철퇴 같았다. 당천위는 슬로스의 돌진에 피하지도, 멈추지도 않고 그를 향해 마주 달렸다.
빠직!
당천위의 일보에 대지가 갈라지고, 이보에 대기가 찢겨졌다. 그의 몸은 한줄기 뇌전(雷電)이 되어 슬로스의 앞에 이르렀다.
“뇌엽(雷葉).”
당천위가 뻗어낸 주먹이 우레가 되어 돌진하던 슬로스를 내리쳤다. 슬로스가 그 공격을 버티기 위해 하체에 힘을 주었지만, 당천위의 주먹은 그가 버틸 만한 기예가 아니었다.
뇌엽은 위력도 위력이지만, 슬로스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부위를 정확하게 가격하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쿠우우우.
당천위에게 등을 직격당한 슬로스는 돌진하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내려 꽂혔다.
“크...”
십이 비도로도 뚫어내지 못했던 슬로스의 등에서 검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슬로스는 당천위를 올려다보며, 그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이미 완성되어 그 끝에 이른 자.
인간이지만, 인간을 벗어나 그 위에 오른 자다.
“크...으...”
슬로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피가 흐르던 주먹과 등의 상처가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재생이라.”
그 모습을 본 당천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오른손 검지를 까딱이자, 아직도 슬로스의 어깨에 박혀있던 귀왕살이 스스로 빠져나와 당천위의 손에 잡혔다.
“그리운 물건이군.”
당천위는 귀왕살을 잡아들고, 그립다는 눈빛을 보냈다.
“넌...내가...죽...인다...”
“그건 불가능하다.”
“크...”
당천위가 귀왕살을 빙글 돌리며 웃었다.
“내 후예가 깨어날 때 까지 네가 버틴다면 칭찬을 해주지.”
**
꿈을 꾸었다.
눈앞에 누군지 모를 녹포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앞엔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장원이 있었는데, 그 장원 전체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장원의 정문 앞에는 반으로 쪼개진 현판이 있었다.
왼쪽의 현판엔 사천이라 적혀있었고, 오른쪽의 현판엔 당가라 적혀있었다.
‘사천당가...’
남자는 현판을 쳐다보다가, 불타는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마가 뱀의 혀처럼 넘실거렸지만, 그에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장원 안에는 수많은 시체가 있었다. 시체는 가지각각으로 죽어있었다. 사지가 찢겨진 사람들, 목이 베어진 사람들, 신체가 반으로 쪼개진 사람들.
남자는 장원의 끝까지 이동하며 죽어있는 모든 시체들을 자신의 눈에 담았다.
그는 지독히도 슬퍼보였지만, 눈물 한 방을 흘리지 않았다.
남자는 장원이 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후 장원을 나왔다.
남자는 알 수 없는 산을 넘었고, 이름 모를 강을 넘어 산이 겹겹이 쌓여있는 장소에 이르렀다.
하나의 성이라도 해도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남자는 홀로 쳐들어갔다.
셀 수 없는 마인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의 비수와 주먹에 모조리 죽어나갔다.
남자는 자신을 막아서는 모든 마인들을 뚫어내고, 마인들의 주인의 앞에 홀로 섰다.
철문처럼 굳게 닫혀있던 남자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하지만 내겐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 있던 남자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며 정신을 잃었다.
**
“이제야 일어났나?”
정신이 들자, 신체 곳곳에서 검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슬로스가 보였고, 내 몸은 스스로 움직이고, 내 입에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우리 구면이지?”
‘설마, 천수암왕이십니까?’
“그래. 기억하는군.”
내 입을 빌려 말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았다. 조금 전 꿈에서 본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그때는 참 답답했었는데 말이야. 성장한 걸 축하하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네.”
‘네? 그게 무슨...’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니 천수암왕이 내 몸을 사용하고 있었고, 슬로스는 피를 줄줄 흘리며 눈에 분노를 담고 있었다.
귀찮음밖에 모르는 저놈이 저런 표정이 있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자, 목이 찢어져라, 내 이름을 부르는 영지민들이 보이고 있었고, 믿기 힘든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일리아와 이레아, 아린이 보였다.
“후예.”
‘예?’
“시간이 얼마 없어. 잘 보고, 잘 느끼도록.”
천수암왕의 눈짓에 바닥에 떨어진 비수 하나가 중력을 무시하듯 스스로 떠올랐다. 허공섭물같이 내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비수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건 대체...’
“이것이 네 내공에 자전이 들어가는 이유이자, 공명의 비결이다.”
‘자전, 공명...’
“만독은 천하의 모든 독을 다루고, 자전은 천하의 모든 무기를 다룬다. 둘이 합쳐져 만독자전이며, 이것이 내가 만든 당가 최강의 심공이다.”
만독자전신기를 만든 사람이 이 사람이었다니.
천수암왕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비수를 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수는 내가 전력을 다해 던지는 것 이상의 힘과 속도, 깨달음을 가진 채 슬로스에게 빛살처럼 날아갔다.
“귀...찮...게!”
슬로스가 피하려고 했지만, 비수는 눈이 달린 것처럼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귀찮아서 공격을 피하지 않는 슬로스가 암기를 피하려고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퍼억!
“크...”
검기조차 두르지 않은 비수가 벽돌 같은 근육으로로 보호되어, 만년한철보다 단단한 슬로스의 피부를 두부처럼 뚫어버렸다.
‘어, 어떻게! 검기도 없는데!’
“알기 쉽게 말하자면 이건 어검의 묘리를 풀어낸 것이다.”
‘어검이라니...’
어검은 지금의 난 생각조차하기 어려운 경지다. 어검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어검이라 하는 것은 검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검에도, 다른 무기들에도 적용할 수 있지.”
‘어검은 어떻게 해야 익힐 수 있는 겁니까?’
“아직 네겐 멀었다. 하지만 그 길은 열어놓았으니, 결국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수암왕이 기꺼운 웃음을 지으며, 내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두드렸다. 그가 내 뇌에 무언가를 해놓은 것 같다.
“중점은 만독자전신기의 내력과 상단전이다. 내공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최근에 무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 마지막 선물을 주고 가마.”
‘네?’
“만천화우는 어검과 상단의 힘이 극에 이르러야 쓸 수 있는 기예다. 지금은 ‘천판(天版)’도 없으니, 다른 것을 보여주마.”
천수암왕이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주변에 널려있던 비수, 단검, 검, 도끼, 창을 비롯한 무기들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모든 무기들은 땅으로부터 10m 가량 떠올라서 슬로스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아...”
“세상에...”
“이게 사람의 능력인가...”
지독하리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에 모든 생명체가 숨을 죽였다.
슬로스도 그 모습에 긴장한 표정으로 전신에 힘을 모았다. 자신의 힘을 폭발시켜 막으려는 것 같았다.
“네게 처음으로 가르쳐주는 것이니, 잘 느끼도록 하라. 이것 역시 상단과 만독자전신기의 내력을 이용하는 기예다.”
당천위의 말에 대답조차하지 않고, 내 몸에 흐르는 내력과 상단전을 파악하는데 집중했다. 당천위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멸락(滅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