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슬로스 (124/241)

슬로스

“포메라.” 

주머니에서 꺼내들은 것은 포메라의 혼의 구슬이었다. 구슬을 잡고 포메라를 호출하자, 바닥에서 혼상태의 포메라가 나타났다. 

“주인. 삼일 만에 부르다니,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오?” 

“그래. 내가 너 무지 좋아하지.” 

“괜히 물어봤구려. 주인이 그런 말을 하니 징그럽소. 이번엔 또 어디로 가야하오?” 

“아쉽게도 이번 일은 워프가 아니야.” 

“음?” 

포메라가 의외라는 듯 입을 닫고, 날 올려보았다. 

“그럼 왜 불렀소?” 

“이번엔 네 흑마법이 필요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포메라는 내 손가락을 따라서 대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오? 저들이 왜 이리 몰려드는 거요?” 

“이 영지는 곧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을 거다.” 

“몬스터?” 

“그래. 사실 이번에...” 

포메라에게 지금까지의 사정을 모두 이야기 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포메라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음. 주인이 원한다면 당연히 도와주겠지만, 성녀가 있으니, 오히려 내가 공격당하는 거 아니오?” 

“일부러 너랑 떨어뜨려 놨으니까, 네가 잘 피해 다녀야지.” 

“주인. 너무 막무가내 아니오?”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이번엔 내 컬렉션도 좀 꺼내봐. 얼마나 강한지 좀 보자.” 

“내 컬렉션이라니...” 

포메라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녀석은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예지라는 건 정말 확실한 거요?” 

“그럼 괜히 이 난리를 치겠냐?” 

“휴우, 주인 곁에 있으니 정말 별일이 다 생기는 것 같소. 어쨌든 알겠소. 나도 나대로 놈들을 막아보겠소.” 

“그래. 고맙다. 넌 동쪽이야.” 

“동쪽이라, 이미 내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군. 알겠소.” 

“처음부터 소환하지 말고, 놈들이 나타나면 소환해서 싸워.” 

“알겠소.” 

포메라는 대답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포메라 본체도 성장했고, 여러 보스 몬스터들을 언데드로 만들었으니, 녀석 혼자서 동쪽을 막아 낼 거라 생각해 동쪽엔 전투인력을 거의 보내지 않았다. 

“이제 정말 준비는 끝났고, 놈들이 오는 것만 기다리면 되나.” 

아래를 보니,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환영미리진 안으로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그 앞엔 사람들을 안내하는 판톤과 파이란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멀리 있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많은 감시병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런 신호도 나오지 않았다. 

“마이라가 말했던 시간은 저녁과 밤사이로 보였으니까. 아직 시간이 남았겠지.” 

“영주님!” 

페루가 모두에게 내 지시를 전한 뒤 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전투인원이 지정된 자리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반시간정도 지나면 영지민들이 전부 결계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그래. 수고했다.” 

“아닙니다.” 

마을을 지켜보며,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계속해서 내력을 휘돌렸다. 40분 정도가 지난 뒤 해가 완전히 지고나자, 아래를 보던 페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영주님. 일단 영지에 있던 주민들은 모두 결계 안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알겠다.” 

이제 환영미리진의 마지막 말뚝을 박을 때가 왔다. 난 내 발밑에 있는 돌덩이를 들어올려, 진의 끝자리에 박아버렸다. 

우우우우웅! 

공기가 가볍게 떨리는 소리와 함께 내가 있는 에킬산 언덕에서부터 성과 마을을 잇는 통로 사이에 대형 환영미리진이 발동되었다. 

“우와! 진짜 결계네요!” 

진을 처음 본 페루는 진속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화아악! 

마을의 입구 쪽에서 보기 만해도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은 신성한 빛이 올라왔다. 그 빛은 날개달린 여성의 모습을 한 채 환영미리진을 뒤덮었다. 

“이레아님의 축복이에요.” 

“그래. 잘 해주시는군.” 

마을 쪽에 있던 이레아가 이곳 전체를 덮을 신성력을 사용했다. 이제 웬만한 언데드는 이곳에 접근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펑! 

마을 쪽에서 봉화처럼 녹색폭죽이 하나 올라왔다. 

“전투 인원배치가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내려가자.” 

“알겠습니다.” 

진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언덕에서 내려가서 영주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영주님 진짜 마법사 아니야?” 

아래로 내려가니, 진을 보호하기 위해 진밖에 있던 사람들이 환영미리진의 발동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바로 진 안으로 페루를 데리고 들어갔다. 밖에서는 아무도 없어 보였지만, 안에 들어가니 영지민들과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영주님. 이게 아까 말씀하신 결계입니까?” 

성 안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수룡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안드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의 뒤에 있는 수룡기사단의 기사들도 벙찐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네.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결계입니다.” 

“대단하십니다. 대피 훈련을 처음부터 지켜봤는데, 지적할 부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후작님이 보신다면 정말 뿌듯해 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진 밖을 살펴보고 싶은데, 나갈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밖으로 나갈 땐 보이는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아, 외부에선 들어올 수 있지만, 내부는 상관없나 보군요. 그럼 지금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영주님께 도움을 드리러 왔지만, 저희가 오히려 배우며 가게 생겼네요.” 

펑! 

안드로와 기사들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서쪽 성벽에서 폭죽이 올라왔다. 

“오, 폭죽까지 훈련이 아주 본격적이네요.” 

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중을 수놓고 있는 붉은색 폭죽만을 쳐다보았다. 

펑! 

펑! 

에킬산이 있는 북쪽을 제외한 동쪽과 남쪽에서도 붉은색 폭죽이 올라왔다. 완연한 밤이 되었기 때문에 폭죽의 불꽃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놈들이 왔다는 신호다. 

“몬스터들이 세 방향으로 오는 것을 가정한 훈련인가요? 정석적이지만, 나쁘지 않군요.” 

“아뇨.” 

“네?” 

“저건... 훈련이 아니라, 진짜 몬스터가 나왔다는 신호입니다.” 

“네?” 

말을 들은 안드로와 기사들, 그리고 앉아 있던 영지민들이 모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 쓰기도 되어 있는 폭죽은 파란색 훈련용 신호였습니다. 저 붉은색 폭죽은 성벽에 설치되어 있는 진짜 신호입니다.” 

“그, 그게 대체...” 

바로 옆에 있는 첨탑을 타고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성벽 뒤로 몬스터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마이라가 말해줬던 대로 언데드들과 놀, 골렘들이 있었지만 글러트니가 만든 몬스터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따로 오는 건가.” 

몬스터들의 종류와 숫자를 확인한 후 아래로 내려갔다. 

“정말입니까? 정말 몬스터가 오는 겁니까?” 

“네. 세 방향에서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군요.” 

진지한 표정으로 안드로에게 사실을 전했다. 안드로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평정을 찾았다. 

“부단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안드로는 내가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들은 언데드와 놀, 골렘입니다. 아까 제가 소개해드렸던 서쪽을 맡아주십시오. 병사들은 그곳에 있을 겁니다. 그들을 지휘해서 놈들이 오는 것을 막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수룡기사단 정렬!” 

“정렬!” 

안드로의 부름에 모든 수룡기사단이 진형을 갖췄다. 기사들의 표정 역시 진지함으로 덮여있었다. 

“오후에 우리가 시찰했던 서쪽을 향한다!” 

“알겠습니다!” 

안드로와 수룡기사단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서쪽으로 움직였다. 

“페루.” 

“네!” 

“이곳을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 

“음, 주인의 말이 정말이었군.” 

밖에서 가이린을 지켜보고 있던 포메라가 몬스터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몬스터는 별로 없었지만, 그 숫자가 상당했다. 

“나도 주인이 없었다면 저런 꼴이었을 지도 몰랐겠지.” 

포메라는 생각 없이 홀린 것 처럼 움직이는 몬스터들을 보며, 이전의 자신 역시 저런 꼴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흐음...” 

그 때문인지 자신의 얄미운 주인이 오늘 따라 고맙게 느껴졌다. 

“그럼 약속을 지켜볼까.” 

포메라는 블링크를 사용해서 몬스터들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어둠의 커튼.” 

화아악! 

포메라의 주문에 그의 뒤에서 시꺼먼 커튼이 펄럭였다. 그 안에서 검은 오오라를 두르고 있는 몬스터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키익.” 

“크르르.” 

“카악!” 

주먹이 검은 불꽃으로 타고 있는 플랑코 투사, 더욱 거대해진 다리를 달고 있는 인명지주, 검은색으로 빛나는 검을 들고 있는 리빙아머에 포메라가 손수 만든 듀라한까지 모아놓은 언데드들을 모두 풀어놓았다. 

투두두둑. 

포메라는 유리병을 하나 꺼내서 그 안에 있던 흰색 뼛가루를 땅에 뿌렸다. 뼈가루가 떨어진 땅에서 씨앗이 발아하듯 해골이 올라오고 있었다. 

“가라!” 

“카악!” 

“키아악!” 

포메라의 손가락을 따라 그의 소환수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힘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슈우욱! 

콰아앙!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리빙아머였다. 순식간에 몬스터들의 중심에 이동한 리빙아머는 검을 팽이처럼 휘둘러 주변의 몬스터들을 폭풍처럼 베어버렸다. 

“키아악!” 

인면지주는 포메라가 새로 달아준 다리들을 자랑하듯 언데드들을 다리로 눌러 터트렸다. 

“카악!” 

플랑코 투사는 권사들 저리 가라하는 속도와 위력을 주먹으로 돌골렘을 때려 부수고 있었고, 듀라한은 기병이라도 된 것처럼 몬스터들을 짓밟아버렸다. 

딸그닥. 

포메라가 소환한 해골들은 가이린을 공격하는 해골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능력과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포메라의 해골 한 마리가 해골병사 네 마리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으음, 주인말대로군.” 

전투가 쉽게 풀리고 있어서, 포메라는 마나 명상에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그저 마나명상만 했을 뿐인데, 소환수들이 강해지고, 특별한 능력까지 생겼어. 정말 신기하군.” 

쾅! 

콰앙! 

가이린 내부의 지원이 없어도 포메라 혼자서 동쪽을 지켜내기 충분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메라의 소환수들 앞에 글러트니의 몬스터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그녀석도 세상 구경 좀 시켜줘야겠군.” 

포메라의 뒤에 다시 어둠의 커튼이 나타났다. 그 안에서 골렘보다도 거대한 붉은 거인이 나타났다. 

“너도 가라.” 

“쿠어...” 

콰앙! 

글러트니의 위는 자신의 원래 주인이 보낸 몬스터들을 향해 살이 뒤룩뒤룩 뭉친 주먹을 휘둘렀다. 그 주먹 한 방에 포메라에게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곤죽이 되어버렸다. 

“빨리 처리하고, 주인에게 가봐야겠군.” 

몬스터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포메라는 성벽에 있는 인간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유렌에게 돌아가서 소환수들의 능력을 자랑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주받은 흑마법사가 인간들을 위해 싸운다니, 뭐, 나쁘지는 않군.” 

포메라는 죽은 몬스터들을 다시 자신의 언데드로으로 소환해서, 상대의 세력을 줄이고 자신의 세력은 점점 늘려나갔다. 

포메라는 전장에서 흑마법사가 무서운 이유를 이곳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글러트니가 보낸 몬스터보다, 포메라의 몬스터가 더 많아졌다. 포메라가 마지막으로 몬스터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다. 

“너...였...군...”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아주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 

포메라가 바로 고개를 돌리자, 작은 체구의 인간이 그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상...황이 이상...했는데...” 

“어...” 

포메라는 이 작은 인간에게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존재감을 느꼈다. 있지도 않은 등줄기에 소름이 좌르륵 돋아나는 것 같았다. 

“놈...의 위를... 어떻게 다루...아, 귀찮군.” 

“다, 당신은 누구요?” 

그의 허무한 분위기에 포메라는 뒷걸음질 치며, 자신의 언데드들을 호출했다. 

“나는...슬로스...” 

“슬로스?” 

슈아앙! 

포메라가 부른 해골들이 슬로스를 향해 칼과 도끼를 휘둘렀다. 

펑!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 뒤 슬로스에게 무기를 휘두르던, 수십의 해골이 풍선 터지듯 한 번에 터져나갔다. 

“아...” 

슈아앙! 

포메라를 지키기 위해 도착한 리빙아머가 바로 슬로스를 향해 흑검을 휘둘렀다. 

터엉! 

슬로스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자 방금과 같은 충격파가 터져서 리빙아머의 공격을 막았다. 

“카악.” 

“키이익!” 

리빙아머가 시간을 버는 동안 포메라의 나머지 몬스터들도 슬로스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너무...귀...찮...아, 몰라...” 

찌지직. 

슬로스의 옷이 찢어지며, 1m50cm 밖에 되지 않았던 신장이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순식간에 2m가 훨씬 넘는 신장이 되어버렸다. 

“음...” 

바싹 마른 것은 그대로였지만, 슬로스의 신장의 커진 것만큼 그의 존재감이 더욱 거대해졌다. 그 영향력을 바로 앞에서 느끼는 포메라는 손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다...죽어...” 

“주인. 약속을 지킬 수 없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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