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무음의 제니스 (117/241)

무음의 제니스

“용병님. 다 됐어요. 신기하네요.” 

마이라와 애리가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내게 보여주었다. 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녀들의 갈색 머리카락은 어두운 주황색으로 변해있었다. 

“확 달라졌네.” 

“그래요?” 

우리는 언덕 근처에 있던 동굴에서 밤을 보냈다. 

난 아침이 되자마자 가지고 있던 염색약을 건네주며 마이라와 애리에게 염색을 지시했다. 

“보통 사람을 수색할 때 머리색부터 보거든. 예지를 사용한다면 뭘 해도 들키겠지만, 그건 그렇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힘이 아닐 거야. 지금 모습이면 웬만해선 들키지 않겠지.” 

“그렇군요.” 

둘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머리를 염색하게 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용병님.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용병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유렌이라고 불러. 아니다. 한동안은 베인스라고 불러.” 

“알겠어요. 베인스님.” 

“베인스님.” 

마이라의 말을 따라한 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언덕의 끝을 쳐다보았다. 

“허, 저건 진짜...” 

그곳엔 쪼그마한 포메라가 떠오르는 태양 아래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빽빽!” 

무인보다도 완벽한 자세, 자신의 두개골 위에서 노래하고 있는 빽빽이를 무시하는 집중력, 외모가 해골만 아니었다면, 고승이나, 도인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음...” 

해가 끝까지 떠오르자, 포메라의 눈에 푸른 불이 켜졌다. 마나명상을 끝낸 모양이다. 

“가끔은 다른 장소에서 명상을 하는 것도 좋은 것 같소.” 

“그러냐?” 

“뭔가 다른 것에 눈을 뜨는 것 같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장소를 이동해야겠소.” 

“마음대로 해.” 

포메라의 등 뒤에 떠오르는 태양 때문인지 녀석의 어깨에 분홍 연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 난리가 났구려.” 

포메라가 언덕아래의 숲을 보며 말했다. 

“그렇지.” 

수풀과 나무로 우거졌던 아름다운 숲은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무기가 승천하기 전 허물을 벗기 위해 난리를 쳐놓은 듯 나무는 다 뽑히고 부러져 있었고, 바닥엔 지뢰가 터진 것처럼 수많은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숲을 저 지경으로 만든 글러트니의 부하들은 새벽이 되자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붉은 괴물은 대체 뭐였소?” 

“조만간 만나게 될 거야.” 

“흠, 그거 언데드로 만들 수 있소?” 

“응?” 

붉은 피부를 가진 녀석도 글러트니 이빨처럼 글러트니의 신체부위 중 하나인데, 언데드로 만든다니 솔직히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음...” 

솔직히 될 것 같기도 하고, 안 될 것 같기도 해서 뭐라 말해줄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네.” 

“주인도 모르는 게 있소?”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모르는 게 있지. 이상한 소린 그만하고 명상 다했으면 베뉴멜에 갈 마법진이나 그려. 이번엔 3명인 거 알지?” 

“알겠소.” 

포메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평평한 평지로 움직여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빽.” 

빽빽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마이라와 애리에게 갔다. 

“일단 이거 먹으면서 조금만 기다려. 추운데서 잤으니까 밥은 따뜻한 거 먹자.” 

둘에게 빽빽이 식량으로 가지고 다니는 과일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빽빽아.” 

빽빽이는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는 애리에게 날아가 과일을 같이 쪼아 먹었다. 

“저기 유렌님.” 

“응?” 

바위에 앉아서 사과를 먹으려 할 때 뒤에서 마이라가 나를 불렀다. 

“저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브래넌 아저씨가 얼굴에 철면피 깔고 유렌님에게 빌붙으라고 하시는데, 그럴 수는 없고...” 

그녀의 말에 피식 웃고, 먼 산을 쳐다보고 있는 브래넌을 쳐다보았다. 

“가족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물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제겐 애리밖에 없어요.” 

“음, 일단 네게 특별한 능력이 있고, 괴물들이 널 노리고 있다는 것은 알겠지?” 

“네. 그건 알겠어요.” 

“그럼 나와 같이 가자.” 

마이라는 고개를 들어 올려 떨리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유렌님은 우연히 이일에 끼어드셨잖아요. 이미 저희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 어제 괴물을 보니까 정말 위험해 보이던데...” 

마이라 입장에서 보면 나는 우연히 만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다. 그런 내가 일방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니, 그녀가 부담을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너도 일을 해봤으니 알겠지만, 세상엔 또라이가 정말 많아, 하지만 반대로 착한 사람도 있잖아.” 

“네.” 

“이번에 정말 착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저 때문에 유렌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요.” 

“괜찮다니까.” 

괜찮다고 말해도 마이라의 어두워진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네 능력이 예지라고 했잖아.” 

“네? 네. 브래넌 아저씨가 앞으로 제 능력이 점점 개방 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럼 네가 능력을 쓸 수 있게 돼서 내 위험을 미리 알려주면 되잖아. 좋은 일 있으면 그것도 미리 알려주고.” 

“아!” 

“간단하게 거래라고 생각하자. 내가 널 지켜주고, 넌 네 능력으로 날 도와주고. 어때?” 

“그럴 게요! 꼭 능력을 사용 할 수 있게 돼서 유렌님을 도와드릴게요.” 

마이라는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아이라 그런지 거래로 이야기하니 쉽게 받아들였다. 그냥 호의라고 얘기할 때보다 호감도도 더 많이 올라갔다. 

“그래. 부탁할게.” 

“네!” 

그녀의 표정과 호감도를 보니, 좋은 선택지를 고른 것 같다. 

“저 거지는 뭐 보이는 거 없대?” 

“네. 딱히 별말씀 없으세요. 무슨 제한이 걸렸다고 하시던 데요.” 

마이라는 내가 말한 거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듣고, 브래넌을 쳐다보았다. 

“그래...” 

마이라와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니, 포메라가 마법진을 완성하고 찾아왔다. 

“주인. 다 그렸소.” 

“그럼 베뉴멜로 가자.” 

** 

베뉴멜에 도착해서 아침식사를 마친 뒤 식당의 창문으로 밖을 보았다. 

“사람 무지 많네.” 

거칠어 보이는 용병들, 날카로운 기도를 가진 검사와 권사들, 부티나는 귀족들까지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어서 베뉴멜은 사람들로 꽉꽉 차있었다. 

“여긴 사람이 정말 많네요. 제국이라 그런가요?” 

“그럴 리가, 지금 여러 가지 일이 한 번에 터져서 그래.” 

“여러 가지 일이라면.” 

“베뉴멜의 영주가 영지 확장을 허가받았거든.” 

“영지 확장이요?” 

마이라가 깜짝 놀랐는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졌다. 

“영지 확장을 하려면 영지의 안전지역도 확장되어야하기 때문에 확장할 지역보다 깊숙이 들어가서 몬스터들을 처리해야 해. 그 작업을 위해서 영주가 용병들을 모으고 있지.” 

“아 그렇군요. 그래서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이 많은 거군요.” 

“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 

다음 이야기를 해주려고 할 때 우리 뒤쪽의 테이블에 있던 남자들이 입을 열었다. 

“자네. 무음의 제니스가 베뉴멜 영주에게 예고장을 보냈다는 소문 들었나?” 

“당연히 들었지. 제니스 같은 대도가 왜 여기에 나타났나 했더니, 영주의 보물을 노린 거였어.” 

“그 도둑이 예고하고 못 훔친 게 없다고 하던데, 아무리 영주라고 해도 털리는 거 아냐?” 

“모르지 뭐. 일단 제니스를 잡으려고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쉽진 않겠지. 어쨌든 영주도 피곤하긴 하겠어. 영지 확장도 준비해야 하고, 제니스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하니.” 

“크크. 우리하곤 상관없지만.” 

“그래. 우린 구경이나 하고, 소문이나 즐기면 그만이니.” 

무음의 제니스는 대륙을 좁다하고 움직이며 수많은 보물을 훔친 도둑이다. 소리 없이, 아무도 모르게 보물을 훔쳐낸다고 해서 무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용병들보다 위험한 기세를 가진 검사나 권사들은 제니스를 잡아 명성과 그의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든 것이다. 

“들었지?” 

“네. 제니스는 저도 들어봤어요.” 

“도둑 무음의 제니스가 이곳에 나타날 거라고 해서 사람들이 모인거야. 영지확장과 제니스. 두 가지 이유로 이곳 베뉴멜은 지금 굉장히 붐비고 있어. 그래서 네가 숨기 좋다는 거고.” 

“이런 상황을 이용할 생각을 하시다니, 유, 아니 베인스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마이라가 감탄했다는 표정을 하며 양손을 모아 잡았다. 

“별거 아니야.” 

“그럼 저희는 여기에서 계속 있는 건가요?” 

“이럴 때는 사람사이에 숨는 게 제일 좋아.” 

“사람 사이요?” 

“그래. 우린 영지 확장 작업에 참여 할 거야.” 

영지 확장 작업과 제니스는 따로 볼 것이 아니라, 연결 되어 있는 사건이다. 

난 영지 확장에 참여해 마이라도 숨기고, 그곳의 보상도 먹어치우는, 꿩먹고 알먹기 방식으로 움직일 생각이다. 

“애리 다 먹었어?” 

“네. 잘 먹었어요!” 

“그럼. 일어나자.” 

고개를 꾸벅이는 애리를 쓰다듬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를 잡고, 방에 포메라와 애리, 빽빽이를 놔두고, 마이라만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글러트니가 노리는 것은 마이라기 때문에 애리는 별일이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포메라와 빽빽이를 곁에 두었다.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영주의 성에 가서 시험을 받아야 하거든.” 

“시험이요?” 

“그래. 아무리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고 해도 어중이떠중이 모두를 데려가진 않으니까.” 

마이라에게 설명을 해주며, 영주의 성으로 향했다. 성 앞의 널찍한 공터에 용병과 시험관,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도 사람이 많네요.” 

“영지 확장 작업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니 안전하고, 시간은 많이 걸리니까 버는 돈이 적지 않아. 나름 괜찮은 일거리라 용병들이 몰리는 거지.” 

“역시 용병이시라 잘 아시는 군요.” 

“뭐, 그렇지.” 

마이라에겐 내 정체를 완전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아직도 내가 용병인 줄 알고 있었다. 

“용병이시면 패를 보여주시오.” 

내 차례가 되어 시험관에게 용병패를 내밀었다. 그는 용병패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름을 적고 고개를 끄덕였다. 

“B급이라도 워낙 가짜가 판치고 다녀서 시험을 봐야 할 것 같소.” 

“알겠소.” 

“B급 시험은 봉을 든 병사 3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오. 물론 병사들을 상처 없이 제압해야 하오.”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시험장소로 이동했다. 

“시작하시오.” 

내가 준비를 마치고 말을 하자, 봉을 든 병사들이 한 발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슈앙! 

병사들은 합격 술을 익혔는지 봉 두 개는 상체를 나머지 한 개는 하체를 동시에 찔러왔다. 

봉이 날아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몸을 회전시켜 찔러오는 봉을 옆으로 피해냈다. 

따다닥! 

병사들이 봉을 회수하려고 할 때 검을 뽑아서 봉의 중심을 한 번에 베어버렸다. 

“어...” 

“헉!” 

“우와!” 

순식간에 봉을 반토막 내버린 솜씨에 날 구경하고 있던 용병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이정도면 됐소?” 

병사들의 당황과 용병들의 놀라움이 담긴 시선을 즐기며 시험관을 쳐다보았다. 

“음, B용병다운 대단한 실력이오. 통과하셨소.” 

“고맙소.” 

원래라면 눈에 띄지 않으려고 대충 했겠지만, 지금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실력을 들어내었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B급 용병 이상의 실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3일 뒤에 작전 설명이 있을 테니, 꼭 참여 해주시오. 출발은 7일 후로 예정되어 있소.” 

“알겠소.” 

“혹시 많이 싸워본 몬스터가 있소?” 

“몬스터?” 

“그렇소. 일차 정찰을 다녀온 보고에 의하면 몬스터들의 종류가 꽤나 많았소. 많은 사람들이 참여를 하고 있으니, 싸워본 몬스터가 있는 쪽으로 용병들을 배치 할 생각이오.” 

“그렇군.” 

난 이 질문이 나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답도 준비해 두었다. 

“이전에 있던 곳에서 그린콜을 상대했었고, 그 전엔 슬라임을 많이 잡았었소.” 

“오! 그린콜과 슬라임은 서쪽에 몰려있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잘 됐구려. 당신은 서쪽으로 배정 될 거요.” 

시험관은 잘 됐다는 듯 내 이름 옆에 그린콜과 슬라임을 잘 알고 있다고 적어두었다. 난 무조건 서쪽으로 배정될 것 이다. 

“그럼 3일 후에 뵙겠소.” 

“알겠소. 가자.” 

“네.” 

“저기요!” 

확인증을 받고, 돌아가려 할 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자, 어디서나 볼만한 흔한 인상을 가진 갈색 머리 청년이 뛰어오고 있었다. 

“전 D급 용병 제프라고 합니다. 아까 본 실력이 너무 대단하셔서,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악수 한 번 할 수 있을 까요.” 

“그러시오.” 

씩 웃으며 제프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바로 머릿속으로 알림이 울렸다. 

띵! 

[락토르의 강철 성벽이 당신의 상태에 침범하려한 스태츠를 막아냅니다.] 

웃고 있던 제프의 눈이 아주 살짝 굳어져버렸다.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창조주의 눈을 사용했다. 

[이름: 제니스 2세] 

[특성: 대도(大盜), 조용한 움직임lv4, 기체술lv4, 백스의 천면만변, 필타인의 열쇠공, 스테츠, 독 저항lv2, 기나온의... ] 

[호감도: -23 (경계) ] 

[현재 기분: 정체가 뭔지 궁금함. ] 

제프라는 가명을 쓰는 남자는 특성이 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그의 이름과 특성을 보면 이 남자가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나를 불러 세울 때부터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제 손 좀 놓지?” 

“아, 죄, 죄송합니다.” 

제니스의 손을 놓으면서, 속으로 하나의 명령을 내렸다. 

[대상 설정 제니스 2세] 

[비비드 사냥개의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역시 유인하니까 알아서 찾아와주네. 

무음의 제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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