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만 춰도 강해져 (2)
다양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와 같이 싸워온 기사들의 동경, 로페르 공작의 걱정, 록스 후작의 기대, 리스번 자작의 질투와 질시.
그 모든 감정의 편린들은 등 뒤로 받아들이며, 일리아가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을 보며 춤에 집중하게 해주었다.
일리아는 기사답게 왈츠 자세와 순서는 완벽하게 외우고 있었지만, 리듬감이나, 부드러움이 많이 부족했다. 흡사 깡통로봇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긴장을 풀고, 흐름에 몸을 맡겨.”
일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은 뒤, 내 흐름에 따라오기 쉽도록 몸을 더 밀착시켰다. 살짝 당황했는지, 일리아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좀 더 느슨하게.”
“알겠어.”
리듬을 잃은 세스를 리드하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일리아를 도와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잘하고 있어. 조금 더 편하게.”
확실히 몸을 쓰는 기사라서 그런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주자, 일리아의 표정이 풀어지며, 그녀의 장점인 쭉 뻗은 팔과 다리가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표정들 봐라.”
일리아의 춤선이 살아나자, 그녀의 움직임을 보고, 비웃음을 짓던 사람들이 표정이 완전히 얼어버렸다.
우리 옆에서 춤을 추는 귀족들, 테이블에서 구경을 하는 귀족들 모두가 순식간에 달라져버린 우리의 춤에 얼이 빠져버렸다.
모두가 나와 일리아를 보며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도회장은 음악 소리 빼곤 우리가 스텝을 밟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훗.”
록스 후작이 엄지를 치켜세우고, 로페르 공작이 놀라면서도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에게 눈으로 인사를 해주고,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어때?”
“대체 언제 이정도로 춤을 배운 거야?”
조금은 여유가 생겼는지, 일리아가 춤을 추면서 입을 열었다.
“너랑 똑같아. 3일 전부터 급하게 배웠어.”
“나랑 똑같이 배웠는데 이렇게 잘 춘다고? 나를 가르친 사람도 유명한 춤 선생님이라고 했는데, 너 정도는 아니었어.”
“난 원래 빨리 배우거든.”
“하, 너 정말...
일리아는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아보였다.
“어때? 우릴 구경하던 사람들 표정 변하는 거 재밌지 않았어?”
“확 변하는 게 재밌긴 했지.”
그녀 역시 주변의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고 속이 시원했던 모양이다.
“아주 얼이 빠졌군.”
이곳의 있는 귀족들 중 반 정도는 앞에선 칭찬을 해도 뒤에선 우리를 까대느라 바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춤을 추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기대가 산산조각 났으니, 저렇게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아...”
짝짝짝!
음악이 끝나자, 일리아의 아쉬움이 담긴 한숨과 함께 회장을 울리는 우렁찬 박수소리가 들렸다.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 보내는 박수였다. 우리를 비웃으려 준비하던 자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썩 나쁘지 않네요.”
일리아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내 장난에 장단까지 맞춰주고 있었다.
“다행이네.”
일리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테이블까지 에스코트 해주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상한데.
자리에 앉자, 이상하게 몸이 근질근질한 느낌이다.
이건 천무지체가 나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부드러운 움직임을 행해서 자신을 변화시키라고.
“너 진짜 춤 이번에 배운 게 맞아?”
“왜 이렇게 못 믿어. 맞다니까. 내가 춤을 어디서 배웠겠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3일 만에...”
“저어...”
일리아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주황색 머리색을 가진 귀엽게 생긴 여성이 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네?”
“저, 전 레이블 자작가의 앨리사 레이블이라고 해요. 곧 다음 곡이 시작 되는데, 한 곡만 춰주실 수 있을까요? 유렌님과 춤을 춰보는 게 제 소원이에요.”
주황머리의 여성은 양손을 맞잡고 간절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아까도 내게 춤을 추자고 다가왔던 사람이다.
마침 잘 됐다. 지금 내 몸은 계속해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원하고 있었는데 알아서 와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갔다 와.”
일리아는 내게 춤을 신청한 앨리사를 쓱 쳐다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쿨하게 보내주었다.
자신 있다는 뜻인가.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갈 건데?”
“뭐? 너 이...”
일리아의 쿨한 표정이 바로 깨져버렸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피식 웃고, 앨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아! 네!”
앨리사를 데리고 무대 가운데로 나갔다. 그녀는 다른 영애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을 즐기는 듯 살짝 턱을 치켜올렸다.
“저, 전 춤을 잘 못 춰서요.”
“괜찮습니다. 제가 리드해드리겠습니다.”
겉으론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속으론 웃고 있었다.
앨리사는 춤 특성까지 있는 춤꾼인데도 불구하고,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띵.
현악기의 가벼운 튕김을 시작으로 처음 곡보다 조금 빠른 곡이 시작되었다. 앨리사가 어설프게 못 추는 척하는 것을 맞춰주며 곡이 끝날 때까지 그녀를 리드했다.
“아...”
음악이 끝나고, 춤이 멈추자 앨리사는 희열에 휩싸인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희열에 잠겨 있었다. 물론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확실해.
뭐가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춤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취할수록 천무지체의 경험치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어.
“유렌님. 저랑 이야기 좀 하시...”
“유렌님!”
앨리사가 말을 할 때 내 뒤에서 초록 머리색의 미녀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뒤에도 많은 귀족 여인들이 우르르 와있었다.
“네?”
“저, 저는 쿠레인 백작가의 아바라고 해요. 저와 한 곡 춰주실 수 있나요?”
“유렌님! 다음엔 저랑...”
“유렌님! 저도...”
**
춤을 추면서 천무지체의 경험치가 쌓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어제에 이어 축제 4일차인 오늘도 계속 춤을 추고 있었다.
무도회장에 온 대부분의 여성들과 춤을 추었고, 그들 모두는 내 춤 실력과 매너를 칭찬하느라 바빴다.
오죽하면 나와 춤추는 것을 기다리는 여성들이 많아서, 다른 남자들이 자신의 파트너를 찾지 못하는 일까지 있었다.
여러 가지로 좀 난처했는데, 이제야 그 끝이 다가왔다.
“드디어 왔군.”
방금 일리아와 춤을 마치자마자, 몸 전체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천무지체가 한 단계 나아갈 순간이 온 모양이다.
“왜 그래?”
내가 혼자 히죽 웃자, 옆에 앉아 있던 일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좀 피곤하네. 먼저 들어가 볼게.”
“흥, 그러시겠지. 어제부터 오늘까지 총 102번을 나가셨으니.”
“그걸 다 셌어? 너 계속 나만 봤나보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일리아는 더듬거리며 말을 하고 고개를 획 돌렸다. 그녀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지금을 놓치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중에 얘기하자!”
“야!”
몸 상태가 별로라고 하면서 모여든 여성들의 춤 신청을 모두 거절 하고, 빠르게 숙소로 움직였다.
**
“쳇.”
유렌이 홀로 돌아가 버리자, 일리아는 재미없어진 무도회장을 둘러보고, 자신의 방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음?”
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시작되는 것을 감지했다.
“이게 대체...”
일리아는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녀가 집중해서 수행을 할 때 보다 오러가 빠르게 쌓이고 있었고, 신체가 유연성 훈련을 한 것 이상으로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이유도 모르고 알 수도 없는 그 기이한 성장에 깜짝 놀란 일리아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 기현상은 1분간 계속 되었고, 일리아는 한 달은 수련해야 모을 수 있는 오러를 한순간에 얻어버렸다.
‘오늘 내가 한 건 유렌과 춤을 두 번 춘 것 밖에 없는데...’
자신의 오러를 점검하고 깜짝 놀란 일리아는 떨리는 시선으로 방금 유렌이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너는 대체...”
**
내 숙소로 돌아온 뒤 밖의 하인에게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다음 바닥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빽빽아.”
“빽?”
침대에서 뒹굴던 빽빽이를 부르자, 녀석은 일어나지도 않고 날개 한쪽만 들어올렸다.
“경계 부탁해.”
평소라면 내력수련을 하면서도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이번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빽!”
빽빽이는 자신을 믿으라는 듯 바로 침대의 기둥으로 올라가서 눈을 부라렸다.
매가 저런 모습을 보였다면 멋있었겠지만, 주먹만 한 오목눈이가 저러고 있으니,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울 뿐이다.
하지만 외모와는 별개로 빽빽이의 능력과 감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믿을 만한 녀석이다.
“고마워. 나중에 맛있는 거줄게.”
“빽.”
눈을 감고, 만독자전신기의 내력을 전신에 퍼뜨렸다. 소주천을 시작하자, 평소와 다르게 몇 개의 혈도들에서 뜨거운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치이익.
천추, 대거, 중완, 황유, 유문, 거궐, 유부, 견우혈까지 8개의 혈도가 만독자전신기의 내력을 흡수하면서 현묘한 열기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이거다.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현상이지만, 이것이 내게 해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계속해서 혈도에 내력을 흘려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내 내력을 먹고 열기를 발하는 혈도가 64개로 확 늘어났다.
뚜둑.
하마처럼 내력을 먹어치우던 왼쪽 어깨의 유부혈에서 뼈가 아주 조금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뚝.
뚜두둑.
유부혈을 시작으로 내력을 태우던 혈도가 있던 곳에서 뼈와 근육들이 아주 조금씩 자리를 이동했다.
드륵.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했지만, 고통은 전혀 없고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전신이 점점 시원하고, 편안해졌다.
제대로 가고 있어.
뼈와 근육이 스스로 바꿔가고 있었기 때문에 난 내력을 움직이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나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흐르고, 더 이상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아서 눈을 떴다.
[특성 천무지체가 소유자의 능력에 맞게 변화하였습니다.]
[근력이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민첩성이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유연성이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천무지체는 소유자의 무공이 완성될 때 까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역시 그렇군.”
천무지체는 단순히 단단하고, 무공을 펼치기에 적합한 신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천무지체의 소유자가 살아가며 수련하는 것에 따라 천무지체도 사람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암기를 던지고, 보법을 밟고, 독을 뿌리고, 주먹을 날리고, 춤을 췄던 그 모든 경험치가 모여서 내 육체를 새롭게 바꾸어놓았다.
이전보다 더 강하고,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성장 속도가 미쳐 날뛰네.”
**
5일차 축제까지 마친 후 가이린 영지로 돌아왔다.
국왕과 로페르 공작, 록스 후작까지 나를 잡으면서 좀 더 있다가 가라고 했고, 나와 춤을 춘 귀족 영애들이 자신의 집에 초대를 했지만, 영지를 너무 오래 비울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간신히 빠져나왔다.
영지로 돌아온 뒤 밀린 업무를 해결하고, 기라녹스를 찾아갔다.
“기라녹스.”
“영주님! 죄송합니다. 진즉에 찾아뵙어야했는데.”
얼굴 여기저기에 숯 검댕을 묻히고 있는 기라녹스가 공방에서 나왔다.
“괜찮아. 어제 왔는데 뭘 찾아봬. 장비 물량은 어느 정도 맞췄어?”
“질 높은 철을 다루다보니, 다른 대장장이들도 쇠 두드리는 맛이 나는지 일을 열심히 합니다. 병사들의 훈련이 끝나기 전에 그들의 장비들을 모두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장장이들 다루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수고했다.”
“아닙니다!”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기라녹스에게 단검를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뽑아봐.”
챵.
“어? 이, 이건...”
나루인의 척검을 본 기라녹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날을 세우지 않은 단검에서 어떻게 이런 기운이...”
설명하기조차 힘든 듯 기라녹스는 척검 이곳저곳을 계속 해서 살펴보며 충격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거 날 좀 세워줘.”
“제,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닌데요.”
“너니까 맡기는 거야.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빠르게 할 필요 없어.”
“네!”
기라녹스에게 나루인의 척검을 맡기고, 집무실로 돌아오니,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파이란과 페루가 서류를 내밀었다.
“또?”
“빠르게 발전 중인 영지다보니, 보고드릴 사항이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항이 많습니다. 아까 하신 건 이전 것들, 지금 하실 건 오늘 일입니다.”
파이란이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
“자작님. 그 서류 중에 정규 허가 도박장 건도 있습니다. 로디엔 용병님이 맨날 찾아와서 자작님을 내놓던가, 도박장을 열라고 하도 난리를 치셔서...”
페루가 난감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로디엔...”
그녀와도 조만간 같이 행동 할 사건이 생길 거다. 어느 정도 관계를 쌓아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도박장은 건설은 바로 진행해.”
정식 도박장 서류를 읽어보고, 사인을 했다.
“알겠습니다.”
“로디엔 용병. 잘 모셔.”
“정말 잘 모시고 있어요. 피곤할 정도로...”
페루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꽤나 많이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페루와 파이란이 준 서류를 모두 읽어보고, 사인을 한 뒤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급한 일은 끝냈으니, 다시 좀 나갔다 올게.”
“네?”
“예?”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파이란과 페루가 놀란 다람쥐처럼 뒤를 돌아봤다.
“또 나가십니까?”
“그래.”
“어디를 가시는지.”
“일단은 제국.”
“제국은 왜 가시나요?”
페루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애매하다.
‘내 소설의 주인공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려고.’라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그냥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친구... 좀 찾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