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마음을 정하다 (110/241)

마음을 정하다

“으윽!” 

나와 망토의 남자는 고통을 공유라도 하듯 각자의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으으...” 

뇌 안쪽을 바늘뭉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나름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 고통은 참기 힘들었다. 

“왜 그래? 괜찮아?”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있으니, 뒤에 있던 일리아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괘, 괜찮아.”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들어 좀 전에 본 남자를 찾아보았다. 골목의 벽에 기대고 있던 남자는 그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젠장!” 

“어? 어디 가는 거야!” 

“유렌 자작!” 

바로 말에서 내려서 남자가 있던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사람들이 내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랐지만, 지금은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우와아아아!” 

“유렌님!” 

“영광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악수라도 해주려고 내렸다고 생각했는지 환호를 보냈지만, 난 사람들 둘러보다가 남자를 찾지 못하고, 골목사이로 들어갔다. 

“그 놈 설마...” 

망토에 후드를 덮고, 마스크까지 써서 눈 빼고는 볼 수가 없는 남자였지만, 그에게서 뭔지 모를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어디 있지?” 

골목 깊숙이 들어가서 감시탑까지 켜며 그 남자의 기척을 찾으려고 했지만, 양아치 몇 놈만 보일 뿐 남자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자작님!” 

아린이 토끼처럼 동그란 눈을 한 채 뒤에서 나타났다. 막 달렸기 때문에 나도 내 위치를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녀가 날 어떻게 찾아왔는지 신기했다. 

“괜찮으신 건가요? 머리를 잡으시더니, 갑자기 뛰쳐나가셔서...” 

“괜찮아. 모두에게 미안한 일을 했네. 나 때문에 행사가 이상하게 되었겠어.” 

“아닙니다. 사람들은 계획 된 거라고 생각했는지 오히려 좋아하고 있습니다. 로페르 공작님이 그 분위기를 잘 이끄셔서 모두 환호를 받으며 계속 행진하고 있습니다.” 

“공작님께 또 도움을 받았군.” 

돌아가면 로페르 공작을 찾아가서 고맙단 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아린을 보다가 그녀가 이전에 싸웠다던 망토의 검사가 생각났다. 

“아린.” 

“네?” 

“키본 영지에서 내 명령을 듣고 따로 움직였을 때 만난 검사 기억하고 있어?”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린은 아직도 그에게 분노를 느끼는지 말투가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 남자 혹시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호, 혹시 눈동자의 색도 검은색이었어?” 

“그에게 나무 그림자가 져 있어서 눈동자까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설마! 그 남자가 나타났습니까?” 

아린이 당장이라도 싸우려는 듯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아, 그건 아니고...” 

“유렌님...” 

내 기운 없는 말에 아린이 자세를 풀고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아린은 내가 자작의 위를 받은 이후 계속 자작이라고만 불렀는데 그녀에게 오랜 만에 듣는 유렌이란 소리에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유렌님. 힘든 일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어떤 일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아린이 내 눈을 보며 차분히 전한 말에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서 가슴이 따뜻해진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자.” 

“안내하겠습니다.” 

앞장서서 걷는 아린의 등을 보면서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증거는 없다. 

그저 감일 뿐이지만 방금 본 남자가 왠지 내 원작 주인공인 라시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고통이 공명한 것이 가장 이상했다. 

거기다 그가 아린에게서 브리더를 구해간 세피로스의 검사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동시에 들었다. 

“내가 터치하지 않은 오비스의 스토리도 변했으니...” 

아우쿠솔의 미궁에서 내게 농락당한 오비스는 원작에서 투기장의 제왕이 된 후 주인공에게 패배해서 동료가 되는 녀석인데 지금 세피로스에 들어가 권패가 되지 않았는가. 

여러 사건이 터져서 주인공 역시 세피로스의 검귀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 망토남이 정말 라시드고 세피로스 검귀라면...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군.” 

가이린 영지로 돌아가면, 바로 준비를 해야 할 거 같다. 

** 

천천히 행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페르 공작과 왕자들은 아직 왕궁에 도착하지 않았다. 나와 아린은 빠르게 움직여서 일행의 맨 뒤에 합류했다. 

쿠우웅. 

로페르 공작이 왕궁의 앞에 도착하자, 지금까지 열린 것을 본적 없던 왕궁의 정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쿠구구. 

거인의 두 손을 모아 놓은 것 같은 문이 완전히 개방되자,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왕궁에서 거주하는 귀족들과 시종, 하인들까지 모두가 줄지어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미소를 짓고 있는 국왕과 왕비, 공주가 있었다. 

“음, 국왕 폐하의 앞이다. 모두 말에서 내려라!” 

“예!” 

로페르 공작도 국왕이 나와 있을 줄은 몰랐는지,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모두 말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말고삐를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로페르 공작이 먼저 국왕의 앞으로 향하고 그 뒤를 왕자와 기사들이 따랐다. 

쿵. 

로페르 공작이 국왕의 십 보 앞에서 걸음 멈춘 뒤 한쪽 무릎을 꿇자, 그의 뒤에 있는 왕자와 기사들도 모조리 무릎을 꿇었다. 나 역시 맨 뒤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로페르 엘리온! 국왕 폐하의 어명을 받들어, 키본 영지 탈환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로페르 공작. 정말, 정말 고생 많았소.” 

국왕이 천천히 걸어가 로페르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저는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기사들, 병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에 이뤄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로페르 공작이 뒤의 사람들을 뿌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하하! 맞소. 그런 영웅들을 이런 곳에서 무릎 꿇게 둘 수는 없지! 모두 일어나도록 하라!” 

“예!” 

“그대들이 최선을 다해주었기에 지금같이 훌륭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겠지. 모두 정말 고맙다!” 

“아닙니다!” 

국왕의 진심어린 목소리를 들은 기사들은 희열을 느꼈는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대 같은 용사들이 있는 한 크라시스는 영원 할 것이다!” 

“우와아아아! 크라시스여! 영원하라!” 

국왕의 우렁찬 목청에 동조하듯 기사들도 커다란 한성을 질렀다. 그는 뿌듯한 얼굴로 로페르와 두 왕자, 뒤의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음, 그런데...” 

기사들과 함께 소리를 지른 국왕이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앞에 자신의 아들들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유렌은 어디 있나?” 

“아, 그는...” 

로페르 공작이 미친개처럼 튀어나간 날 포장하느라 고생하지 않게, 옆으로 빠져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폐하.” 

“오! 유렌!” 

국왕이 지금까지 중 가장 밝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영웅이 왜 가장 뒤에 있는 건가!” 

“중간에 잠시 일이 생겼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있나. 그냥 물어본 것일 뿐이네.” 

국왕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왕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왕자보다 나를 더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불러서 미안하네. 자네가 나서기만 하면 병사들의 희생이 적고, 큰 활약을 해오니,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네.” 

“폐하의 신하로써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크하하하!” 

국왕은 내 대답에 더욱 만족한 듯 탄산같이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국왕의 관심을 혼자 받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질투 할 만도 한데 모두 같이 고생했고, 키본에서 내 활약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다른 기사들도 나와 국왕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곳에서 거짓 웃음을 짓는 사람은 내게 겁을 집어먹은 이왕자 뿐이었다. 

“자네가 암살자에게서 그웬의 목숨을 구해주고, 리자드맨 킹도 잡았다고 들었네. 아들의 목숨을 구해주어 고맙고, 기사와 병사들을 구해주어 정말 고맙네.” 

“방금 말씀드렸듯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폐하. 유렌 자작이 겸손해서 저렇게 간단한 일을 한 것처럼 말하지만, 말로 설명 드리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했습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제가 맡았던 서쪽 진형은 리자드맨 킹에게 전멸했을 겁니다.” 

“맞습니다!” 

일왕자가 나와 국왕의 곁으로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이 있던 기사들이 동의하듯 소리쳤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정말 믿음직한 사내야.” 

국왕이 일왕자와 기사들을 돌아보며, 흐뭇하고 웃었다. 

“그런데 너...” 

일왕자를 쳐다보던 국왕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조금 변한 것 같구나.” 

“저도 언제까지 철없이 지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가... 너를 그곳으로 보내길 정말 잘 한 것 같군.” 

국왕이 일왕자의 어깨를 툭 치고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수고 많았다. 모두가 쉴 수 있도록 조치를 해놨으니, 이틀간 휴식을 취하라, 휴식 이후 오 일간 축제가 있을 것이니, 필히 참여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이전에 왕궁에 들렸을 때에 비해 훨씬 좋은 방을 배정받았다. 족구를 해도 남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이래서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하는 것 같다. 

나도 꽤나 피곤했던 모양인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기절해서 하루 동안 푹 자고 일어났다. 

“빽.” 

태양빛이 스며들어오는 아침 빽빽이가 일어나라는 듯 내 얼굴을 쪼아댔다. 

“알겠어. 알겠어.” 

심법만 해도 육체적 피로는 풀리지만, 정신적 피로는 풀리지 않는다. 푹 자고 나니 몸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가벼운 느낌이다. 

“빽.” 

날 깨운 빽빽이는 테이블 위에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과일 접시로 돌아가서 과일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저럴 거면 날 왜 깨운 거야.” 

“빽?” 

어이없어 할 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본 적 없는 걸음걸이다. 

똑똑. 

세숫물을 가져온 하인이라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 있는 건 하인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깔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이른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유렌 자작님. 전 카이리오 테일이라고 합니다.” 

노크를 한 사람은 국왕의 제 3 보좌관 카이리오 테일 자작이었다. 날 데리러 록스 저택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갔던 사람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렌 록스라고 합니다. 전에 저희 집에 오셨는데 헛걸음 하게 해드려서 죄송했습니다.” 

“하하! 유렌 자작님이 알고 그러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도 이오칼의 외교관 때문에 급하게 찾아간 거였으니까요.” 

카이리오가 저택에 와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가지 않은 거지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왜 오신 거죠?” 

“폐하께서 유렌 자작님을 호출하셨습니다. 별일이 없으시다면 아침식사를 마치신 뒤 알현실로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누구 말이라고 거절하겠는가. 바로 대답했다. 

“그럼 식사 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옷은 저희가 준비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다. 아마 아들을 구해주고, 리자드맨 킹을 잡은 보상을 주려는 것일 거다. 

세면을 하고, 식사를 한 뒤 하인이 가져온 예복으로 갈아입고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똑똑. 

아침과 같은 걸음걸이. 카이리오 자작이다. 

“준비되셨습니까?” 

“네. 가시죠.” 

그의 안내로 국왕의 알현실로 향했다. 

“바로 들어가시죠.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감사합니다.” 

“네. 그럼.” 

카이리오 자작이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벌써 세 번째 보는 알현실의 개문이지만, 볼 때 마다 새로운 느낌이다. 

평소와 달리 알현실에는 왕좌에 앉아 있는 국왕 한 명 밖에 없었다. 

“유렌! 어서 오게!”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아침부터 소화 안 되게 왜 그러고 있나.” 

국왕이 빨리 일어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일어나서 가만히 서있자, 국왕이 왕좌에서 내려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어제도 말했지만, 자네에게 정말 고맙네. 한 나라의 국왕으로써도 고맙지만, 두 아들의 아버지로써도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네.”

국왕은 왕자들을 거칠게 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론 굉장히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 원작에선 일왕자의 죽음이후 슬픔에 잠겨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니까. 

“자네가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국왕은 나를 스쳐지나가서 알현실의 문을 왕실보고의 문으로 바꾸었다. 

쩌엉! 

“자네가 워낙 털어가서 그동안 보충도 좀 했다네. 후후.” 

빛나는 왕실보고의 문 앞에서 국왕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골라보게나.” 

“정말 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러시지 않아도...” 

마음에도 없는 겸손을 한 번 떨었다. 

“아니야, 이런 것이라도 줘야 내 마음이 편하네. 안에 가서 보물 두 개를 고르게나.” 

“두 개라니...” 

“그래. 두 개 일세.” 

아무리 내가 많은 것을 했다고 해도 한 번에 두 개를 고르라고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내 아들과 내 백성들을 구해주었는데, 감사는 내가 해야지. 보답해 줄게 이런 것뿐이라 내가 아쉽다네.” 

가져갈 거야 많지만, 새로운 것이 늘었다는 소리에 눈을 켜고 보고 안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도 보였다. 마도서 역시 추가 된 것 같았고. 

“음?” 

화려한 보물들 사이, 골프공만한 녹색구슬에 시선이 갔다. 녹색 구슬의 이름을 읽고,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 말이 이 뜻이었나...” 

예상 외로 국왕이 보물 두 개를 고르라고 한 이유, 목소리가 이미 줬다고 말한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 

[소혼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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