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굴 (3)
“그럼 다음으로.”
호보거미들이 있던 방을 넘어 다음 구멍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미끄럼틀이상의 급경사가 시작되었다.
드드드득.
경사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평평한 바닥에 도착했다. 바닥이 물렁물렁 거리는 것이 흡사 스펀지나 고무를 밟고 있는 느낌이었다.
“깜깜하네.”
좀 전에 지나갔던 굴들은 천장이나 벽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지만, 이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것은 피로 그린 것 같은 붉은 모래시계들이 공중에 둥둥 떠있는 모습이다.
물론 저것들은 모래시계도 아니고, 공중에 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검은과부거미.”
독거미 중에서도 매우 유명한 이름이다.
몸통과 여덟 개의 다리까지 모든 것이 어둠을 바른 것처럼 새까맣지만, 놈들의 몸통 가운데엔 붉은 색의 모래시계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 깜깜한 굴은 거대해진 검은과부거미들의 영역이었다.
스으윽.
굴은 어두웠지만, 내 감각에 검은과부거미의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지고 있었다. 놈들은 살금살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미줄은 없군.”
검은과부거미는 방랑형 거미라 거미집을 짓지 않고, 좀 전에 본 호보거미나 유령거미 보다 작은 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약해 보일 수 있지만,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는 몬스터다.
“독이 더럽게 강하니까.”
검은과부거미의 독성은 방울뱀의 15배가 넘는데, 이런 판타지세상에서 크기까지 커진 거미들의 독성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봐야. 내게 통하지 않겠지만.”
다가오는 검은과부거미들의 위치를 파악하며 아그네스를 두 개의 백광환으로 변화시켰다.
파아앙!
공기를 강타하는 일섬뢰의 소리에 내게 접근하던 검은과부거미들이 움찔 거렸다.
퍼어억!
검은과부거미들이 움직임을 멈추는 사이 백광환의 백빛은 이미 놈들의 등에 있는 붉은 모래시계를 부숴버렸다.
“키에에엑!”
“카아악!”
급소를 파괴당한 검은 과부거미들이 굴을 찢을 것 같은 울음을 터트리며 주둥이에서 독을 내뿜었다.
치이이익!
피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려서 놈들의 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독(검은과부거미)에 중독 되셨습니다.]
[특성 백독불침(百毒不侵)이 독(검은과부거미)의 고통과 증상을 제거합니다.]
[만독자전신기(萬毒磁電神氣)가 독(검은과부거미)을 흡수합니다.]
[만독자전신기의 성취도가 올랐습니다.]
[무주살(無主殺)이 개방됩니다.]
“키아악!”
퍼퍼퍼퍽!
죽어가는 동족들을 밟고 내게 달려오는 거미들에게도 백광환을 날려 급소인 빨간 모래시계를 파괴해 버렸다.
거미들이 멀리서 독을 날려 왔지만, 한 번 면역이 생긴 독을 뿌리는 건 영약을 던져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모두 흡수해 주었다.
주우욱.
검은과부거미 여덟 마리를 모두 죽이고, 바닥에 널려있는 독에 손을 대었다.
[흡독지력이 대지에서 독(검은과부거미)을 흡수합니다.]
[흡독지력이 만독자전신기의 운용을 돕습니다.]
[흡독지력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만독자전신기의 성취도가 올랐습니다.]
[무주살(無主殺)의 성취도가 올랐습니다.]
독이 강하기 때문인지, 내력이 쭉쭉 차올랐다.
“이제 굴은 2개 남았나?”
독을 모두 흡수한 뒤 끝에 있는 구멍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아래로 쭉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밑에 하얀색 그물 같은 것이 있어서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팅.
하얀색 그물 같은 것은 대형 거미줄이었다. 다행히 끈적거리거나 달라붙지 않고 고무줄 같은 느낌이었다. 거미줄에서 일어나서 빛이 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여기구나.”
평범하게 보면 이번 굴은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이 안전해 보인다. 벽과 바닥이 알록달록하다는 것 빼고는 별 특이한 점이 없지만, 자세히 보면 이곳의 비밀을 알 수 있다.
“내가 평생 볼 거미보다 훨씬 많은 숫자야.”
벽과 바닥은 우리가 현실에서 볼법한 작은 거미들로 꽉 차있었다. 거미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만으로 바닥이 꿈틀대는 것 같았고, 벽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가 이 거미굴의 최악의 관문이지.”
이곳이 이 거미굴의 지옥문이다.
모든 거미에겐 독이 있고, 굴은 한 번에 넘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넓은데다가, 거미가 너무 많아서 죽이기도 힘들다.
이놈들을 죽이기 위해 너무 큰 마법이나 공격을 사용하면 굴 자체가 무너질 위험도 있다.
“하지만 내겐 꿀통이지!”
빠지지직!
뇌인신법에 만독자전신기를 최대치로 운용한 뒤 거미들이 모여 있는 중심을 향해 뛰어 올랐다.
찌지지직!
내 발 아래에서 공기를 튀겨버릴 것 같은 뇌기가 휘몰아쳤다. 넘치는 뇌기 그대로 땅을 내려 밟았다.
빠지지직!
내가 바닥을 내려찍음과 동시에 내 용천혈에 모여 있던 뇌기가 거미줄처럼 굴 전체로 퍼져나가 벽과 바닥에 있는 대부분의 거미들을 지져버렸다.
바닥을 찍어, 뇌기와 충격파를 퍼트리는 뇌인신법의 뇌폭이다.
충격파의 위력은 최대로 줄이고, 뇌기는 강화했기 때문에 생명체에겐 큰 영향을 주었지만, 굴에는 바닥에 그어진 실선 빼곤 아무런 충격도 주지 않았다.
“알아서 모여드네.”
바닥에 난 틈새로 죽은 독거미들의 독들이 줄줄 흘러넘쳤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흡독지력을 사용해서 바닥을 적시는 모든 독을 흡수했다.
“독하네. 그래서 좋은 거지만.”
독의 양도 양이지만 독이 너무 독해서 예상이상으로 내력이 술술 차오른다.
“그럼 마지막 방으로.”
독을 흡수한 뒤 끝에 있는 마지막 방의 통로로 향했다. 통로는 바위로 쌓아올린 계단 같은 모습이었는데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져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탁.
바위를 뛰어 넘으며 통로를 내려가다가 적당한 높이라고 생각될 때 아래로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 했다. 100m정도 앞에 빛이 나오고 있는 구멍이 보여서 바로 달려갔다.
“도착이군.”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구멍 밖에서 안을 살펴보았다.
방은 학교 운동장 크기정도로 넓어보였고, 바닥, 벽, 천장까지 방의 모든 곳은 회색 거미줄로 둘러싸여 있었다.
방의 정중앙에 인간을 통째로 씹어 먹을 것 같은 대형 거미가 있었는데, 거미는 곤충의 징그러운 얼굴이 아니라, 차갑게 생긴 미녀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저 거미가 거미굴의 최종 보스 인면지주(人面蜘蛛)다. 하지만 인면지주의 눈은 약을 한 것처럼 멍하니 풀려있었다.
그 이유는 인면지주의 머리에 손을 데고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나무뿌리로 만든 것 같은 지팡이를 들고 있는 남자, 브리더의 제자인 기에스가 인면지주를 세뇌시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2.5m는 되어 보이는 신장, 회백색으로 빛나고 있는 두툼한 털과 손가락보다 2배는 길 것 같은 발톱과 이빨을 가진 늑대인간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바닥에 여러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이미 전투를 한 차례 하고, 인면지주에게 세뇌를 하는 모양이다.
“역시 한 놈은 라이칸 스로프였군.”
“크륵?”
늑대 인간은 내 냄새를 맡았는지, 내가 있는 입구를 노려보았다.
“인간?”
늑대 주둥이에서 인간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창조주의 눈을 발동시켰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이름: 다리안]
[특성: 반인반수, 괴력lv3, 재빠른 몸놀림lv3, 쾌조lv3, 본능화. ]
[호감도: -78(극도의 비호감)]
[현재 기분: 죽인다.]
이놈이었군.
이놈은 세피로스 삼공 크리티스의 하수인 중 한 명인 다리안이다.
“크르르.”
“으음...”
다리안이 짐승 울음소리를 내며 내게 달려들려고 할 때 기에스가 신음소리를 냈다.
“다리안.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한 때다. 절대 방해 받지 않게 해라.”
“알겠다.”
“지금부터 중요하다면 방해해줘야겠네.”
“인간!”
기에스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앞으로 뛰어나갔다.
슈아아앙!
챠챠챵!
놈들에게 달려 나가며 기에스를 향해 열 개의 비도를 날렸다. 급박해진 다리안이 손톱으로 비도를 쳐냈지만, 4개의 비도가 그의 방어를 뚫고, 기에스에게 박혀버렸다.
“크악!”
기에스의 집중이 풀어진 순간, 멍해져있던 인명지주의 눈에 선명하고 잔혹한 빛이 돌아왔다.
“헉!”
비수와 독에 고통스러워하던 기에스는 인면지주에게 건 세뇌가 풀린 것을 깨닫고 다시 세뇌를 하려 했지만, 정신을 먼저 차린 건 인면지주였다.
파사삭!
인면지주는 순식간에 기에스의 머리통을 통째로 씹어 먹어버렸다. 기에스의 두개골이 고무공처럼 터져나갔다.
“키에엑!”
기에스를 뜯어먹은 인면지주는 나와 다리안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다리안 쪽으로 몸통을 움직였다. 자신을 건드린 놈을 먼저 처리하려는 것 같았다.
촤아악!
인명지주가 다리안을 향해 독을 내뿜었다. 인면지주의 독은 대포처럼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다리안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움직이며 인면지주의 독을 회피했다.
슈우웅!
놈이 피한 곳으로 비수를 날렸는데 다리안은 몸을 구르며 내 비수를 피해냈다.
“이야 잘 구르네.”
그 모습을 보며 다리안을 비웃었다.
“그 가벼운 주둥아리를 뜯어내주마!”
“키에에엑!”
다리안이 내게 달려들려고 할 때 인면지주가 노란색 독을 내뿜으며 놈에게 달려들었다.
“거미가 날 보호 해주겠다는데?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봐.”
“크르르!”
슈아앙.
빠각!
다리안은 독을 피한 뒤 좀 전보다 두 배는 빠르게 움직여서 인면지주의 한쪽 다리를 손톱으로 뜯어냈다. 속도와 힘의 훌륭한 조화였다.
“키에에엑!”
다리가 뜯긴 인면지주가 비명을 지르며 다리안에게 독을 흩뿌렸지만, 놈의 속도가 너무 빨라 아무 곳도 맞추지 못했다.
“키에엑!”
다리안은 독을 맞고도 다시 돌진해서 가위손 같은 손톱으로 인면지주의 다리 3개를 갈라버렸다. 다리 4개가 뜯겨진 인면지주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제 네 차례다.”
다리안은 인면지주를 살려서 이용할 생각인지, 겁에 질려 뒤로 빠지는 인면지주를 놔두고 나를 쳐다보았다.
“브리더의 제자가 죽었으니, 이번엔 브리더를 데려와서 저 거미를 다루려고?”
“뭐?”
이를 갈며 다가오던 다리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번에 터질 몬스터 대란에 저런 놈들 얼마나 있지?”
“네, 네놈. 그걸 어떻게...”
“말해봐. 리자드맨 킹 말고 얼마나 있는지. 궁금한데.”
“네놈 그냥 죽일 수는 없겠군.”
“같은 생각이네. 나도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
“입은 취소 하마, 다리부터 잘라주지.”
다리안이 빛 같은 속도로 내게 돌진하며 손톱을 휘둘렀다. 확실히 빠른 속도와 힘이지만 놈에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직선뿐이라는 것.”
세 걸음을 걸어 놈이 돌진하는 방향에서 벗어났다. 놈은 내 움직임을 보고 고개를 돌렸지만, 방향을 바꾸지는 못했다.
“크윽!”
놈이 스쳐지나갈 때 뒤에서 독을 바른 비수를 날려 놈의 급소에 박아 넣었다. 놈이 다시 달려들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다.
퍽!
이번 비수는 놈의 연천혈에 박아 넣었다. 두 급소로 독이 퍼지기 시작하자 다리안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 이놈! 컥!”
세 번째 비수가 놈의 등 중앙에 박히자, 다리안의 다리가 멈추고 무릎을 꿇었다.
“너, 너는 어떻게...크어어억!”
마비독과 검은과부거미 독에 중독 된 다리안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닥치고 이거나 처먹어.”
“흐읍!”
놈의 늑대 입을 벌려서 자백제를 넣었다.
“으, 으...”
“네놈들이 세뇌한 특수 몬스터는 몇 마리지?”
“네, 네 마리다. 저, 저놈이 없으니, 세 마리...헉!”
“세 마리? 어떤 몬스터들이지?”
“나, 난 모른다. 이번이 처음 받은 명령이었다.”
아쉬운 일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에스를 살릴 걸 그랬다.
“언제 몬스터를 푼다고 들은 건 없나?”
“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들었다.”
“뭐?”
“이미 리자드맨쪽 세력이 완성 되서 풀어놓았다고, 저 거미는 중간에 혼란을 일으킬 목적으로...데려오라고 해, 했다. 아마 바로 전쟁을 시작...사수와 브리더가 이번 일을 진행한다고...”
다리안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더니, 숨이 끊어져버렸다. 검은과부거미의 독이 생각이상으로 강력한 거 같았다.
“뭐, 알건 다 알았으니까.”
정보를 얻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무언가가 내게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촤아악!
인면지주의 옥색 독이 내 전신을 덮었다.
“키에엑!”
내가 독을 맞았으니, 최종 승리자는 자신이라는 듯 인면지주의 무표정한 얼굴이 웃는 표정으로 바뀌며,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
[독(인면지주)에 중독 되셨습니다.]
[특성 백독불침(百毒不侵)이 독(인면지주)의 고통과 증상을 제거합니다.]
[만독자전신기(萬毒磁電神氣)가 독(인면지주)을 흡수합니다.]
[만독자전신기의 성취도가 올랐습니다.]
[사린주왕(死璘蛛王)이 개방됩니다.]
“후후.”
독을 뒤집어쓴 채로 인면지주를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내 얼굴에 인면지주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이제 동맹 끝이지? 뒤질 준비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