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는 깔끔하게
“언제부터 아신 거죠?”
로디엔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시원시원한 여장부의 목소리에 진중함과 조심스러움이 담겼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처음부터입니다. 도박장에 그녀석도 있었거든요.”
그녀가 안고 있는 빽빽이를 가리켰다.
“그렇군요. 그래서 제가 있던 곳으로 오신 거군요.”
“빽.”
로디엔이 안고 있던 빽빽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그때 빽빽이는 내 주머니 속에서 쿨쿨 자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몰랐지만, 뭐 상관있겠는가.
“이런 곳에서 정령수를 보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거기다 벨로아라니, 엘루나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아이인데.”
“저도 이런 곳에서 엘프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후후, 그러네요. 서로 알았을 리가 없죠.”
로디엔이 재밌다는 듯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내 앞에 있는 미녀의 진정한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풍요의 종족인 엘프였다. 그것도 꽤나 특별한 힘을 가진.
“후우...”
로디엔이 끼고 목에 끼고 있던 목걸이와 반지를 벗자,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녹색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빛은 화려하지도 번쩍이지도 않았지만, 숲에서 삼림욕을 하는 것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음!”
일리아, 아린, 이레아까지 최근 많은 미녀들을 만나서 웬만한 미녀엔 내성이 생겼는데도 로디엔의 진정한 모습을 보자,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영화 속에 나오는 엘프처럼 그녀의 귀가 길어졌고, 어깨에 걸쳐있던 녹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으며, 피부는 핏줄이 보일 정도로 투명해졌다.
“처음이네요. 인간에게 제 본 모습을 보인 것이.”
“빽!”
로디엔에게 풍기는 정령의 냄새가 수십 배로 늘어났기 때문인지 빽빽이는 아주 그녀의 품속으로 들어가려고 버둥버둥 거렸다.
“후후.”
슈르륵.
로디엔이 상큼하게 웃으면서 손에서 물방울을 조형해서 만든 것 같은 푸른빛의 새 한 마리를 불러왔다. 물의 하급 정령으로 알려진 닉스였다.
“이 아이랑 놀아주렴.”
“빽.”
로디엔이 닉스를 손에서 날리자, 빽빽이가 닉스를 따라 날아올랐다. 두 귀여운 새는 대화라도 하는 듯 공중에 떠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목걸이는 제 모습을, 이 반지는 제 정령력을 숨겨주는 물건이에요.”
“그렇군요. 대단한 보물이네요.”
“그렇죠.”
어떤 종족도 인간의 외형으로 변화시켜주는 목걸이와 정령력이나 마력을 숨겨주는 반지, 두 아이템 모두 당연히 알고 있다.
“일단 제 소개를 드려야겠네요. 전 엘루나에 속해있는 설수목 부족의 세 번째 잎 로디엔 세라피아라고 해요.”
“록스 후작가의 유렌 록스라고 합니다. 이 영지에 새로 부임한 영주입니다.”
“네. 아까 들었어요. 부임 정말 축하드려요. 당신 같은 영주가 생겼으니, 이곳도 많이 변하겠네요.”
“감사합니다.”
로디엔은 축하한다고 할 땐 밝은 얼굴이었지만,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시죠?”
“인간에게 정체를 들키면 바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즐거운 여행이었고, 정말 재밌게 보낸 시간이지만, 조금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좀 더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로디엔이 빽빽이와 닉스를 보면서 아쉬움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안 들킨 걸로 하면 되겠네요.”
“네? 그게 무슨...”
“당신이 엘프라는 사실은 저를 빼곤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저만 입 다물면 괜찮은 거 아닙니까?”
“그, 그게...”
로디엔이 고민이 된 다는 듯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단순히 생각을 하는 것일 뿐인데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전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아직 인간 세계를 즐기시고 싶다면 내일 엉덩이를 얻어맞고, 가진 돈을 모두 뺏긴 뒤에 풀려나면 됩니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엘프임을 밝히시고 엘루나로 돌아가셔야겠죠.”
“그렇겠네요. 제가 이대로 사라진다면 자작님이 곤란해지실테니까요.”
“그건 딱히 상관없습니다.”
“엘루나. 얼마 떠나있지도 않았는데, 조금 그립긴 하네요.”
엘루나는 대륙에 흩어져 있던 엘프들이 인간과 몬스터들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부 대산림에 세운 엘프들만의 국가다.
개인적인 생활을 존중하는 엘프들이 서로 모여서 자신들의 능력을 개발하고 후대에 전하기 시작하며 엘루나의 힘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엘루나의 모든 엘프는 기본적으로 정령사의 능력을 가진 대다가 궁술이나 검술 중 하나를 선택해서 배운다. 국가의 모든 인원이 기사 이상의 전투가 가능하니, 약할래야 약할 수가 없다.
“후후...”
로디엔이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가볍게 쿡쿡하고 웃었다.
“왜 그러시죠?”
“아뇨.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정말 비밀을 지켜주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그럼...”
로디엔이 반지와 목걸이를 다시 껴서 인간의 외형으로 돌아왔다.
“빽!”
“나중에 또 불러줄게.”
같이 놀던 닉스가 사라지자, 빽빽이가 다시 로디엔에게 달려들었다.
“정했어요. 유렌님. 당신을 믿고 인간세계에서 조금 더 지내보고 싶어요. 그리고... 좀 더 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로디엔이 날 지그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법 주머니를 주시고, 여자 도박꾼들이 있는 방에 합류하시죠. 주머니는 내일 돈을 모두 가져간 뒤 돌려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잘생긴 영주님.”
로디엔의 목소리와 말투가 처음 봤을 때로 돌아갔다.
“그런데 인간의 모습일 때와 엘프의 모습일 때 두 성격 중 어떤 모습이 진짜인가요?”
“사실 인간의 모습이 제 진짜 모습이긴 해요. 엘루나에 있을 때도 사고뭉치였거든요. 침착하게 보인 건 저 때문에 엘프의 이미지가 손상 될까봐 그런 거예요. 주머니 여기 있어요.”
로디엔이 자신의 마법 주머니를 시원하게 넘겨주었다.
“그렇군요. 마음에 드는 성격입니다.”
“정말요? 매력 없지 않아요?”
“아뇨. 매력이 넘칩니다. 일단 나가시죠. 안내해 줄 사람을 붙여드리겠습니다.”
주머니를 받은 뒤에 로디엔을 아린에게 넘겨 여자 도박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보낸 뒤에 영주 집무실로 들어갔다.
“쉽네.”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마법 주머니 안에서 두툼한 책을 꺼냈다.
“조금 더 친해지면 그냥 달라고 해도 줄 것 같기는 하지만...”
방을 나가기 전에 로디엔의 호감도가 상당히 올라가있었다. 그냥 보여 달라고 해도 보여줬을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히로스 왕국 기본 검술서. 저자 카볼 맞군.”
책 표지엔 카볼의 웅장한 서체로 히로스 왕국 기본 검술서라 적혀 있었다.
“어디 보자.”
흔적이 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보았다. 역시 첫 장엔 카볼 특유의 세밀한 그림과 자세한 설명이 적혀져 있었다.
[창조주의 눈에 예속된 천안이 히로스 왕국 기본 검술 1장 베이포스를 각인합니다.]
[특성 천무지체로 인하여 베이포스를 즉시 재현하실 수 있습니다.]
“좋아.”
메시지가 뜨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정품이었다. 밖에 대기하는 하인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한 뒤에 책상에 앉아서 책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히로스 왕국 기본 검술을 모두 체득하셨습니다.]
[히로스 왕국 기본 검술이 특성 검인에 예속 됩니다.]
[잊혀진 제왕의 검 5/18]
[특성 검인의 경험치가 15% 상승합니다.]
[검인에 기본 검술 5개가 모인 효과로 모든 신체능력이 2% 상승합니다.]
모든 내용을 읽고, 책을 덮자마자, 메시지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2%라니! 대박!”
검술서는 검에 대한 능력만 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신체 능력을 상승 시켜주고 있었다. 거기다 매번 0.5% 그 비율이 올라간다.
“2%쯤 되니, 확실히 차이가 있어.”
6성이 되어 자신과 세계의 흐름을 더 잘 파악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지, 2%의 차이가 크기 때문인지 신체의 변화가 더 확실히 느껴졌다.
이정도로 변했다면, 변화한 신체능력에 적응하기 위해서 한 번 몸을 풀어줘야 할 것 같아서 빽빽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여긴 안 되겠네.”
연무장에 가려고 했는데 그곳엔 이미 선객들이 있었다.
빠악!
“크아악!”
“빠악!”
“아혹!”
도박꾼들이 연무장에서 태형을 받고 있는 소리였다. 잠시 그곳을 지켜보다가 성 밖으로 나가서 빈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좋아. 감을 익혀보자고.”
**
저벅.
다음날 집무실에서 그간의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을 때 밖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헉!”
파이란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한 채로 조심스레 문을 열고 집무실에 들어왔다.
“대, 대단하시네요. 아직 노크도 하지 않았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려서요.”
“그렇군요. 기사 분들의 감 같은 건가보네요.”
“뭐, 그런 거죠. 그런데 이 보고서들...”
“죄송합니다! 뭔가 잘못 된 게 있다면, 지금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정말 보기 편하네요. 보고를 올릴 대상이 없는 대도 깔끔하게 정리를 잘 하셨어요. 고생하셨어요.”
그에게 그냥 해주는 말이 아니라, 보고서들은 숫자는 숫자, 문자는 문자대로 정리를 잘 해놓아서 그냥 보거나 읽기 뿐 아니라, 분석하기도 편하게 되어 있었다.
“흡...”
내 말에 파이란이 감동을 받았는지,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그는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나 못하는 일인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봐서... 죄, 죄송합니다. 주책 맞게...”
파이란은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의 모습을 보니, 지금까지 정말 고생 많이 했던 것 같다.
“주책이라뇨. 아니에요.”
그에게 손수건을 주고,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죄송합니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그래요. 어제 부탁드린 조사는 끝났나요?”
“그렇습니다.”
파이란이 내게 서류를 몇 장 가져다주었다. 그 서류엔 도박장 비리 관계자라고 적혀져 있었다.
“어렵진 않았나요?”
“네. 크라이드 기사와 같이 가니, 도박장주들이 단 번에 도박장과 관계가 있는 위병과 하인들을 알려주었습니다.”
“잘 됐네요.”
어제 파이란에게 도박장의 주인이나 관리자들과 관계를 맺었던 위병과 하인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리며 크라이드를 붙여주었는데 쉽게 해결한 모양이다.
사락.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서류에 도박장에 관여한 인물들의 이름들이 적혀 있고, 그 인물들의 평소 행실까지 적혀져 있었다. 역시 마음에 드는 일처리다.
“그럼. 가죠.”
“네?”
“쓰레기는 빠르게 처리해야 냄새가 안 퍼지거든요.”
“아...”
청소는 할 때해야 한다. 괜히 시간을 끌어봐야 더 귀찮아질 뿐이다.
“아린.”
“네.”
“여기 적혀있는 놈들 다 데리고 연무장으로 와.”
“알겠습니다.”
아린에게 파이란에게 받은 서류의 2번째 장을 넘겨주었다. 도박장과 관계있는 하인들의 이름이 적힌 서류였다.
“그럼 우리도 가죠.”
“아, 알겠습니다.”
파이란을 데리고 위병들이 모여 있는 생활관으로 향했다.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계속 태형을 진행했기에 위병들도 지쳐있었는지 생활관은 조용했다.
텅.
“어, 어! 자, 자작님!”
근무를 나가려는지 장비를 챙기고 있던 위병이 나를 보고 기겁을 했다.
“지금 근무 중인 위병을 제외한 모두를 데리고 나오도록.”
“알겠습니다!”
위병은 입던 갑옷을 던져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1분도 되지 않아 생활관에 있던 위병들이 모조리 밖으로 나왔다.
“현재 근무와 순찰로 빠진 병사를 제외한 모든 인원입니다!”
위병들의 대표인지 틈 하나 없을 것 같은 중년인이 앞으로 나와서 경례를 하며 대답했다. 본 기억이 났다. 어제 연무장에서 위병들에게 태형을 지시하던 사람이었다.
“임시 치안관 캐스윈은 어디 있지?”
캐스윈과는 어제 안면을 익혔다. 자신이 태형을 책임질 테니 맡겨 달라 해놓고, 정작 태형을 진행하던 연무장에선 보지도 못했었다.
“전 판톤이라고 합니다. 캐스윈 치안관이 아직 나오지 않아, 제가 대표로 말씀드렸습니다.”
“캐스윈 치안관은 어제 태형을 진행하느라, 늦게 돌아가서...”
판톤 뒤에 있던 젊고 얍실하게 생긴 위병이 입을 열었다.
“네게 묻지 않았는데?”
“아, 그, 죄, 죄송합니다!”
젊은 위병이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판톤. 캐스윈의 지각은 잦은 편인가?”
“지각을 하는 날이 하지 않는 날보다 많습니다.”
판톤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대로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파이란이 적어준 서류에도 캐스윈의 상습적인 지각에 대해 적혀있었다.
“네 이름은 뭐지?”
“스, 스크로디 라고 합니다.”
“그럼 그렇지. 나와서 꿇어.”
“예?”
“귀 먹었어? 나와서 꿇으라고.”
“아, 알겠습니다.”
얍실하게 생긴 젊은 위병 역시 도박장과 관계가 있는 자였다. 서류에 떡하니 이름이 적혀 있었고, 캐스윈의 세력에 속해 있었다.
“다음 스로크, 리구마, 레진...”
서류에 적힌 이름들을 불러서 비리에 관계된 인물들을 모두 옆으로 빼내었다. 순찰이나, 근무 중인 위병이 있으면 바로 데려오라고 교체인원까지 보냈다.
“더럽게 많네.”
내 옆으로 벌써 50명이 넘는 위병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러 비리도 아니고 오직 도박에 관계된 놈들이 이렇게 많았다.
“자작 각하!”
이들의 처분을 말하려고 할 때 멀리서 배나온 중년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왔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배나온 중년인이 임시 치안관 캐스윈이다. 그는 나와 무릎을 꿇은 위병들을 보여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꿈벅였다.
“이들이 왜 이러고 있는지 정말 몰라?”
“그, 그것이...”
캐스윈은 이미 위병들을 보며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믿기 싫었을 뿐.
“뭐해?”
“예?”
“꿇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