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준다고? (2)
영지를 준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땅은 굉장히 귀한 자원이다.
전쟁이든, 평시든 공을 세운 자에게 명예 남작위나, 자작위를 수여하는 경우야 많았지만, 영지까지 하사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거기다 국왕의 얼굴을 보니, 그가 내게 내주려는 것은 그저 땅만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폐하!”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그는 영지를 운영하기엔 아직 어립니다.”
“맞습니다. 재고하심이...”
“그만. 모두 입을 다물라.”
국왕이 한 마디에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오러나 기세가 아닌, 그 스스로 가지고 있는 패도적인 위엄이었다.
“그대들의 영지를 뺏어서 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들 난리인가.”
“그, 그것이...”
“으음...”
할 말이 없는지 귀족들은 헛기침만 하며 국왕의 눈치를 피해 고개를 숙였다.
“유렌 록스에겐 현재 주인이 없는 내 땅을 하사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에게 내어 줄 땅은 가이린 자작령이다.”
“아, 가이린이라면...”
“흐음...”
아까 국왕의 말에 따지려던 몇몇 귀족들의 얼굴에 알게 모르게 작은 웃음이 피었다. 그것은 절대 축하의 의미가 아니었다.
가이린을 받은 것을 비웃고 있군.
귀족들이 잠잠해진 이유는 가이린 자작령이 좋지 않은 영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자작령이지만 남작령 급으로 작고, 농경지나 목초지로 이용할 땅은 적은데다가, 관광지로도 쓸모없으며, 발견된 광산 같은 것도 없다.
거기다 가이린 자작령엔 용병들과 범법자들 천지라, 사건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많은 귀족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곳이 가이린이다.
그래. 실컷 웃어봐라. 나중에 어떻게 되나 보자고.
가이린을 준다는 소리에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비웃은 자들은 나중에 가이린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게 되면 땅을 치고 후회 할 것이다.
“추가로.”
국왕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이린에 대해 소근 대던 모두가 입을 다물고 국왕에게 집중 했다.
“유렌 록스는 록스 후작가의 장남으로 후에 록스 후작의 위를 이를 것이 확실하기에 그에게 록스의 이름 그대로 자작의 위를 수여하겠다.”
가이린을 받았기 때문인지, 귀족들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국왕은 내가 록스의 작위를 얻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나중에 록스 후작위를 물려받는 다면 그땐 록스의 이름을 가지고 록스와 가이린 두 땅을 모두를 가지게 되는 것 까지 배려해주고 있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대가 가이린을 훌륭하고 번창하는 영지로 만들리라 믿겠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아린과 일리아의 보상을 주도록 할까?”
국왕이 자리에서 내려와 알현실의 문으로 다가갔다.
번쩍.
국왕의 주문에 알현실의 문이 왕실 보고의 금빛 문으로 바뀌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오색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오!”
“이것이 왕실보고!”
귀족들이 왕실 보고의 입구로 모여들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보고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일리아와 아린은 원하는 것 하나 씩 고르도록.”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낄데 안낄데 구분 못하는 건방진 새 한마리가 말릴 새도 없이 튀어나왔다.
“빽.”
문을 열고 내게 다가오던 국왕이 자신에게 날아온 빽빽이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 녀석이 자네의 정령수인가?”
“그, 그렇습니다.”
“흠, 좀 더 클 거라 생각했는데, 작고 귀엽구먼.”
빽빽이는 얍삽한 새답게 바로 보고로 들어가지 않고, 먼저 국왕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역시 서열 관계엔 빠삭하다.
“허허.”
국왕은 빽빽이를 쓰다듬으며 허허로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빽.”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빽빽이가 국왕의 손을 떠나 왕실보고로 날아갔다.
“저 녀석이!”
“괜찮네. 놔둬.”
급히 따라가려고 할 때 국왕이 내 어깨를 잡고 말렸다.
“그보다 자네 가이린에 대해 알고 있나?”
“저희 영지와 붙어 있는 곳이니,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아마, 고생 할 걸세. 그곳에 배정되었던 관료들은 아직도 가이린이라고 하면 학을 떼거든.”
“네. 알고 있습니다.”
국왕은 내 침착한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가이린 영지에는 에킬 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을 자세히 조사해보게나.”
“에킬산...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에킬산을 알고 있다니, 역시 국왕은 가이린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낸 뒤에 내게 넘겨준 것이다. 그는 여러모로 내게 힘을 실어주려는 모양이다.
“자네. 아직 후계자도 되지 못했다면서.”
“그렇습니다.”
“허허, 대단해. 자네 같은 사람이 아직 후계자가 아니고, 아린은 수련기사라니. 크큭. 록스 후작가는 괴물들만 있는 곳인가?”
“제가 어렸을 때 사고를 많이 쳐서 믿음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사고는 누구나 친다네. 자네 나이에 깨달았으면 그것도 기연이야. 자네가 후계자건 말건 록스의 이름은 자네에게 향하겠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국왕은 그 말을 하고, 다시 보고 앞으로 향했다.
나아가는 국왕의 등에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전했다.
“빽!”
일리아와 아린보다도 먼저 빽빽이가 보석 하나를 발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정령석]
아무런 속성에도 물들지 않은 정령력이 들어있는 돌이다.
무속성의 정령석은 정령수의 영력이 상승하는 돌로, 어떻게 보면 속성이 들어있는 정령석보다도 더 희귀한 물건이다.
이미 정령석의 영력을 먹어치운 빽빽이의 흰색 털엔 윤기가 좔좔 흐르고 있었다.
“허허.”
국왕은 이오칼의 왕과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모르고 빽빽이가 가져다 준 보석과 애교에 웃기만 하고 있었다.
“으으...”
아주 소름끼치는 녀석이다.
“유렌 록스.”
“아, 일 왕자 저하.”
빽빽이를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때 뒤에서 국왕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젊은 남자가 다가왔다. 일 왕자 그웬 브라이어드다.
“내일 돌아가는가?”
“그렇게 될 거 같습니다.”
“그럼 내일 점심이나 같이 하는 게 어때?”
일 왕자는 어딘지 모르게 비틀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고, 말투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비웃는 것 같아 기분 나쁘겠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는 그 표정에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보지.”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일 왕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은 뒤 앞으로 가서 국왕의 뒤에 섰다.
“안녕하세요.”
이번엔 이 왕자 아서 브라이어드가 말을 걸어왔다.
“이 왕자 저하.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니에요. 서로 인사 할 시간도 없었잖아요.”
이 왕자는 일 왕자와 다르게 다정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형님과는 내일 점심 약속을 하셨을 테니, 저하고는 이후에 티타임을 가지는 게 어떤 가요?”
“알겠습니다. 저하.”
“감사합니다. 유렌 록스님. 내일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하죠.”
“그럼.”
이 왕자는 부드러운 웃음을 유지한 채 국왕의 왼쪽에 섰다.
“왕자들이라...”
저 둘이 나를 부르는 이유는 뻔하다. 내 이름을 자신들의 뒤에 놓아 왕위경쟁에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다.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앞으로의 사건들을 생각해 보고 있을 때 일리아가 선택을 끝내고 보고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리아는 롱소드 보다 조금 긴 검 하나를 들고 있었다.
[포틀런의 사익검]
대륙 장인 포틀런이 중년시절에 만들었던 검이다.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검의 양날 균형과 무게 중심이 완벽하고, 오러에도 잘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기에 실력 좋은 검사에게 가장 잘 맞는 검이다.
“잘 골랐네.”
그녀에게 잘 맞는 검을 잘 고른 것 같다. 검후의 특성이 있으니, 어중간한 옵션은 그녀에게 방해만 될 거다.
“아린은 고민 중인가...”
아린은 뭘 골라야 할지 모르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뭘 고른 적이 없고,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폐하.”
“왜 그러나?”
“아린이 고르는 것을 조금 도와줘도 괜찮겠습니까?”
“허허, 물론이네.”
국왕의 허락을 받고, 아린의 옆으로 다가갔다.
“못 고르겠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너무 많고, 뭐가 뭔지 모르다보니.”
이해가 되는 말이다. 아린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선택지 앞에선 고민이 될 테니.
차분히 창조주의 눈으로 살펴보며, 그녀에게 갑옷 안에 입는 더블릿을 골라주었다. 더블릿은 깨진 갑옷 조각이나 적의 검격을 마지막까지 막아주는 최후의 보호 장비다.
[그레이브 아밍 더블릿]
가볍게 만든 누비옷이지만, 그레이브의 실을 사용해서 제작했기 때문에 질기고, 끈끈해 웬만해선 베이지 않는다.
특수 옵션: 근력 강화, 민첩성 강화.
아린은 주로 가벼운 갑옷을 착용하는데, 이 옷은 갑옷 안에 입는 옷임에도 방어력이 나쁘지 않고, 특수옵션도 있어 그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그녀에게 옷을 설명해주자, 아린이 더블릿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왔다.
“전 이걸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닫겠네.”
국왕은 만족스럽게 나와 아린을 쳐다본 후 보고의 문을 닫았다.
“유렌 록스, 일리아 마르쿠스, 아린 그대들이 앞으로도 크라시스를 위해 많은 힘을 써주길 바란다.”
“물론입니다, 폐하!”
“오늘 행사는 이것으로 끝이다. 그럼 모두 돌아가도록.”
국왕의 말에 귀족들이 돌아가고, 나와 아린, 일리아도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았을 때였다.
“유렌. 신성국의 성녀와 좋은 분위기였다던데 설마 거기로 장가가는 거 아니지?”
“엑?”
갑자기 국왕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적 없었습니다!”
“아, 그런가? 미안하네. 소문이 그래서. 허허.”
국왕은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내 뒤에 있는 여자에게서 살을 떨리게 하는 기세가 흐르고 있었다.
“유렌. 일단 나가자.”
일리아의 목소리가 한 겨울의 바람처럼 싸늘했고, 아까 내 숙소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아까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나도 들었거든 저 소문. 어떻게 된 거야?”
알현실 밖으로 나온 일리아의 얼굴과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
“성녀님과는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아린. 네가 말해줘.”
“맞습니다. 대공자님과 성녀님은 계속 같이 다닌 것 외에는 별일 없었어요.”
“아린! 그걸 그렇게 말하면...”
“이야기 좀 하자. 따라와.”
“아...”
**
“끙...”
어제는 일리아에게 계속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하고, 그녀가 원할 때 대련을 해준다는 약속을 해주고 나서야 겨우 내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렌 있나?”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자, 시종이 아닌 일 왕자가 직접 와 있었다.
“이, 일 왕자 저하!”
“뭘 그렇게 놀라.”
“직접 오실 줄은 몰랐기에...”
“그냥 산책 삼아서 왔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어제보다 얼굴이나 말투가 훨씬 편해보인다. 그의 뒤를 따라 일 왕자 궁의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가 식탁에 앉자마자, 따끈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식들은 화려하지도 종류가 많지도 않았지만, 입맛을 돋우게 하는 향기와 색을 가지고 있었다.
“식으면 맛없으니, 일단 먹지.”
“감사히 먹겠습니다.”
“보기엔 좀 평범해 보여도, 맛있을 거야.”
일 왕자의 말대로 요리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맛있었다. 요리를 즐기고 난 뒤 후식이 나올 때가 되서야 일왕자의 입이 열렸다.
“나와 아서는 얼마 전까지 여행을 다녀왔거든. 왕국을 한 바퀴 돌았어.”
“그랬군요.”
“처음가보는 긴 여행이었는데 정말 좋더라고. 백성들의 얼굴은 밝았고, 웃음이 넘쳤지. 물론 모든 것이 보이는 대로는 아니겠지만.”
왕자들이 왕궁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왕국을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했기 때문인 모양이다.
“크라시스 왕국은 평화롭고, 좋은 나라야. 신의 빛이 비치는 것처럼”
일 왕자가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을 홀린 것처럼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 빛이 유지 된다면 내가 왕이 아니어도 좋아. 아바마마께서도 태어난 순서로 왕위를 결정하지 않으신다고 했고.”
그의 말은 여전히 툴툴거리는 느낌이었지만, 계속 들으니 나름 정겨운 느낌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주변에서도 아서가 왕위를 잇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잖아. 나보다 똑똑하고, 강하며, 배려심까지 있으니. 성군이 될 거라고 하고.”
이 왕자 아서는 일 왕자 그웬보다 학문, 무예, 인성, 인맥까지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비해 내 앞의 일 왕자는 잘하는 것도 없고, 말투는 어색하며,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보여 왕가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원래의 유렌처럼 망나니는 아니지만, 일 왕자라는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까.
하지만 난 이 세계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원작에선 일 왕자가 죽고, 이 왕자가 왕위를 잇게 된다.
그리고 나서야 세상은 이 왕자가 보이는 대로의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전엔 왕궁을 나가서 아서에게 왕위를 줄까도 생각했는데, 이번에 아서와 여행을 다니며 느꼈어. 이건 내 감일 뿐이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서가 왕이 되면 안 돼.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야.”
일 왕자가 진중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어떠한 사심도 없이, 순수 그 자체를 담고 있었다.
일 왕자가 그런 것을 눈치 챘을 줄이야. 생각보다 쓸 만하겠는데.
일 왕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물론 자연사나 사고가 아니라 살해를 당하는데, 나에겐 그것을 막을 충분한 능력이 있다.
일 왕자를 살려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