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준다고?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변을 밝게 만드는 절세 미녀가 내 놀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의외라서. 일단 들어와.”
문에서 살짝 비켜서, 그녀가 방에 들어올 수 있게 해주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방으로 들어온 미녀는 내 약혼녀 일리아 마르쿠스였다.
기세가 달라졌어.
이전에 봤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 기세와 분위기에 그녀의 오러를 감지해보자, 오러의 밀도와 크기가 크게 상승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좀 불편해 보이는데...
“음?”
“빽?”
일리아는 방을 둘러보다가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빽빽이와 눈을 마주 쳤다.
“빽빽.”
빽빽이 녀석도 보는 눈은 있는지, 일리아의 외모를 보고 뿅가서 그녀의 눈앞으로 날아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빽.”
“음...”
일리아는 큰 표정 변화 없이 빽빽이를 쳐다보다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새는 뭐야?”
“우연히 키우게 된 정령수야.”
“아, 들었어. 마계화 지역에서 얻었다던.”
“맞아. 그게 저 녀석이야.”
일리아는 다시 빽빽이를 쳐다보았지만, 그저 호기심의 시선일 뿐이었다.
“빼액.”
빽빽이는 일리아가 자신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한숨을 내쉬고 난 뒤 다시 소파에 누워서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포기가 저리 빠르다니, 정말 감탄이 나온다.
“귀엽네.”
일리아도 그 모습엔 웃음이 나오는지 피식 웃고 나서 내 옆에 앉았다.
“왕궁엔 무슨 일로 온 거야?”
“왜? 내가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해서 그런 거야. 오랜만에 봐서 정말 반가운데, 궁금해서.”
이거 위험한데, 말을 잘 골라야겠어.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이름: 일리아 마르쿠스]
[특성: 경국지색(傾國之色), 검후(劍后), 월하지체(月下肢體)]
[호감도: 47 (호감) ]
[현재 기분: 오랜만에 봐서 반갑지만, 아쉬움.]
이 시점에 월하지체를 개방하다니, 수련장에 박혀서 검만 휘둘렀다는 게 정말인가 본데.
그런데 아쉽다니, 뭐가 아쉽다는 거지?
“나도 너처럼 불려왔어.”
“불려왔다고?”
“남쪽으로 수련행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던 마을을 발견했어. 기사 몇 명과 병사들이 있었지만, 몬스터들이 리자드맨들이라 얼마 버티지 못 할 것 같아서 바로 참전했지.”
“리자드맨?”
“그래. 많은 리자드맨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어.”
리자드맨이 마을을 공격했다는 것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리자드맨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갑자기 리자드맨을 지휘하는 상위 몬스터 리자드맨 전사가 나타났고, 녀석은 영리하게 내가 아닌 마을 사람들을 노렸어.”
일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예복 윗단추를 풀어서 어깨와 쇄골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쇄골엔 톱으로 베인 것 같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평생 검을 쓰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리자드맨 전사에게 당한 상처야. 마을 사람들을 노리는 척하다가 나를 공격하더라고, 그렇게 영리한 몬스터는 너랑 만났던 오크 투사 이후에 처음이었어.”
그녀의 말을 들으며, 쇄골의 상처를 집중해서 쳐다보았다.
“상처에 지금도 통증이 있고, 팔을 움직이기 힘들지 않아?”
“몬스터가 강할수록 상처의 후유증이 강해지니까. 네 말대로 아직은 통증도 있고, 검을 휘두를 수도 없어.”
만독자전신기가 6성에 오르고 나서, 창조주의 눈과 내력의 힘으로 상대의 혈도와 그 상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일리아의 쇄골에 있는 중부혈에 탁기가 소용돌이치며 그녀의 회복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계속 신성력을 받으면 사라지겠지만 꽤나 시간이 걸릴 거다.
불편해 보였던 이유가 이 상처 때문이었군.
“잠시만.”
하지만 내가 그 시간을 당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 유렌?”
일리아의 중부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깜짝 놀랐지만, 내 진지한 표정을 보더니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
만독자전신기의 진기가 그녀의 혈도에 들어가자, 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었다.
“조금만 참아.”
중부혈에 뭉쳐있던 탁기를 내 진기로 조금씩 흘리고 지워가며, 뭉친 부분을 풀어주었다.
“윽...”
내력을 움직일 때마다 일리아는 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됐어.”
5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중부혈에 뭉친 탁기의 대부분을 풀어주었다. 조금 남은 것도 하루 자고 나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제 팔을 움직여봐.”
일리아의 얼굴은 홍시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내 진지함에 참고 있었지만, 굉장히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아!”
그녀가 팔을 한 바퀴 돌려보다니, 깜짝 놀라서 눈을 토끼처럼 뜨며 날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그냥 마사지 같은 거야.”
“그래도 신관들도 회복하는 것에 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음, 일단 옷부터 제대로 입어.”
“악!”
팔을 돌리느라 일리아의 옷이 좀 더 내려가 있었는데, 그녀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비명을 지르며 몸을 훽 하고 돌렸다.
“고, 고마워.”
“별거 아니야.”
“그럼 난 돌아갈게. 이따가 보, 보자.”
일리아는 뒤돌아 있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볼이 빨갛게 익은 것이 보였다. 그녀는 뒤로 손만 흔들고 바로 방을 나가버렸다.
“이야, 미래의 검후님에게 저렇게 귀여운 모습도 있었네.”
“빽.”
빽빽이가 눈꼴시다는 듯 날개로 자신의 양 눈을 가리고 소파에서 방방 뛰었다.
“그건 그렇고 리자드맨 전사의 습격이라. 원작에선 그 마을이 멸망할 텐데 일리아가 스토리를 바꿨군.”
원작에선 마을이 멸망하고, 사람들이 리자드맨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수련행을 떠난 일리아가 그 이야기를 변화시켰다.
일리아가 수련을 하고 수련행을 떠나게 된 계기는 나다. 결국 내가 또 스토리를 바꾼 것이다.
“그래도 이번 건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네.”
**
“유렌님. 알현실로 가실 시간입니다.”
“네. 나갈게요.”
“허...”
록스가의 인장이 새겨진 검녹색의 예복을 입고, 밖으로 나오자, 비디츠 남작이 나를 보고 탄성을 내었다.
“제가 왕궁에서 본 젊은 귀족분들 중 가장 멋지신 것 같습니다. 예복의 색도 유렌님과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제게 그런 말씀 하셔도 드릴 게 없네요.”
그의 농담에 어울려주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척했다.
“하하! 정말입니다. 전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비디츠가 자신은 진심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알현실로 가시죠. 다른 분들이 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네.”
알현실 앞에 도착하자, 기사의 예복을 입은 아린과 일리아가 보였다.
그들은 기사로 공을 세운 것으로 불렸기에 드레스를 입지 않고 예복을 입은 것인데 예복으로도 그녀들의 미모는 죽지 않고 광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응?”
일리아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못 본 체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직도 부끄러운가.
“모두 준비되셨습니까?”
“네.”
“준비됐습니다.”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알현실 앞에 있는 서기관의 말에 대답하자, 알현실의 문이 회전문처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좀 많은데.
이전에 왕과 몇몇 신하가 있을 때와는 달리 알현실은 귀족들로 꽉 차 있었다.
왕의 바로 아래엔 그와 비슷하게 생긴 남성 2명과 아름다운 여성이 한 명 있었는데 이전엔 얼굴도 비치지 않았던 일 왕자와 이 왕자, 공주였다.
“들어가시죠.”
서기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알현실의 중앙으로 이동한 뒤 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록스 후작가의 장남 유렌 록스가 크라시스 왕국의 하늘 애거시스 브라이어드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마르쿠스 후작가의 장녀 일리아 마르쿠스가...”
우리는 차례대로 국왕에게 인사를 올렸고, 그때마다 국왕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일어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벌써 3번째니, 이제 왕들을 대하는 예의는 빠삭해진 것 같다.
“흠, 좋군.”
국왕은 우리 세 명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웃음을 띄웠다.
“모두 들으라.”
국왕의 웅장한 음성에 알현실이 쥐 죽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내 앞에 있는 세 명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의 일에 큰 도움을 준 영웅들이다. 오늘의 자리는 이 영웅들을 위한 자리이니, 그들의 영웅담에 큰 박수와 찬사를 보내도록 하라.”
“예. 폐하!”
귀족들의 대답에 국왕이 흡족한 얼굴이 되어, 다시 우리를 보았다.
“먼저 아린.”
“예. 폐하!”
국왕의 부름에 아린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성기사와 신관들조차 꺼리는 마계화 지역에 용기 있게 뛰어들어 큰 전공을 올리고, 모두가 방심하던 순간에도 홀로 움직여 많은 신관의 생명을 구했다고 들었다.”
크라시스 국왕은 기사라면 당당하고, 무인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린이 마음에 꽤나 마음에 든 것 같다.
“이오칼에서 온 외교관이 네 이름을 말하며 많은 칭찬을 하더구나. 타국에서 크라시스의 이름을 드높여줘서 고맙다.”
“저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과한 칭찬이라 어찌해야 할 바를...”
“훌륭한 일을 했으니, 훌륭한 칭찬을 받는 것이다. 사양하지 말라. 네게 왕실보고의 보물 하나를 가져갈 기회를 주겠다.”
“아...”
너무 놀랐는지, 아린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어서 내가 살짝 건드렸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래.”
국왕의 시선은 아린을 떠나 일리아에게 향했다.
“일리아 마르쿠스.”
“예. 폐하!”
아린이 물러나고 일리아가 앞으로 나왔다.
“몬스터들에게 습격당한 마을을 보고, 말릴 새도 없이 뛰어들었다 들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원작에선 많은 리자드맨이 마을을 습격하는 것을 보고도 겁에 질려 도망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말하는 것 같다.
“너는 그저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몸에 부상을 입으면서도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싸워 리자드맨 전사까지 제거했다. 백성들을 구해주어 정말 고맙구나.”
“기사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후후, 예전 공주의 생일 때 마르쿠스의 검이 되겠다던 네 당찬 포부가 아직도 기억나는구나.”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없습니다.”
“크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일리아의 시원한 대답에 국왕이 흡족함이 담긴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일리아 마르쿠스에게도 왕실 보고에서 보물을 하나 가져갈 기회를 부여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인사를 마친 일리아가 뒤로 물러났다.
“유렌 록스.”
“예. 폐하.”
국왕의 말에 앞으로 한 걸음 나갔을 때 이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그 시선에서 선망, 부러움, 질시, 혐오까지 많은 감정의 편린들을 느낄 수 있었다.
“하, 자네는...내 자네에겐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어. 신성국에서 성자 소리를 듣고 오다니, 나 참.”
말을 그렇게 하지만 국왕의 미소는 지금까지 중에 가장 진하며, 뿌듯해 보였다.
“성녀라는 아이가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했다고 해서 바로 마계화 지역으로 움직였다고 들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지만, 소문이 굉장히 좋게 난 모양이다. 딱히 바로잡을 필요는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언제나 가장 앞에서 전투를 벌이며, 위험한 사람들을 구해주었고, 데스 나이트를 제거했으며, 마계화의 주범 마계수를 잡아 성녀까지 구했다고 들었다. 너무 놀라워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했지만, 신성국의 후라켄 공작이 모든 것을 진실이라 밝혔으니 믿지 않을 수 없겠지.”
후라켄이 보고를 할 때 고맙게도 최대한 내게 유리하게 적어준 모양이다.
“마지막엔 마계화 된 대지마저 정화했다지? 그 마음에 감동하여 정령수까지 자네를 따른다고 들었다.”
소문이 저렇게 났다니, 저렇게 듣고 있으니 서사시의 영웅이 된 것 같았다.
“그런 그대에게 보통의 보상을 줄 수 없겠지.”
“폐, 폐하?”
“그게 무슨...”
여러 가지 눈빛을 담고 날 보던 귀족들이 국왕의 말에 당황하여 국왕을 돌아보았다.
“크라시스와 이오칼의 외교 관계에 큰 공을 세우고, 왕궁의 이름을 대륙에 드높인 록스가의 장남 유렌 록스에게 영지를 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