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왕과의 조우 (2)
‘진짜다. 저 남자는 진짜 당가의 무인이다.’
저 남자가 당가의 무인이고,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려한다는 것은 눈치 챘다.
[상승의 경지가 발동합니다.]
그의 움직임을 집중하려고 한 순간, 계속 연습해도 움직이지 않았던 상승의 경지가 자동으로 운용되었다.
상승의 경지는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을 느리게 만들고, 사고는 그대로 유지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저 남자에겐 그것조차 제대로 통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움직임은 느려지지도, 변하지도 않고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펄럭.
파앙!
남자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비수를 직사로 내던졌다. 공기가 터져나가며 비수는 빛살처럼 대기를 갈랐다. 상승의 경지가 아니었다면 궤적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였다.
픽.
죽림을 통째로 날려버릴 것 같았던 비수는 목표지점인 대나무 앞에서 살랑거리는 나뭇잎처럼 순식간에 속도를 늦추고, 처음에 박혀있던 구멍에 그대로 꽂혔다.
비수가 박혔음에도 대나무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미쳤어...’
그렇게 강하게 던져놓고, 고작 대나무 하나를 뚫지 못했다?
아니다.
내가 던지는 직사에 비해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던져놓고, 목표지점에선 완벽하게 속도를 죽였다.
그냥 던지는 것에 비해 만 배는 어려운 일이다.
‘내력 운용, 근육의 미세한 제어, 각도와 바람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했어.’
가장 기본인 직사를 본 것만으로 온몸이 식은땀에 푹 젖은 것 같았다.
우웅.
남자가 손을 내밀자, 대나무에 박혀 있던 비수가 끈이 달린 것처럼 남자에게 다시 돌아왔다.
‘천잠사? 은사? 아니야. 저건...’
우우웅.
내 만독자전신기가 그의 이능력과 공명하고 있었다. 저건 끈이나 실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만독자전신기의 내력을 이용한 것이다.
우우웅.
그의 상단전이 비수를 움직이고 있었다.
“나중...알...”
내가 놀란 것을 알았는지, 남자는 살짝 뒤를 돌아보고 피식 웃었다.
남자는 손에 돌아온 비수를 다시 날려 보냈다. 아까와는 다르게 비수는 죽은 듯 소리조차 없이 날았다.
‘제게 무슨...’
대나무 숲으로 날아간 비수는 수많은 대나무와 이파리들을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새처럼 유유히 지나갔다. 그런데도 내 곡사 이상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슈우욱.
대나무 숲을 가볍게 한 바퀴 돈 비수는 부메랑처럼 남자의 손으로 돌아왔다.
‘곡사 하나로 비수에 수십 가지 변화를 만들어 냈어. 저게 가능하다니...!’
남자는 허공섭물이나 좀 전에 보여준 상단전의 기예를 쓴 것이 아니다. 그저 비수에 곡사를 사용해서 무엇도 닿지 않고, 죽림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남자가 내게 뭘 보여주고 싶은지 알겠어.’
내 앞에 있는 당가의 절대자는 한 눈에 나의 부족한 점을 찾은 것이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능력을 알려주기보다, 먼저 기본을 제대로 닦으라는 의도였다.
‘말도 안 되는 기연이다.’
이 남자는 이미 천하의 정점에서서 세상을 굽어보는 자다. 그런 자가 자신의 기술을 훔치라고 코앞에서 보여주고 있다.
‘죽을힘을 다해서 보지 않으면 실례겠지.’
“훗.”
내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낀 건지 남자의 웃음이 진해졌다.
남자는 백광환, 묵봉, 십이비도, 혈화접까지 내가 쓰는 암기와 암기술의 완성판을 보여 하나씩 보여주었다.
‘달라...’
암기를 다루는 손짓, 내력수발, 근육 조절까지 모든 것이 내 뇌리에 쏙쏙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의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내겐 거대한 기연이었다.
“다음...”
남자는 모든 암기를 다시 돌려놓고, 맨손으로 다시 죽림 앞에 섰다.
사르르.
그가 왼손 검지와 엄지손가락을 살짝 비비자, 그의 손에서 나온 독기가 중간에 있는 대나무 이파리 하나를 바스스 녹여버렸다.
‘저게 가능하다고?’
와염독.
사람조차 녹여버리는 강력한 독이 셀 수조차 없이 많은 대나무와 이파리 중 오직 하나에만 작용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세밀한 통제력이다.
푸우욱.
‘말도 안 돼...’
내가 자주 유용하게 사용하는 붉은색 연기 살혼연.
살혼연이 사람 2명이 겨우 서있을 공간을 덮었다. 이정도 제어력이면 다른 동료와 있어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여러 독의 운용을 보여주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빠지지직.
남자의 다리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터지기 시작했다.
번쩍.
정말 우레라도 터진 것 같은 빛이 나오더니, 남자가 순식간에 공간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했다. 상승의 경지가 발동 중인 것이 아니었다면 나도 놓쳤을 움직임이었다.
위로 솟는 뇌충과 상대의 뒤를 노리는 뇌영, 뇌극에 뇌첨까지. 자세와 무게중심, 발의 각도와 강약 조절까지 남자는 뇌인신법의 완성판을 모두 보여주었다.
‘크크.’
두 가지 이유로 웃음이 나왔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의 능력에 만족하고 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두 번째는 앞으로 내가 저렇게 발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모든 것을 끝냈는지 남자가 뒤를 돌았다. 쳐다 볼 수조차 없었던 절대적인 기도에 아까와 달리 조금의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보...는가?”
‘보았습니다.’
“...필요...”
‘네. 전부 제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후후.”
그는 나보다 만독자전신기의 성취가 훨씬 뛰어나다. 그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시간...다.”
‘아...’
시간이 다 되었다는 소리 같았다. 남자는 나와 마찬가지로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겐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제 암기와 독은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이라...’
난 저 남자처럼 못하는 것도 있지만, 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내 암기와 독은 시스템의 능력으로 혜택을 받고 있다. 처음엔 게임을 하는 것처럼 편했지만, 암기와 독에 숙련된 지금은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었다.
“괜찮...”
남자는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아악.
정말 시간이 다 되었는지, 죽림이, 세상이, 그를 덮은 안개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아...’
안개처럼 아쉬움에 휩싸여 있을 때 그의 마지막 말이 노이즈 없이 그대로 들려왔다.
“다음에 올 땐 강해져서, 오게나. 이거 원, 제대로 대화를 못하니, 답답해.”
‘알겠습니다! 선배님!’
“후후, 그때는 내가 만든 소만천을 보여주겠네.”
[상승의 경지가 해제됩니다.]
[천수암왕(千手暗王)과의 조우가 해제됩니다.]
[익히고 있는 모든 암기술과 암기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익히고 있는 모든 독술과 독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뇌인신법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번쩍!
내 혼이 죽림에서 떠나 다시 내 몸에 자리를 잡은 것이 느껴졌다.
“아...”
[만독자전신기의 성취도가 올랐습니다.]
[만독자전신기가 6성에 도달했습니다.]
[더 큰 흐름을 살필 수 있습니다.]
[잠금이 해제됩니다.]
[독술의 시스템적 제한이 해제됩니다.]
[암기술의 시스템적 제한이 해제됩니다.]
[내공의 시스템적 제한이 해제됩니다.]
[상승의 경지의 제한이 해제됩니다.]
[자신과 타인의 모든 혈도를 살필 수 있습니다.]
[암기술 전사력(轉絲力)이 개방됩니다.]
눈을 뜨니 눈앞에 많은 메시지가 우르를 내려갔다. 이 메시지들도 중요했지만 그전에 보았던 메시지가 더 인상적이었다.
“천수암왕...”
그 남자의 별호를 말하는 것이다. 왕이라는 칭호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다시 볼 수 있겠지.”
이전의 메시지를 보니, 천수암왕을 다시 보기 위해선 내공이 많아야 하고, 익히고 있는 암기와 독의 성취도가 높아야 하는 것 같다.
“그때까지 더욱 강해져야해. 그래야 대화라도 나눠볼 수 있을 테니...”
“빽!”
“그래. 그래.”
내가 일어난 게 반가웠는지, 빽빽이가 내게 날아와서, 볼을 부비 댔다.
“어? 너 눈이 왜 이렇게 빨개? 안 잤어?”
“빼액...”
빽빽이가 힘없이 울음소리를 내며 날개를 흔들었다.
“안 잘 필요는 없었는데... ”
“빽!”
내가 지켜달라고 한 소리에 녀석은 잠도 자지 않고, 동굴 앞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마워.”
“빽.”
평소에 얍실하다가도 이럴 땐 믿음직스러우니, 미워 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며칠이나 지났지?”
“빽.”
빽빽이의 남은 먹이를 보니, 이틀 정도 지난 모양이다. 그곳에선 찰나였는데, 참 신기한일이다.
“그 분을 만난 덕분인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는데.”
솔직히 4일에서 5일 정도 생각했는데, 그 반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암왕과의 만남이 정말 큰 기연이 된 것 같다.
“빽.”
이제 자신은 자겠다는 건지, 빽빽이가 꺼내놓은 담요 속을 파고들어갔다.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챠앙.
허리에 있는 비수를 하나 꺼냈다.
“역시 보이지 않아.”
지금까지 보였던 목표점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조금 어색하지만 이제야 더욱 발전할 길을 찾은 것 같다.
“이게 맞는 거지.”
더 높은 경지를 위해선 모든 것을 내가 통제 할 수 있어야 한다.
“독도 마찬가지고.”
독도 범위나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성취도가 사라지진 않은 것을 보니, 수치는 나오나보네. 이러면 편하지.”
상태창을 보니, 암기와 독의 성취도는 그대로 나오고 있었다. 그저 암기와 독, 내공에 걸려서 내 감각을 제한하던 것들만 해제된 거다.
“시간은 충분해. 3일! 3일 안에 이전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
양손에 비수를 꺼내들고 동굴을 나서며 다짐했다.
챠앙.
**
“포메라.”
“주인? 너무 자주 보는 것 같소.”
“빽.”
“그래. 외모와 성격이 딴판인 새도 왔군.”
이틀간의 6성 도달, 3일간의 감각 회복의 시간을 가진 뒤 에 포메라를 찾아왔다.
“이번엔 어디로 가야하는 거요?”
포메라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 우리 포메라 이제 말 안 해도 잘 아네. 이걸 보고 마음이 통한다고 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소.”
포메라가 귀찮은 듯 푸른 불을 잠잠하게 태웠다.
“이번엔 크라시스 왕국의 왕도.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보내줘.”
“왕도에 마탑이 4개가 있소.”
“거기 대놓고 가기 힘드니까. 네게 온 거지.”
“젊은 사람이 뭔 비밀이 그렇게 많는 건지...‘
포메라는 할아버지 같은 소리를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에고.”
꼬마 해골이 아저씨나 할아버지같이 구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빽.”
빽빽이도 이제 포메라가 어두운 기운만큼 나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그의 위에서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난 다시 내 스스로를 점검했다. 3일간의 밤샘 수련으로 암기와 독의 통제력과 성취도는 이전보다 더욱 발전해 있었고 새로 개방된 능력도 확인이 끝났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다. 베일에게 질 자신이.
“주인. 다 됐소.”
2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포메라가 명상을 하고 있던 나를 깨웠다.
“수고했어.”
“별거 아니오.”
흑마옥을 줘서 그런지, 녀석이 좀 더 부드러워 진 것 같았다.
“흑마옥은 흡수했어?”
“그렇소. 이전에 아이자크의 구슬의 마력을 흡수 때는 강해지는 느낌과 동시에 두통이 왔었는데, 흑마옥은 그대로 마력만 들어왔소. 대단한 물건이더군.”
“다행이네.”
“고맙소, 주인.”
“아니야. 그리고...”
내 말에 포메라가 또 뭔가를 받을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줄건 기대가 아니라, 주의다.
“다음에 널 부를 때는 전투 중일 수도 있으니, 바로 싸울 수 있게 준비하고 있어.”
“전투?”
“그래. 혹시나 해서 말해 놓는 거니.”
“음, 알겠소.”
의외로 포메라는 별 반응 없이 가볍게 수긍했다.
“비밀스러운 주인이니, 그 정도 일이야 생각하고 있었소.”
“그렇게 생각해주면 편하지. 이제 보내줘.”
“준비하시오.”
우우웅.
포메라가 양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대지의 진동이 느껴지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변했다.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골목사이였다.
“이전에 비하면 훨씬 부드러운데.”
-그때는 일부러... 아니, 장소가...
“역시 일부러였네.”
-그, 그게 아니오.
“도인처럼 행세하더니, 속은 여전히 밴댕이네. 나중에 보자.”
-주, 주인...
포메라를 놀리며 아그네스를 얼굴에 뒤집어써서 이전에 랙커드를 찾아갈 때 했던 발론의 얼굴로 변했다.
“좋아. 가자.”
“빽.”
“넌 주머니에서 한 동안 나오지 마.”
“빽빽.”
빽빽이가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더니,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럼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파악해야지.”
사람들이 많이 있는 길로 나갔다.
“다행히 아는 곳이네.”
그래도 왕도에 3번째 와봤다고, 아는 곳이 보였다. 랙커드에서 나오면서 들렸던 주점이 있는 대로가 보였다.
만독자전신기의 성취가 올라 갈수록 똑똑해져서 그런지, 한 번 가본 파랑새까지 가는 길이 생생히 기억나서 찾아가는데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그대로네.”
파랑새는 전에 봤던 대로 지저분한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딸랑.
스윽.
내가 홀로 들어오자,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모여들었다.
“오랜만이네. 파랑새는 날지...”
“됐소. 그냥 들어가시오.”
마스터가 날 알아보았는지, 암호를 듣다 말고 창고 방을 열어주었다. 안에 들어가니, 이전에 안내해주었던 중년인이 마네킹처럼 서 있다가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고맙군.”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아래로 내려갔다. 어두운 곳엔 여전히 날 감시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전과 달리 그들의 위치만이 아니라, 모든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더 큰 흐름을 느끼는 것인가.
“좀 늦으셨네요.”
아래에 도착하자, 졸린 눈을 하고 있는 미녀 베로아 살며시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일이 바빠서.”
의뢰기간은 한 달이었는데, 예상 외로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조금 늦어져 버렸다.
“손님께서 꼭 오실 거라는 생각에 최신 정보까지 모아놨어요. 그래서 가격이 조금 올라갔는데...”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맞은편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금화를 쏟았다. 그녀의 농염한 얼굴이 번쩍이는 금빛을 보고 당황으로 물들었다.
“남는 게 돈이거든. 모든 정보를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