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수 (4)
정령과 정령수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정령은 태어났을 때의 상태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만약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로 태어났다면 그 실프는 죽을 때까지 실프로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정령왕조차도 마찬가지.
가장 강한 정령이 정령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령왕은 처음부터 정해진 이름과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에 비해 정령수는 태어났을 때 자신의 속성과 외형만 정해진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정령수의 힘은 하급정령보다도 약하다. 하지만 정령과 달리 정령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성장을 할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시간이다. 정령수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강해진다. 즉 살아간 시간 자체가 정령수의 힘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성장 방법은 지금 빽빽이가 하고 있는 것처럼 정령석안에 들어있는 정령의 기운을 흡수하는 것이다.
정령수는 자신의 속성에 맞는 정령석의 기운을 흡수해서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다.
속성이 없는 빽빽이는 정령석의 기운만이 아니라 속성까지 흡수 하고 있었다.
신기하군.
빽빽이는 원작과는 다르게 바로 앞에 있는 바람의 정령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도 몰랐던 고대의 정령석을 흡수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된 이유는 하나뿐이다.
“길잡이...”
원작에는 없던 길잡이 특성이 녀석을 저곳으로 안내했을 거다. 저 길잡이라는 특성이 내 생각대로라면 빽빽이와 내게 초대박이 터진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띵!
[벨로아의 속성에 물(고대)이 추가되었습니다.]
빽빽이가 정령석의 기운을 모두 흡수했는지, 메시지창이 올라왔다.
진짜 고대 정령이네
이 대륙에서 극소수만 고대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데 그런 희귀한 힘을 저 조막만한 녀석이 시작하자마자 얻어낸 것이다.
날아다니는 복덩이나 다름없었다.
“빽.”
“허허. 이 녀석.”
빽빽이는 단물 쪽쪽 빨아먹은 고대 정령석을 발에 든 채로 레일리의 손에 내려앉았다.
“빽빽.”
“이 녀석 보게나. 내게 이 돌을 가지라고 가져다 준 것 같네. 하하.”
정령과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정령석은 색깔이 예쁜 돌일 뿐이다. 이중에 저것이 정령석인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하.”
레일리는 빽빽이가 가져다 준 빈털터리 정령석을 받고 신이 난 얼굴이 되었다.
“빽.”
빽빽이는 정령석을 준 것으로 끝내지 않고, 레일리 주변을 돌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저 녀석은 이곳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지 자연스럽게 파악한 모양이다.
“하하! 그래. 내게 주지 말고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은 없느냐?”
“빽?”
빽빽이가 정말이냐는 듯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사람들은 입가에 우물을 판 채 빽빽이만 쳐다보았다.
“크하하하! 요 귀여운 녀석 좀 보게. 유렌.”
“예. 폐하.”
“이 녀석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
“빽빽이라 하옵니다.”
요새 이름가지고 구박을 듣다보니,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빽빽이? 좋은 이름이군.”
레일리의 좋다는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직관적이고,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일세.”
“감사합니다! 폐하!”
또 무슨 구박을 받을지 몰라 걱정했는데, 처음으로 칭찬을 들어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빽빽아.”
“빽?”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은 없느냐?”
“빽.”
레일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빽빽이가 레일리 옆에 있는 석상으로 날아갔다. 녀석은 바람의 정령석에 있는 정령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와, 저 녀석 여기서 2개를 먹어 치우네.
띵!
[벨로아의 속성에 바람이 추가되었습니다.]
빽빽이가 바람의 정령석에 담긴 정령의 기운을 흡수하자마자, 다시 메시지창이 떴다.
[벨로아]
정령계와 인간계 사이에서 살고 있는 정령수 중 하나. 정령수는 4대 정령 중 한 가지의 속성을 타고나지만 벨로아는 어떤 속성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속성 : 물(고대 1단계), 바람.
특성 : 길잡이.
여기서 2가지 속성을 얻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하, 이 녀석 나주지 말고,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라니까.”
“빽빽!”
만두에서 만두소만 빼먹은 것처럼 빽빽이는 자신이 정령석의 기운을 모두 흡수하고 껍데기만 남은 정령석을 다시 레일리에게 가져다주었다.
“빽빽빽.”
거기다 잊지 않고 빽빽거리며 레일리에게 조롱조롱 노래와 애교를 부렸다.
“욕심 없는 녀석이군.”
“가, 감사합니다.”
레일리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도 빽빽이를 보며 ‘어쩜 저런 귀여운 녀석이 있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
하지만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나는 소름이 끼쳤다. 저 녀석 나보다 한 수 위였다.
“크하하.”
빽빽이를 보고 있는 레일리의 웃음이 그칠 줄을 몰랐다. 녀석에게 완전히 빠진 모양이다.
“동물은 주인의 성격을 닮는다는 말이 있던데. 빽빽이도 자네의 성격을 그대로 따라간 모양이야. 후후.”
“정말 과찬이십니다.”
저 녀석이 나랑 비슷하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나보다 더한 녀석이다.
“빽.”
빽빽이는 이제 볼 장 다 보고, 다 놀아줬다고 생각했는지, 내게로 돌아왔다. 레일리는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내 어깨에 앉은 빽빽이를 쳐다보았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녀석일세. 오랜만에 실컷 웃었네.”
“귀엽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껏 즐겼으니, 이제 내가 보답할 차례군. 자네의 도움에 대한 감사로 약소한 선물을 준비했네.”
“선물이라니요. 아닙니다. 빽빽이가 함부로 보석을 뽑아서 실례를 범했는데, 선물까지 받는 것은...”
“이 석상과 기둥에 붙은 보석과 돌들은 선대의 취미였을 뿐이야. 나쁘지 않아서 놔뒀을 뿐이지, 나하곤 상관없는 물건들일세.”
레일리는 호감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빽빽이와 나를 쳐다보았다.
“먼저 자네의 도움에 대한 감사로 크라시스 왕국에 사절을 보낼 걸세.”
“그럴게 하실 필요까지는...”
“아니,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 하네. 타국의 귀족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이 예의일세. 우리가 크라시스 왕국과 나쁜 사이도 아니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마음이 편해졌다. 크라시스 왕국에 내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베일의 관심에서 드워프마을은 완전히 벗어나 내게만 향할 거다.
“자네는 단검을 던져서 싸운다고 들었는데 맞는가?”
“그렇습니다.”
“내 자네에게 줄 선물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뒤져도 괜찮은 단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더군. 그래서 다른 것을 준비했네. 가져오라.”
레일리의 말에 뒤에 있던 호위기사가 상자를 가져와서 내게 건네주었다.
“열어보게.”
“네.”
향이 살아있는 나무상자를 열자, 머리카락보다도 얇고 투명한 실 뭉치가 들어있었다.
“하늘의 누에라고 불리는 스카이미어에게서 뽑아낸 실일세. 왠지 단검을 쓰는 자네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네. 어떤가?”
“아...”
[스카이미어의 실]
하늘의 누에라는 스카이미어에게서 뽑아낸 실이다. 실 한 가닥만으로도 웬만한 오러나 마법을 버텨낼 수 있으며 불과 물에도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설치 해놓은 실은 주변의 색과 동화된다.
생각도하지 못한 엄청난 선물이다. 지금 당장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설명도, 능력도, 형태도 무협 소설에 존재하는 천잠사와 비슷한 물건이다.
“어떤가? 마음에 드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전하자, 레일리가 뿌듯함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었다.
“조금 걱정했는데,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정말 마음에 듭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이리 기뻐하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군. 자네도 그렇고 빽빽이도 그렇고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야.”
레일리는 내 어깨에서 털을 고르고 있는 빽빽이를 보며 웃었다.
“흠.”
레일리의 시선이 내 옆으로 넘어갔다.
“아린.”
“예. 폐하!”
갑자기 레일리에게 이름이 불려 당황한 와중에도 아린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게 인사는 한 번이면 충분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모두가 방심하고 있을 때 자네 덕에 신관들이 목숨을 건졌다고 들었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모두 똑같은 말만 하는군. 록스가에서 무슨 교육이라도 받는 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레일리는 어조와 표정은 흐뭇함에 젖어 있었다.
“우리 신관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자네에게도 선물을 준비했네. 원래는 검을 준비하려 했네만, 자네에게 맞는 좋은 검이 있다고 해서 장갑으로 바꿨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린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레일리가 넘겨주는 장갑을 받았다.
“장갑의 가운데에 박혀있는 작은 돌이 성석일세. 그 장갑은 소유자의 정신을 보호해주고, 상처와 체력 회복을 빠르게 해주네. 마지막으로 하루에 한번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
“저,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선물에 아린이 목소리를 떨었다.
“자신들의 일이 아님에도 목숨 걸고 도와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비할 데 없이 커다란 선물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모두 또 봤으면 좋겠군.”
“물론입니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빽.”
마지막으로 빽빽이가 꼭 그러겠다는 듯 울음소리를 내었다.
실제로 난 다시 이곳에 와야 하는데 빽빽이를 보니, 녀석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알현을 마치고, 왕성을 나와 후라켄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땠나? 성왕께선 생각보다 시원시원하신 분이시지?”
“그렇습니다. 너무 친근하게 대해주셔서 몸들 바를 몰랐습니다.”
“자네들 덕에 사망자가 아무도 없어서 기분이 좋으신 걸세. 이제 크라시스 왕국으로 돌아갈 건가?”
“네. 피메라 산으로 가서 제 대장장이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입니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쳤으니까요.”
“그렇군.”
“하아...”
후라켄이 아쉬움이 담긴 미소를 지었고, 이레아는 큰 숨소리를 내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 미리 챙겨놨는데도 잊을 뻔했군.”
“네?”
후라켄이 자신의 마법주머니에서 책 한권을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가져가게나. 자네가 검을 쓰지 않는 다는 것은 알지만, 특별한 손님에겐 무조건 주는 것이야.”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후라켄이 넘겨준 책의 표지를 보았다.
검술의 정석 – 후라켄 젠버그
이거...
예전에 카볼의 책을 찾을 때 록스 후작의 입에서 나왔던 책이었다. 검술서 중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보기 쉬운 책으로 유명하다.
“자네도 들어는 봤겠지? 대륙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검술서일세. 그것도 내 인장이 들어간 한정판이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못 구하는 거야.”
“감사합니다.”
후라켄에겐 이미 받은 것이 많다.
무게중심 특성에 뇌인신법, 아린의 대련까지 정말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얻었기 때문에 그에겐 무엇을 받아도 감사할 뿐이다.
팔랑.
그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책을 한번 펼쳐보았다. 그림도 깔끔하고, 글씨도 보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카볼의 검술서 만큼이나 잘 만들어진 책이었다.
“검을 잘 모르는 저도 알아보기 쉬울 정도네요.”
“허허, 내가 만든 건데 당연하지. 자네가 다 보면 아린에게도 보여주게나.”
“알겠습니다.”
책을 넘기다 참고 서적이라는 곳이 보였다.
“참고서적까지 적어놓으셨군요.”
“처음에 책을 써달라고 부탁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다른 책을 뒤져보았네. 그 책들을 적어놓은 거지.”
“훌륭하십니다.”
저작권도 없는 세상인데 알아서 본 책들을 적어 놓다니, 정말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며 대충 훑어볼 때 내 눈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한 곳에서 멈췄다.
이오칼 왕국 기본 검술 – 카볼.
델리언 왕국 기본 검술 – 카볼.
카볼의 책들이 후라켄의 참조 서적에 적혀 있었다.
“고, 공작 각하.”
“왜 그러나?”
“이 책들은...”
“아! 카볼의 책이로군.”
후라켄이 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카볼의 책들의 이름을 보고 빙긋 웃었다.
“좋은 책이었지. 사실 한 왕국의 검술만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면, 내 것보다도 더 좋은 검술서일세.”
“혹시 이 책들 가지고 계십니까?”
“당연히 가지고 있지.”
“죄송하지만 제가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자네 검술에 관심이 있는 건가?”
관심은 없지만, 훗날을 위해 필요하다.
후라켄에게 대충 관심 있다는 대답을 해준 뒤 그의 서재로 이동했다.
“여기 있네.”
“감사합니다.”
후라켄에게 책을 받아보니, 단단한 표지와 딱 맞는 그립감이 이전 카볼의 검술서들과 똑같았다.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선 자리에서 바로 1장을 펴보았다. 역시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그림이 보였다.
[창조주의 눈에 예속된 천안이 이오칼 왕국 기본 검술 1장 옥스를 각인합니다.]
[특성 천무지체로 인하여 옥스를 즉시 재현하실 수 있습니다.]
1장에 있는 그림과 설명을 모두 읽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 책은 진퉁 카볼의 책이 확실했다.
“공작 각하. 죄송하지만, 여기서 책을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우리 사이에 그런 걸 묻고 그러나, 당연히 상관없네.”
“감사합니다.”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바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모두 읽을 때마다 계속해서 각인 메시지가 떠올랐다.
팔랑.
이오칼 왕국 기본 검술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연속된 메시지가 줄줄이 나타났다.
[이오칼 왕국 기본 검술을 모두 체득하셨습니다.]
[이오칼 왕국 기본 검술이 특성 검인에 예속 됩니다.]
[잊혀진 제왕의 검 3/18]
[특성 검인의 경험치가 15% 상승합니다.]
[검인에 기본 검술 3개가 모인 효과로 모든 신체능력이 1% 상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