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화
“나가봐야겠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른 것 같은 기라녹스와 테스테인의 함성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나와 보니, 마을 안에 있는 모든 드워프들이 테스테인의 대장간 앞에 모여 있었다.
“이거구만.”
“이건 무기야? 장식이야?”
“세밀한 형태를 잘 잡았어.”
대장간 앞에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테이블이 있었는데, 전시를 해놓은 것처럼 테이블 위에 암기들이 올려져있었다.
“정교하다 못해 아름답군.”
“확실히 족장님의 실력은 달라. 이 세공솜씨 좀 보라고.”
“이 날은 어떻게 살린 거지? 진짜 못 따라가겠네.”
드워프들은 만들어진 암기들을 보면서 테스테인의 실력에 다시 한 번 놀라고 있었다.
“저건 백광환인가.”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둥그런 구슬 2개였다. 원래의 백광환은 흰색이지만, 신살수의 어금니의 붉은색 덕분에 구슬은 옅은 적색을 띄고 있었다.
“은인께서 골렘을 잡을 때 사용했던 구슬이 인상 깊었는지, 족장이 남은 이빨 조각들을 모아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어?”
이번에도 갈색수염 드워프가 왼쪽에서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이 쯤 되니 이 드워프와 통성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유렌 록스라고 합니다. 자주 뵙고 설명도 해주시는데 전 아직 성함도 몰라서...”
“저는 갈드 라이폰이라고 합니다. 갈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갈드님.”
갈색수염 드워프, 갈드는 내가 이름을 물어봐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씩 웃고서 바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갈드와 통성명을 끝낸 뒤 다시 백광환을 쳐다보았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백광환]
적을 꿰뚫거나, 급소를 타격하기 위해서 제작된 구슬 형태의 암기다. 전용 무공 일섬뢰를 사용할 시에 효과가 극대화 되며, 일섬뢰가 경지에 오르면 백광환의 궤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보유 능력: 신살, 가속.
“헉!”
“은인? 왜 그러십니까?”
“그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갈드의 의문을 대충 얼버무린 뒤 눈을 비비고 다시 백광환을 쳐다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야.
백광환에 옵션이 두 개가 붙었다.
신살이야 신살수의 어금니라는 재료 때문에 당연히 붙어야 하는 거고, 예상하지 못했던 가속이 추가로 붙어 있었다.
2개의 백광환에 모두 가속이 붙어있었는데, 속도를 중시하는 백광환과는 찰떡궁합인 특성이다.
대박!
속으로 개꿀을 외치며 백광환의 옆에 있는 꽃 모양의 암기를 보았다.
꽃의 형태는 연못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꽃 모양이었다. 색까지 연한 붉은 빛이 돌아서 물위에 띄워 놓으면 조금 덜 피어난 연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장식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꽃이군요.”
“네. 제가 원한 것 이상으로 아름다운 형태네요.”
갈드의 말을 들으며,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가서 연꽃모양의 암기 혈련화(血蓮花)를 들어보았다.
[혈련화]
다 피어나지 않은 연꽃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혈련화를 날려서 대상에게 적중하면 혈련화가 완전히 피어나면서 대상의 살과 뼈를 찢어놓는다.
보유 특성: 신살, 흡착.
크으!
혈련화에도 옵션이 두 개가 붙었다. 혈련화는 적의 몸에 박아 넣는 암기인데,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흡착이라는 옵션이 붙어버렸다.
어쩌면 이렇게 딱딱 필요한 옵션들만 붙는지 모르겠다.
“음...”
혈련화도 두 송이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내가 본 첫 번째만 흡착이 붙고, 다른 하나엔 신살만 붙어 있었다.
역시나 무조건 추가 옵션이 붙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탁.
혈련화를 다보고 내려놓자 테스테인과 기라녹스가 같이 대장간 밖으로 나왔다. 테스테인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테이블위에 내려놓았다.
“족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이게 오늘의 메인인가?”
“테스테인! 빨리 꺼내보라고!”
테스테인이 가지고 나온 귀왕살의 손잡이와 검집은 모두 어두운 녹색을 띄고 있었다.
“은인, 뽑아보시지요.”
테스테인의 말을 듣고 귀왕살을 쥐었다. 처음 만졌지만, 수십 년간 만져왔던 것처럼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어떤 명검이 나왔을지...”
“이것들처럼 아름다운 모습이겠지.”
“꿀꺽.”
모든 드워드들이 내 손에 들린 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스테인과 기라녹스의 기대감 어린 눈빛을 보며 귀왕살을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챠앙!
“어?”
“저건...”
우아한 단검을 생각하던 드워프들의 기대와는 달리, 검집에선 살기를 줄줄 흘리는 적빛의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게 단검이라고?”
“장난 아니군.”
“지독한 살기야.”
“악마, 악마같은 검이다!”
드워프들의 말대로 귀왕살의 검날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찔러죽일 것 같은 지독한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음.”
누구도 죽이지 않았는데도 이정도 라니, 이 녀석이 피를 먹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할 정도였다.
[귀왕살]
귀신의 왕을 죽인다는 이름답게 지독한 살기를 품고 있는 암기다. 칼날의 끝부분은 쳐다보기만 해도 눈이 베일 것 같은 예리함을 가지고 있어서, 스치기 만해도 심각한 출혈을 일으킨다.
보유 특성: 신살, 출혈 강화, 즉시 회복 불가
귀왕살엔 옵션이 세 개가 붙었다.
기본인 신살에 귀왕살 자체의 능력인 출혈 강화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 뒤에 있는 옵션에 눈을 빼앗겼다.
“대박...”
즉시 회복 불가.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끼리의 싸움에서 즉시회복을 하는 인간은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귀왕살로 노리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선 괴물 혹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닌 괴물들이다.
배때기에 구멍이 뻥 뚫려도 1초도 걸리지 않아서 회복하는 악마, 영물, 괴물들에게 저 옵션은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내 반응만을 기다리던 테스테인과 기라녹스에게 만족스러운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하아...”
“휴...”
그제야 테스테인과 기라녹스의 얼굴의 안도의 피소가 피어났다. 무기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생하셨습니다.”
“허허, 고생은 무슨, 은인의 마음에 든다니,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입니다.”
테스테인이 자신의 이마를 덮고 있던 두건을 풀면서 말했다.
“정말이에요. 기분이 하늘로 붕 뜨는 느낌이네요.”
정말 피곤한지 기라녹스는 마약이라도 한사바리 한 것 같은 표현을 쓰고 있었다.
“기대 이상의 무기들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은인이 잘 써주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맞아요. 대공자님. 그저 좋은 곳에 잘 써주시면 됩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랄까봐, 기라녹스가 매번 하는 소리가 테스테인에게서도 나왔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아시겠지만, 그 단검은 살기가 짙습니다. 쓰실 때와 쓰시지 않을 때를 잘 고르셔야 할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테스테인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머지 암기들과 반쪽 남은 신살수의 어금니를 챙겼다.
“대공자님. 이제 바로 돌아가실 겁니까?”
기라녹스는 이제 긴장이 풀려서 잠이 오는지,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있었다.
“아니, 넌 이곳에서 며칠 쉬고 있어.”
“네? 대공자님은 어디 가시게요?”
“의뢰비를 받았으니, 의뢰도 처리하고 잔금도 받아야지.”
**
무기가 완성된 다음날 아린과 같이 바로 산을 내려왔다.
이레아가 산 아래에 대기 시켜놓은 마법사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마계화가 진행 중인 신성 왕국의 남쪽 지역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었다.
파앗!
이동하자마자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어둠이 뚝뚝 흐를 것 같은 검보라빛 바닥이었다.
마계화 된 땅은 가뭄이 지나간 논처럼 바닥이 쩍쩍 갈라져 있었고, 그 틈에서 지옥의 악귀들이 나올 것 만 같았다.
파아앗!
번쩍이는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니, 이틀 전에 보았던 칠각형의 성석을 마계화 된 땅에 박아 넣고 이레아와 신관들이 성석에 있는 신성력을 깨우고 있었다.
지이이잉!
신성력이 채워지자, 성석은 눈부실 정도의 성스러운 빛을 내뿜으며 마계화 된 바닥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우우웅.
조금 전만 해도 좀비가 올라올 것 같은 마계의 땅이 평범한 들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유렌님!”
정화가 시작되자, 한숨 돌리던 이레아가 나를 보고 달려왔다.
“오셨군요. 무기는 완성하신 건가요?”
“네. 완성했습니다.”
“잘됐네요. 오시는데 불편함은 없으셨나요?”
“성녀님 덕분에 이곳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행이에요.”
이레아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지만, 이전보다는 조금 편안해진 어조로 대화를 이어갔다.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일단 이 앞에 있는 몬스터들을 모두 제거했고, 지금은 성석으로 땅을 정화시키고 있어요. 이 작업을 마계화의 원인이 생긴 곳까지 계속 이어가야 해요.”
“그렇군요.”
마계화 된 대지를 정화하기 위해선 오염된 땅위의 몬스터들을 제거하고, 성석을 땅에 박아 넣고 정화의식을 치러서 땅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는 작업을 반복해야한다.
어찌 보면 마계화 된 땅을 정화시키는 것은 땅따먹기와 비슷하다.
“지금까진 좀비나 해골병사 정도가 나타났지만, 앞으로는 더 지랄 맞은 놈들이 나타날 거예요. 그때 도와주시면 큰 힘이 될 거에요.”
“그러려고 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정말 감사합니다.”
이레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날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저어...”
“이레아!”
이레아가 내게 다른 말을 하려고 할 때 인자하게 생긴 중년인이 이레아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다, 단장님.”
중년의 기사는 모두가 성녀라고 부르며 어려워하는 이레아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라고 불러야지!”
“그, 그게 여긴 전장이니까...”
“허허! 그래. 네 말이 맞다. 내 실수를 했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중년인은 부끄러워하는 이레아를 보며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라고?
성녀 이레아에겐 친족이 한 명도 없다. 하지만 그녀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딱 한 명 존재한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이름: 후라켄 젠버그]
[특성: 검괴(劍怪), 인내lv5, 분석lv5, 무게중심 활용lv5, 강철 체력lv5, 오러 적응lv5 ]
[호감도: 23(관심) ]
[현재 기분: 호기심을 느낌. ]
역시 이 사람이군.
내 앞에서 이레아에게 다정한 웃음을 보이는 중년인는 극한까지 수련한 기본 검술만으로 대륙에 딱 13명만 있다는 소드 마스터에 이름을 올린 기괴한 초인이다.
“소개해 드릴게요. 단장님. 이분이 저희를 도와주러 오신 유렌 록스님이세요.”
“자네가 유렌이로군.”
“유렌 록스라고 합니다. 단장님.”
“나를 아는가?”
“물론입니다. 신성 왕국의 위대한 소드 마스터이자, 성기사단의 총 단장이신 후라켄 젠버그 공작 각하를 모를 수 없죠.”
진즉부터 존경했던 척을 하며 후라켄에게 예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이야! 이레아 네 입에서 처음으로 남자 이름이 나와서 어떤 친구인가 했더니만, 꽤나 괜찮은 청년이구만. 아주 좋아. 예의도 바르고. 난 찬성이다.”
“하, 할아버지!”
“허허허! 뭘 그리 부끄러워하는 게냐.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얘기해 놓고.”
“그, 그만하세요!”
이레아가 후라켄을 옆으로 밀면서 얼굴을 붉혔다. 후라켄은 얼굴이 더욱 빨갛게 변한 이레아를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원래 부끄럼 많은 아이지만, 이런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군. 이제야 제 나이에 맞는 얼굴을 하는 구나.”
“이이...”
후라켄은 이레아를 놀리는 게 재미있는 듯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단장님! 성녀님!”
“끝났나?”
“네. 정화가 끝났습니다. 다시 몬스터를 처리 할 시간입니다.”
“알겠네.”
후라켄은 여전히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같이 가겠나?”
“물론입니다.”
“즉답. 역시 마음에 들어.”
후라켄은 씩 웃고서, 먼저 마계화 지역으로 걸어갔다.
“성녀님. 저분이 계시면 저는 별 필요가 없었겠는데요.”
“저도 정말 몰랐어요. 할아, 아니 단장님이 예정도 없이 어제 갑자기 오셨거든요.”
“그렇군요.”
원래 마계화 에피소드에서 후라켄은 나오지 않는다. 마계화의 시간대가 당겨지면서 발생한 변화인 것 같다.
나쁘지 않아.
후라켄이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긴 했지만,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드워프 마을에서 볼일을 끝났다는 것을 알려야, 드워프들이 베일의 시선에서 벗어나 안전해 질 수 있다.
소드 마스터가 있는 전장에서 활약을 하면 내 소문은 더욱 빠르게 퍼질 거다.
거기다 나오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언데드.
다른 몬스터라면 모르겠지만, 언데드만큼은 앞에 있는 소드 마스터보다 잘 잡을 자신이 있다.
“여기부턴 정화되지 않은 땅일세. 주의하게.”
쩍.
정화되지 않는 땅을 밟자, 기분 나쁘고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내 발을 움켜잡은 느낌이 들었다.
“끈적거리니까, 걷거나 뛸 때도 조심하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앞에 오는군. 좀비와 구울이다.”
후라켄의 말에 뒤에 있던 성기사들이 검을 뽑고, 신관들이 신성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단장님. 오른쪽에 듀라한이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쪽으로 돌진 할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상대하지. 오랜만에 듀라한 좀 썰어...”
퍽!
후라켄이 여유롭게 검을 뽑을 때 내 단검은 이미 듀라한의 허벅지에 박혀있었다.
“어?”
“단검?”
“웬 단검을...”
기사와 신관들이 듀라한에 박힌 단검을 보고, ‘지금 뭐하는 짓거리야’ 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변하는 데는 4초면 충분했다.
“어?”
“무슨!”
“듀라한이 단검을 맞고 사라졌다고?”
거품처럼 녹아내린 듀라한을 본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후라켄에게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명령을 듣기 전에 이미 단검이 날아간 상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