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사냥
“유렌님!”
이레아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한 채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10초 전까지만 해도 볼을 붉히며 수줍어하던 여자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고오오.
이레아와 내가 닿을 만큼 가까워진 모습에 성기사들이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기 시작했지만 난 어깨를 으쓱하고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북벽에 나타난 하급 언데드뿐 아니라, 대가리를 가지고 다니는 추잡한 듀라한조차 유렌님의 단검 하나에 녹아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갈...”
언데드나 악마들의 이야기만 나오면 그녀의 입이 거칠어지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나도 잘 안 쓰는 대가리란 단어가 성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살짝 식겁했다.
사실 이것도 그녀의 본 모습이 아니다. 언데드들과 전투를 할 때는 더욱 더 무시무시한 여자가 된다.
“크흠, 성녀님.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바이렉은 이미 익숙한지, 대가리라는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소문의 진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
이놈도 참 웃긴 놈이다.
“맞습니다.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어?”
내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자, 바이렉이 얼빠진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어쩌면 겸손까지...”
바이렉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이레아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더욱 그윽해졌다.
“저도 처음엔 소문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유렌님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신관님과 대화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신관이라면...”
“그분은 북벽 탈환 전투에서 유렌님과 같이 다니셨다고 하셨어요.”
“아...”
이레아가 말하는 사람은 나와 같이 동문에 배치되었던 표정이 다양했던 신관이었다.
“그 신관님이 유렌님은 능력도 인성도 본받을 만한 분이라고 하셨어요. 희생정신을 가진 배려 넘치는 분이시라고.”
“하하...”
신관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좋은 말만 해줬기 때문에 나와 본적도 없는 그녀의 호감도가 그렇게 높았던 모양이다.
지금도 계속 높아지는 것 같은데.
[이름: 이레아 앨리넌스]
[특성: 성혼(聖魂), 신성적응lv3, 암흑면역lv3, 호이안 격투술 ]
[호감도: 46 (호감) ]
[현재 기분: 같이 언데드를 녹이고 싶음.]
“허...”
“네?”
“아닙니다.”
호감도가 순식간에 10이 넘게 올랐다. 호감도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상승한다.
이정도 호감도라면 신성 왕국에 무슨 일이 생겨서 이곳에 왔는지 사실대로 말해줄 것 같다.
“좀 전에 말씀하신 마계화라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군요. 먼저 그것부터 설명 드려야겠네요. 저쪽에서 말씀 드릴게요.”
“성녀님?”
“바이렉 경은 잠시 이곳에 있어주세요.”
“서, 성녀님!”
그녀는 따라오려는 바이렉을 물리고선 나를 데리고 마을의 구석으로 갔다. 내 뒤통수에 꽂히는 성기사들의 시선이 더욱 따가워졌다.
“유렌님은 뒤져버릴 마계화가 무엇인지는 아시나요?”
뒤져버릴 마계화는 모르지만, 마계화는 잘 알고 있다.
“대지가 어둠에 녹아드는 현상이죠. 마계화가 된 땅에선 언데드나 어둠 속성을 가진 몬스터들이 출몰하고, 놈들의 능력도 2배 이상 올라가고요.”
“역시! 유렌님. 알고계실 줄 알았어요.”
내가 만들었는데, 모를 수가 있나.
“마계화는 아주 가끔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죠. 하지만 이번엔 달라요. 3방향에서 그것도 저희 신성 왕국의 땅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어떤 개잡놈들이 저희를 노리고 일을 저지른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다. 신성 왕국 마계화 사건은 어떤 개잡놈들이 마계수라는 마계의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지금 남서와 남동은 성석을 사용해서 마계화를 막고 있지만, 정남쪽은 아직도 마계화가 진행 중이에요.”
“그래서 성석의 세공을 위해서 이곳에 오셨군요.”
“맞아요. 지금은 신관분들과 성기사분들이 신성력으로 마계화를 막고 있는 상태에요.”
이상한 일이다.
신성 왕국의 마계화는 두 에피소드 정도가 넘어간 후에나 나오는 사건인데 원래보다 훨씬 빠르게 사건이 벌어졌다.
“남쪽에서 넘어오는 마계화는 제가 막아야 해요. 성석으로 마계화를 막고, 그 원인을 찾으러 가야하는데, 언데드 학살자라고 불리우는 유렌님이 도와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거에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보기보다 풍만한 상체를 내게 들이밀었다.
“어?”
하지만 나는 이레아의 상체나 아름다운 얼굴보단, 그녀의 목에서 흔들리는 은빛의 구슬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생각했던 물건과 너무 닮아서 창조주의 눈을 써보았다.
[성석 목걸이]
신성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성석을 정교하게 다듬은 목걸이다. 파마의 효능이 있어, 정신지배, 빙의, 악귀들의 접근을 막아주며, 소유자의 정신력을 상승시켜 준다.
이거 왜 얘한테 있냐.
“죄송하지만, 저도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사실 성녀님과 성기사단이 나선다면 쉽게 처리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마계화가 되면 하급 언데드들이 나타나고, 그게 지속되면 강한 언데드들이 나타나요. 하지만 이번엔 마계화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잘린 대가리들이 나타났어요.”
“잘린 대가리라면 듀라한이요?”
“네. 그것도 세 놈이나.”
내가 만든 에피소드에서도 듀라한이 나온다. 하지만 2마리뿐, 그것도 마계수를 지키는 마지막 보스로 나온다.
에피소드의 등장 속도만 빨라진 게 아니라, 난이도 까지 올라가 버렸다.
사건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볼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거기다 마계수를 퇴치하고 나오는 보상은 꽤나 쓸모 많은 녀석이다.
내가 챙겨야한다.
“음...”
이레아가 부탁을 하지 않아도 그곳에 가야겠지만, 하나를 더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조금 머리를 굴렸다.
“하아...”
“왜 그러시죠?”
내가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쉬자, 이레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심각하다니, 저도 정말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이레아님도 모두 말씀해주셨으니, 저도 제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제가 아는 아이가 빙의 악령에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신관님을 불러도 그 때뿐이라, 계속 고통 받고 있어요. 사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그 빙의 악령을 제거 하거나 쫓아낼 무기를 만들려고 온 겁니다.”
“아! 그런...”
내 말을 들은 이레아의 표정이 더욱 아련해졌다.
“그런 씹어 먹을 악령놈이...”
하지만 그 아련한 표정에선 기똥찬 욕이 나왔다.
“커흠, 상당히 지독한 녀석이라고 하더군요. 떼어내기 힘들다고.”
“제가 직접 가서 그 시궁창... 아! 아니다. 이걸 드릴게요.”
“이건...”
이레아는 자신의 목에서 흔들리던 성석 목걸이를 빼서 내게 건네주었다.
“이 목걸이에는 작은 성석이 들어가 있어요. 소유자의 혼을 보호하고, 악령이나 어둠을 가진 놈들의 접근을 막아주죠. 이미 빙의된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을 거예요.”
당연히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목걸이는 그 녀석에게 주기 위해 내가 가지러 가려고 했던 목걸이니까.
“성석이라니, 엄청 귀한 물건이잖아요.”
“그렇게 큰 성석이 아니에요. 거기다 전 어둠 저항도 강하고, 신성력도 넘치거든요. 우연히 얻었지만 제게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에요.”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내가 목걸이를 쥔 채로 주저하는 척을 하자, 이레아가 여신 같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 그 목걸이도 기뻐 할 거예요.”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아니에요. 유렌님이 걱정하시는 아이에게 꼭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잘 해결되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아이자크라는 악령에게 시달리는 귀여운 꼬마 해골 포메라가 있었으니.
다만 나중에라도 리치에게 자신의 목걸이가 갔다는 것을 이레아가 알게 되면 포메라의 골통이 아예 뽀사질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해주셨는데, 저도 그냥 갈 수는 없겠네요. 성녀님의 조사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이신가요?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어차피 조사와 보상 때문에 가야 하는데, 추가로 선물까지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가드려야지.
“은인!”
이레아와 웃으며 마주보고 있을 때 뒤에서 테스테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간의 정비가 끝난 모양입니다. 가봐야겠어요.”
“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레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마계화 이야기가 끝났으니, 원래 수줍음 있는 성격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대장간의 복구가 끝났습니다.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해가 졌는데, 내일부터 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허허, 제가 참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고 싶습니다.”
테스테인은 신살수의 어금니로 무기를 만드는 것이 기대가 되는지, 꼼지락거리며 양손을 풀고 있었다.
“다른 대장간도 지금 정비를 하고 있으니, 고쳐지는 대로 성석의 세공을 진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테스테인의 말에 이레아가 곱게 인사를 했다.
“그럼 바로 작업을...”
“족장님.”
“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어떤?”
“기라녹스!”
구슬땀을 흘리며 짐을 나르고 있던 기라녹스를 이쪽으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기라녹스는 옮기던 망치들을 들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녀석은 내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
“이 녀석도 같이 써주시겠습니까?”
“음.”
“엑? 대, 대공자님! 저는 아직...”
“정말 실력이 모자란다면 빼도 좋습니다.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이 녀석과 같이 제 무기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윽! 전 이만... 헥!”
뒤로 도망가려는 기라녹스의 뒷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흠...”
테스테인은 매서운 눈으로 기라녹스를 노려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기라녹스에겐 드워프들도 없는 마병창조라는 엄청난 특성이 있다. 그 특성이 발휘된다면 만들어지는 암기들에는 추가 옵션이 붙을 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내치셔도 됩니다.”
“대, 대공자님...”
자신의 일이건만 기라녹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테스테인에게 끌려갔다.
운이 좋으면 기라녹스 덕에 귀왕살에 옵션하나 더 붙는 거고, 운이 나빠서 아무것도 안 붙는다고 해도 기라녹스는 테스테인의 망치질에서 무언가를 배울 테니, 일이 어떻게 되든 내게 손해는 없다.
“기라녹스! 실수 하나만 해도 바로 쫓아 낼 거야!”
“옙!”
기라녹스도 이게 천금 같은 기회라는 것을 알았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테스테인의 보조를 시작했다.
콰아아아!
“더 빨리 밟아! 온도가 낮잖아!”
“알겠습니다.”
기라녹스와 테스테인이 용광로에 불을 올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윽.
생각대로 된 것 같아서 들뜬 기분으로 밤하늘을 올려올 때 마을 밖에서 아주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쳤네.”
“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이레아가 내 혼잣말을 들은 모양이다.
“죄송하지만,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누가 이곳에 침입할 지도 모릅니다.”
“침입이요?”
“네. 그러니 드워프들의 보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그리고 아무도 밖으로 나오게 하지 마세요.”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그녀에게 뒤로 하고 벽을 넘어서 밖으로 나갔다.
“이런 상황에 정찰을 오다니...”
신음 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가서 수풀들을 뒤져보았다.
이미 해가 져버린 어두운 산속이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에 동그란 혈흔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 함정을 밟은 녀석의 발바닥에서 나온 피다.
“정신 나간 놈들.”
성기사들이 드워프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봤을 텐데도, 이 거리까지 정찰을 온 것을 보면, 베일의 늑대들은 정말 미친놈들이다.
“하지만 정찰이 다가 아니겠지.”
내 생각대로라면 놈들은 오늘 드워프 마을을 습격 할 거다.
온슬롯의 감시탑으로 청각을 강화한 채로 혈흔을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작은 대화소리를 듣고 발소리를 죽였다.
“성기사들은 한동안 드워프 마을에 있을 것 같습니다.”
“유렌 록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조용히 접근하자, 놈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거진 수풀 사이에 검은 옷과 복면을 쓰고 있는 20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
“음.”
가운데 있는 자가 조장인지, 늑대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샥.
조장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다른 복면인 하나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다르님이 그대로 속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래. 모두 준비하라.”
다르까지 왔나.
베일에게 폐기처분 당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살아남은 모양이다. 놈은 멀리서 마을 쪽을 저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거다.
다르와 늑대들이 성기사들이 온 것을 보고도 마을을 습격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베일의 명령을 받은 그들에겐 공격이라는 선택권외에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놈들의 움직임을 보며 아그네스를 날렵한 장거리용 비수로 변화시켰다.
“휴우...”
폐에 있는 모든 공기를 한숨으로 내보내고 비수를 꽉 움켜쥐었다.
“8호?”
조장 옆에 있던 놈이 갑자기 픽 쓰러졌다. 저놈이 내 함정을 밟고 독에 중독 된 놈이다.
지금이 최고의 기회.
슈욱,
소리조차 죽인 비수가 바람처럼 날아갔다.
퍽!
머리 정중앙.
8호를 살펴보던 조장의 머리통에 비수가 틀어박혔다.
“무, 무슨!”
“단검!”
“유렌 록스다!”
“모, 모두 흩어져!”
늑대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조금 떨리고 있는 오른손의 손목을 왼손으로 다잡았다.
“하아...”
첫 살인이지만 생각만큼 울렁거리지는 않는다.
어차피 죽이지 않으면 죽는 세계다.
내 망설임 하나가 드워프나 기라녹스의 목숨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른손의 자그마한 떨림이 서서히 그쳐간다.
늑대 사냥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