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이레아 (59/241)
  • 이레아

    대륙에서 성녀라고 불리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왕국마다 성녀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성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자신의 나라에 있는 성녀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진정한 성녀가 누구냐고 묻는 다면 10명 중 6명은 이렇게 대답할 거다. 

    “이레아님이야 말로 진정한 성녀시지.” 

    성혼이라는 통로로 내려 받은 거대한 신성력, 그 신성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다양한 신성 마법,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찾아가서 도와주는 따스한 인성까지. 

    하지만 그게 그녀의 전부가 아니다. 

    그녀가 진정한 성녀라고 불리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외모가 여신과 똑같으니까.” 

    이레아는 신성왕국이 모시는 질서의 여신 샤브렌과 똑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밝은 분홍 머리카락과 잡티 하나 없는 백옥피부, 수려한 이목구비까지. 여신 샤브렌의 얼굴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레아의 인기는 대륙의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 인기녀가 여길 왜 오는 거야.” 

    인기 많은 성녀님은 성기사들의 철통같은 보호를 받으며 드워프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하긴 그곳에서 틀어졌으니...” 

    크라시스 왕국의 북벽이 뚫리려고 한 순간 주인공과 같이 나타나서 북벽을 지켜내고 포메라를 몰아낸 주인공의 조력자가 바로 저 여자다. 

    원래의 스토리라면 주인공과 같이 왕국의 파티를 즐긴 뒤 휴식을 취했어야 했지만 이곳에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건이 벌어진 모양이다. 

    “싸우자고 오는 건 아니고.” 

    그들의 분위기로 볼 땐 드워프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해서 오는 것 같았다. 

    “일단 말은 해줘야겠지.” 

    나무에서 내려와서 마을로 돌아갔다. 

    “그것부터 치워.” 

    “일단 굳어버린 부분부터 파내야지!” 

    “기라녹스, 넌 여전히 느려 터졌냐! 

    “네. 갑니다. 가요.”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았기 때문에 드워프들과 기라녹스는 열심히 복구 작업에 힘쓰고 있었고, 아린은 내 명령대로 마을을 보호하고 있었다. 

    “음?” 

    그런데 아린을 자세히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그녀는 가만히 있건만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하하!” 

    이제 보니, 더위를 참지 못한 아린이 자신의 검을 살짝 뽑아서 실프의 바람으로 더위를 날리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보고 웃는 것을 알았는지, 아린이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큭.” 

    그녀의 반응에 피식 웃고 나서, 대장간을 정비하고 있는 테스테인을 찾아갔다. 

    “족장님.”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혹시 다른 몬스터들이 찾아올지 몰라서 주변에 함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드워프분들께 주변을 돌아다닐 때 조심해달라고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거기까지 생각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상관도 없는 드워프들이 베일의 늑대에게 습격 당할까봐 설치해 놓은 거다. 테스테인에게 조심해야 할 위치를 말해준 뒤 드워프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알리겠습니다.” 

    “말씀드릴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지금 이오칼의 성기사들이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 

    테스테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신성 왕국에서 저희를 찾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성석이나 보석의 세공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이 무슨 부탁을 하던 은인의 무기를 먼저 만들어 드릴 겁니다.” 

    테스테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터질지 뻔하게 보이고 있었다. 

    살짝 귀찮아 질 것 같네. 

    “곧 대장간의 수리가 끝날 테니, 은인께서 원하시는 검이 어떤 형태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검이 아닙니다.” 

    “네?”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미래의 내가 기린에게 던진 쇠말뚝은 화매지정(花梅摯釘)이라는 사천당가의 암기다. 

    화매지정은 살상을 위한 암기가 아니라, 맞은 사람을 벽에 박아 넣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제압 목적의 암기다. 

    “이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테스테인에게 보여준 것은 쇠말뚝 형태의 화매지정이 아닌, 한 자루의 비수였다. 

    칼날부분과 손잡이부분을 구분하는 가드 없이, 날과 손잡이가 일체화 된 형태의 비수. 

    칼날로 내려 갈수록 두께가 점점 얇아지며, 날의 끝은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지독한 살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화매지정과는 달리,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살기에 푹 젖어 있는 귀왕살(鬼王殺)이 이 비수의 이름이다. 

    “으음...” 

    귀왕살의 형태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하지만 테스테인의 일그러진 표정은 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필살(必殺). 누군가를 꼭 죽이겠다는 염원을 담고 있는 형태군요.” 

    역시나 테스테인은 이 암기의 형태에 담겨있는 진득한 살기를 읽은 모양이다. 

    “맞습니다.” 

    이곳에서 내 목숨은 하나뿐. 

    앞으로 무슨 일이 터질지는 모르지만 녹용 따위에게 죽을 생각은 없었다. 

    미래의 나는 기린에게 말을 걸었지만, 기린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투가 시작됐다. 

    그래서 결정했다. 

    기린과의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확실하게 제거하기로.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형태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검을 만들어도 이빨은 상당히 남을 겁니다.” 

    “반 정도는 남겨주시고, 나머지들로는 이것을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테스테인에게 꽃과 같은 형태를 지닌 암기를 보여주었다. 

    “이것들은 다른 의미로 끌리는 물건이군요. 그럼 나머지 반으론 다른 것을 만드실 생각입니까?” 

    “네. 지금은 능력이 되지 않아 쓸 수 없지만, 나중에 꼭 써보고 싶은 무기가 있습니다. 그 때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빨의 반을 남겨둔 이유는 간단했다. 

    훗날 얻게 될 만천화우(滿天花雨)를 위한 준비다. 

    만천화우에 대한 묘사는 소설마다 다르지. 

    첫 번째는 가지고 있는 모든 암기를 이기어검처럼 하나하나 조종해서 상대에게 날리는 방식. 

    두 번째는 특수 제작한 철판을 수십, 수백, 수천 개로 쪼갠 뒤 공중에서 떨어뜨리는 방식. 

    내 만천화우가 어떤 방식인지 모르니 이빨을 세이브 시켜놓은 거다. 

    “족장님. 한 가지만 더...” 

    “족장님!” 

    “족장!” 

    테스테인에게 다른 부탁을 하려 할 때 밖에서 드워프들이 테스테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성기사들이 도착한 모양이다.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일단 나가보시죠. 성기사들이 온 모양입니다.” 

    “알겠습니다.” 

    테스테인과 같이 대장간 밖으로 나가니, 마을 입구에 성기사 30명 정도가 줄을 맞춰서 이쪽을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다. 

    철컥. 

    그 중에 가장 앞에 있던 성기사가 말에서 내려서 우리 앞으로 걸어왔다. 투구를 벗자 귀티가 좔좔 흐르는 금발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오칼 제 5 성기사단 부단장인 바이렉 데르카다. 족장이 누구인가?” 

    “내가 족장인 테스테인이오.” 

    “음.” 

    바이렉의 말에 테스테인이 앞으로 나섰다. 바이렉은 테스테인을 내려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었소?” 

    바이렉이 난장판이 된 마을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신경 쓰실 일이 아니오.” 

    “당신들에게 중요한 물건을 맡기러 왔는데, 마을이 이 꼴이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있소?” 

    “정비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원하는 대로 해드릴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다소 걸린다는 그 시간이 문제라는 거지.” 

    반쯤 말을 놓기 시작한 바이렉은 테스테인 옆에 있는 내 얼굴을 보곤 흠칫 놀랐다가, 다시 내 옷을 보고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내 얼굴을 보고 귀족인줄 알았다가, 먼지와 때가 낀 여행복을 보고 평민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넌 뭔데 이곳에 있는 거지?” 

    “네가 뭔 상관이지?” 

    “뭐?” 

    똑같이 반말을 해주자, 거만하게 가라앉아 있던 바이렉의 눈동자가 희번득거렸다. 

    “다시 말해줘? 네가 뭔 상관이냐고.” 

    “이런 미친...” 

    바이렉의 몸을 움찔 거렸지만, 바로 달려들진 않았다. 기사인 자신에게 내가 반말을 한 것에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다. 

    “음...” 

    거기다 아린이 내 옆으로 와서 호위를 서자, 놈은 팔을 까딱 거리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더 쏘아주고 싶었지만, 내 옆에 있는 테스테인이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아 있는 드워프들에게 피해가 갈 것 같아서 대충 정리하기로 했다. 

    “다음부턴 초면에 반말하지 말고, 예의 좀 지킵시다.” 

    그 말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바이렉은 나를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남자는 누구요?” 

    내게 접근하기 힘들었는지, 바이렉은 테스테인에게 속삭이듯 질문했다. 

    “본인이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니, 내가 말할 수 없소. 다만 당신이 함부로 대할 분은 아니오.” 

    “크흠, 어찌됐든, 우리는 성석의 세공을 맡기러 왔소. 급한 일이니 바로 부탁하오.” 

    “봐서 알겠지만, 지금 모든 작업실을 쓸 수가 없소. 그나마 하나를 먼저 고치고 있지만, 저곳은 선약이 되어 있소.” 

    “선약? 성석의 세공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오! 먼저 해주시오!” 

    “붉은 망치 일족은 순서를 어기고 의뢰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소.” 

    “무슨 개 소리를!” 

    쾅! 

    바이렉이 테스테일은 위협하듯 크게 발을 굴렀다. 

    “당신네들이 누구 덕에 이 땅에 살고 있는데! 순서는 무슨 순서! 당연히 우리 이오칼의 의뢰부터 해야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선약이 있다고 하잖소. 왜 그렇게 몰아붙이는 거요?”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다시 내가 앞으로 나오자, 바이렉이 얼굴을 나무껍질처럼 굳어졌다. 

    “이 땅은 우리 이오칼의 것! 그것을 이 드워프들에게 빌려주는 대가로 의뢰를 하는 것이다!” 

    “내가 반말 하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내가 그 선약자이니, 끼어들 자격이 있는데?” 

    바이렉은 내 말을 듣고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나와 아린을 쏘아보았다. 

    “어느 왕국의 귀족인가 본데, 후회 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어디 한 번 해봐. 데이카 백작가의 2남 바이렉 데이카.” 

    “으음...” 

    내가 자신의 계급까지 알면서도 물러나지 않자, 바이렉이 굳은 듯 멈춰버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무슨?” 

    “당신들이 모시는 여신은 질서의 여신 샤브렌이잖아.” 

    “그게 어쨌다는 거지?” 

    “질서의 여신을 모신다는 성기사가 대놓고 새치기를 하려하는 게 너무 웃기잖아. 크하하.” 

    “큽.” 

    내 말에 뒤에서 눈치를 보던, 기라녹스가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가, 감히!” 

    “질서의 여신께서 말씀하신 아홉 구절 중 일곱 번째가 ‘모든 것은 순리대로 돌아가니, 자신의 순서를 지켜라.’아니었나?” 

    “윽...” 

    여신의 구절까지 나오자, 바이렉은 할 말이 없는지, 마른 침을 삼켰다. 

    “이야, 대놓고 여신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기사가 성시가단의 부단장이라니, 대단해!” 

    “빠드득.” 

    바이렉은 눈에 핏줄을 새운 채로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일곱 번째 구절은 주인공이 써먹게 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구절인데 이렇게 써먹다니, 참 재밌는 일이다. 

    “뭐 더 할 말 있으신지?” 

    “대체 네...” 

    “바이렉 경...” 

    바이렉과 눈싸움을 하고 있을 때 마을 입구 쪽에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이렉 경. 이제 그만하세요.” 

    분홍 머리색에 작은 체구, 성녀 이레아가 얼굴을 붉힌 채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서, 성녀님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 저분의 말씀이 맞아요.” 

    “성녀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무례했던 것 같습니다.” 

    이레아는 작지만 미안한 감정이 듬뿍 담겨있는 목소리로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좋아한다. 저렇게 예의바르게 나오니 나도 당연히 예의를 차려주었다. 

    “다만 저희에겐 급한 사정이 있습니다. 조금만 양보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도 급한 사정이 있는 지라...”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저도 제 목숨뿐 아니라, 꽤나 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습니다.” 

    “감히 성녀님을 농락하는 것인가!” 

    정말 사실만 이야기 했는데, 바이렉과 성기사들은 내가 성녀를 놀렸다고 생각했는지, 여신 이야기를 했을 때보다 더욱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바이렉, 당신은 대표가 아니잖아. 빠져있어.” 

    “이, 이!” 

    “성녀님. 무슨 일이 터졌는지 자세하게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분통을 터트리는 바이렉을 무시하고 이레아만을 쳐다보았다. 

    “그, 그게...”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성녀님. 저는 크라시스 왕국 록스 후작가의 유렌 록스라고 합니다.” 

    “록스...” 

    “유렌 록스!” 

    록스라는 말에 바이렉은 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찡그렸고, 이레아는 감탄을 터트리고, 볼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내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저, 정말 유렌 록스님이신가요?” 

    처음에 그녀의 정보를 봤을 때 나에 대한 호감도가 꽤나 높은 것을 발견했다. 

    그건 분명히 내 소문을 들었기 때문 일거다. 그것도 내 마지막 소문을. 

    “쌍놈의 언데드들을 물리치고 북벽을 되찾으신 유렌 록스님?” 

    수줍어하고 조용히 말하던 어여쁜 입술에서 과격한 욕이 튀어 나왔다. 

    “언데드 학살자라고 불리시는 유렌 록스님?” 

    수줍음 많은, 아니 많았던 성녀는 언데드에 이미 눈이 돌아가 버렸다. 

    “유렌님. 개 쓰레기 같은 언데드들을 소멸시키고, 마계화 된 땅을 정화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마계화?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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