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락토르의 강철 성벽]
“역시! 능력의 이름을 성벽으로 지은 이유가 있었어.”
성벽이라는 것은 한 번 지어놓으면 무너지기 전까지 외적으로부터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락토르의 강철 성벽 역시 한 번 발동을 시키면 알아서 외부의 정신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편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 방어 능력만큼이나, 상시 적용도 엄청난 건데.”
세뇌나 최면, 현혹 같은 정신 공격을 갑자기 당하게 되면 본래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술자의 인형이 될 뿐이다.
하지만 강철 성벽의 능력은 상시적용이기 때문에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일은 절대로 없어보였다.
“강철 성벽만 발동하고 있으면, 세피로스에 있는 그놈에게 당할 리도 없고, 옷을 찾으러 갈 수도 있고. 대박이네.”
검술 같은 거라면 평생을 수련을 해야겠지만, 보조능력이라 그런지 30분도 되지 않아서 마도서 2권의 능력을 모두 흡수해 버렸다.
“그럼 바로 다음으로 갈까? 아, 그전에...”
주머니에서 신살수의 어금니를 꺼내서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아그네스.”
[응?]
“너 재질변환 가능하지.”
[당연한 걸 뭘 물어.]
“그럼 이 재질로 변할 수 있어?”
아그네스를 탁자위에 있는 신살수의 어금니에 가져다 대었다.
[...]
“못 하지?”
[이, 이건 내게 등록되지 않은 건데, 굉장히 희귀한...]
“알겠다. 알겠어.”
[으으...]
솔직히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이 어금니가 맞아.”
나의 첫 번째 죽음, 그곳에서 기린에게 사용했던 붉은빛의 암기는 분명히 이 신살수의 어금니로 만든 거다.
기린과 만날 수도 있고, 무언가가 꼬여서 안 만날 수도 있지만, 먼저 만들어 놓아야 할 것 같다.
내 죽음에서 보았던 암기가 아니라, 다른 것을.
“바로 가도 되겠네.”
기라녹스에겐 내일가려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짧은 시간에 마도서의 능력 개방이 끝나서 바로 공방으로 이동했다.
“험.”
기라녹스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로 화로를 손질하고 있었다.
“청소 열심히 하네.”
“대공자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기라녹스는 얼굴에 새까만 재를 묻힌 채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잘 다녀왔지. 좋은 거 많이 받아 왔다.”
“네? 좋은 거요?”
쿵.
어리둥절해 있는 기라녹스의 앞에 신살수의 어금니를 꺼내놓았다.
“이, 이게 뭡니까?”
기라녹스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어금니를 쳐다보았다. 무슨 물건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예전에 존재했던 무서운 짐승의 이빨이야. 이거 다룰 수 있을 것 같아?”
“지, 짐승이요? 무슨 짐승이기에 이빨이 이렇게...”
짐승 이빨이라는 소리에 기라녹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음...”
그래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어금니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만져도 됩니까?”
“당연하지.”
“아...”
기라녹스는 기다렸다는 듯 이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금니를 쓰다듬는 기라녹스의 눈빛은 깊은 호수를 보는 것 같았다.
“어때 이걸로 내가 원하는 형태의 무기를 만들어 줄 수 있겠어?”
“지금 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좀 살펴보고 시험해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전체적으로 어금니를 잠시 살펴본 기라녹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기라녹스는 내가 본 인간 장인 중에선 최고의 재능과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녀석이 할 수 없다면 깍쟁이 같은 드워프들에게 찾아가서 부탁을 해야 한다.
“그렇겠지. 그럼 저녁에 다시 올게.”
“네? 오늘 저녁은 조금 빠른데요.”
“아, 그거 다시 내가 가져가야 해. 훔치러 오는 놈이 있을 지도 모르거든. 가져갔다가 내일 다시 줄게.”
“역시 엄청 귀한 거군요. 조심히 다루겠습니다.”
이곳은 후작가라 직접적인 공격은 없을 테지만, 혹시나 하는 일이 있을지 모르니 기라녹스에게 맡겨 둘 순 없었다.
“이따가 다시 올게.”
“아, 네!”
저녁까지 수련이나 할 셈으로 공방을 나와서 제4연무장으로 향했다.
“음?”
제4연무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기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제4연무장에서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수룡기사단이네.”
안에 있는 사람은 얼마 전 출정에서 만났던 수룡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인연이 많은 렉카가 눈에 들어왔다.
“대공자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렉카와 다른 기사들이 내게 와서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 말없이 고개를 까딱 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래. 잘 다녀왔어.”
렉카와 기사들은 내 앞에서 오줌이라도 마려운 것처럼 쭈뼛거리고 있었다.
“근데 수룡기사단의 개인 수련은 2연무장이나 3연무장에서 하지 않나?”
“아, 그냥 4연무장에 한 번 와보고 싶었습니다.”
“네. 그냥 한 번.”
이들이 왜 4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것 같아서 빙긋 웃었다.
“렉카.”
“네?”
“대련이나 하자.”
내 입에서 대련이라는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렉카와 기사들이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때?”
“아, 하겠습니다.”
렉카는 무기고에 가서 수련검을 가지고 왔고, 나는 아그네스를 날이 없는 단검으로 변화시켰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 단검이 내 진짜 무기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단검을 쓰는 것을 무시라고 생각할까봐 말해본 거였는데 렉카는 긴장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자.”
“먼저 가겠습니다!”
쿵!
렉카가 수련검을 세워서 그대로 내게 돌진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왼쪽으로 빠져서 그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탁!
“윽!”
렉카는 수련검을 휘둘러 간신히 내 발을 막았지만, 힘에 밀려서 두 걸음 뒤로 밀려났다.
“내가 예전에 네게 했던 행동들...”
렉카의 뒤를 노리면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렉카는 내 말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착실하게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염치도 없이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 네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또 다른 상처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
후우웅!
퍼엉!
“큭!”
렉카는 직사를 사용해서 던진 단검을 막으며 참고 있던 신음을 터트렸다.
챠앙!
수련검과 충돌해서 공중으로 띄워진 단검을 바로 회수했다.
“음...”
렉카는 아직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소룡지보를 이용해서 렉카의 뒤로 이동한 뒤 그의 목에 단검을 겨누었다.
“네가 날 원망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어도 좋아. 다만 네 얼굴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싶다. 이건 내 진심이다.”
렉카의 목에 대고 있던 단검을 떼면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내가 한 일은 아니었지만, 렉카들이 먼저 다가와 줬기에 이들이 입은 피해를 도와주고 싶어졌다.
“졌습니다.”
렉카는 졌다는 말을 하며, 내게 고개를 숙인 뒤 잠시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래.”
고개를 들어 올린 렉카는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배에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쩌다보니 감사 인사도 하지 않고 어영부영 지나갔지만, 제대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렉카는 다시 고개를 숙였고, 같이 있던 기사들도 내 앞으로 달려와서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이었어. 감사를 받을 필요도 없어.”
“왠지 그렇게 말씀하실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제 얼굴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익숙해 졌습니다.”
렉카의 말을 듣고, 그의 상처를 더욱 치료해주고 싶어졌다.
신성력을 사용해서 상처를 치유해도 자국은 남는다. 저런 상처를 지우려면 특별한 물건이 필요하다.
“대공자님. 저와도 대련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지금 내게 말을 건 베손 역시 수련기사 시절에 유렌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이었다. 베손과 대련을 한 후에도 나머지 기사들과 대련을 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록스 후작가에서 망나니 유렌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버리겠다고.
**
“허.”
저녁에 다시 공방으로 가니, 기라녹스가 멍하니 앉아서 어금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의 입에선 침까지 질질 흐르고 있었다.
“너 뭐하냐?”
“아, 대공자님.”
깜짝 놀랐는지, 기라녹스는 흐르는 침을 슥 닦고 번개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모르겠지?”
“아뇨. 알았습니다.”
“뭐?”
“제가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엉?”
기라녹스는 못한다는 소리를 하면서 여태까지 보였던 표정 중 가장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이빨이라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지 물건인지 알았습니다. 이건 이곳에서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만일 할 수 있다고 쳐도 그건 이 녀석에게 엄청나게 큰 죄를 짓는 겁니다.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장인이 손을 대야 합니다.”
기라녹스는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만약 그냥 여기서 만들라고 하면 내게 달려들 기세였다.
“화력의 문제인가?”
“화력에도 문제가 있고, 제 실력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기라녹스 조차 다룰 수 없다면 인간 쪽 장인을 찾는 것 보다, 드워프를 찾아가는 것이 훨씬 빨랐다.
“제 고향이라면 이 물건을 다룰 충분한 화력도 나오고, 이걸 제련 할 대단한 장인 분들도 많이 계세요.”
미리 생각해둔 곳으로 가야하나 생각할 때 기라녹스가 입을 열었다.
“아스 성에 그렇게 뛰어난 장인이 많아? 거긴 그냥...”
“아, 제 고향은 아스성이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기라녹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사부에게 매일 혼났다고 했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기라녹스를 혼낼 정도라면 이름이 알려진 장인이 확실했다.
“그럼 네 고향이 어디지?”
“피메라 산이라고 아시나요?”
“어?”
모를 수가 없다. 방금 내가 찾아가려고 생각했던 곳이니까.
드워프의 마을은 많지만, 크라시스 왕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피메라 산에 있는 드워프들의 마을이었다.
“그런데 거긴 인간이 아니라...”
“알고 계시나 보네요. 맞아요. 그곳엔 드워프들이 살고 있죠.”
“드워프들만 살고 있는 곳이잖아.”
“제가 어렸을 때 그 산에 버려져서 사부님이 키워주셨어요.”
“그럼 네 사부님이...”
“네. 드워프시죠.”
“허...”
기라녹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내겐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기라녹스가 드워프의 제자라면 앞으로의 일들을 훨씬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기라녹스의 사부는 인간이 아니라, 드워프라서 기라녹스의 실력을 가지고 구박한 거였다.
“그럼 산은 왜 내려 온 거야?”
“이제 다 컸으니,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고 하셔서요.”
기라녹스는 인간이니까, 인간들과 어울려서 살라고 배려를 해준 듯싶다.
“어찌됐든 싸워서 내려 온 건 아니지?”
“네? 당연히 아니죠. 제가 어떻게 감히...”
그렇다면 기라녹스를 데려가면 드워프들에게 부탁도 편하게 할 수 있고, 기라녹스도 성장 시킬 수 있는 1석 2조를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피메라 산에 가자.”
“네. 그래야 해요. 이 이빨은 최고의 장비와 최고의 장인의 손에서 다뤄져야 해요.”
기라녹스는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어금니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건 그렇고 너 예전이랑 다르게 판단이 엄청 빨라졌네. 예전 같으면 잘 모르겠다고 꽤나 시간 끌었을 텐데.”
“저도 표현하기는 힘든데, 대공자님과 만난 이후에 제 능력이나 실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됐어요.”
“능력?”
기라녹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네. 피메라 산에 있을 때는 워낙에 뛰어난 장인들이 많아서 구박만 받고, 아스성에서도 장사가 안 되서 침울 했었는데, 대공자님이 제게 재능이 있다고 계속 응원해 주셨잖아요. 그 때부터 제 능력과 수준에 대해 좀 알게 됐어요.”
만족스레 웃는 기라녹스의 표정은 예전과는 자신감이 엿보이고 있었다.
“너 설마...”
“네?”
[창조주의 눈이 발동합니다.]
[이름: 기라녹스]
[특성: 마병창조(魔兵創造), 화염친화lv3, 집중lv3, 정교lv2, 판단lv1, 감정lv1]
[호감도: 74(신뢰) ]
[현재 기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음. ]
판단과 감정?
기라녹스의 특성은 분명히 4개였다. 이전에 판단과 감정이라는 특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라녹스.”
“네?”
“내가 네 능력을 칭찬해주고 믿어줘서 요새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됐다고?”
“네. 그런 거 같아요.”
그럼 나 때문에 특성이 생긴 건가?
당연하겠지만 특성이라는 것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도서를 읽거나, 태어 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게 정말 이라면 나는 내 부하들을 엄청난 존재들로 키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 그런데 피메라 산은 언제 가실 건가요?”
“내일.”
“네?”
기라녹스가 자지러지게 놀라서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늘 돌아오셨잖아요.”
“그니까 내일.”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