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보고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축제 중인데다가 파티가 예정되어 있으니, 약식으로 진행 할 줄 알았지만, 국왕은 오 일째 정규 대면보고를 진행하고 있었다.
"후작님은 오늘 들어가셨지?"
"네. 오전에 들어가셨으니, 곧 나오시지 않을까요? 저희 영지는 딱히 문제 될게 없었잖아요."
페루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면 좋겠지만, 씨 서펜트나 샤크라이 킹 같은 몬스터들이 나온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있거든."
"에이, 설마요..."
살다보면 억울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트집을 잡으려면 어떻게든 잡을 수 있으니, 잘못한 게 없어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똑똑.
"유렌, 있느냐?"
귀신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단번에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후작의 목소리였다.
"네. 있습니다."
곧바로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었다.
"편하게 지냈느냐?"
"저야 편하게 보냈습니다만 후작님은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요."
후작의 다크서클은 영지에 있을 때 보다 2배는 짙어졌고, 얼굴은 광대뼈가 보일정도로 핼쑥해져있었다.
"폐하께 보고 준비를 하느라 잠을 못자서 그리 보일 거다. 그런데 준비한 것에 비해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게 끝났다."
"그렇습니까?"
"다른 영지보다 2배는 빨리 끝났을 거다. 다 네 덕이야."
후작은 내 어깨를 잡고 끌어안은 다음 내 등을 두드렸다.
"하하하! 설마 국왕 폐하 앞에서 네 덕을 보다니, 정말 내가 꿈을 꾸는 건지."
"제 덕이라니요?"
"폐하께서 우리 쪽에 일어난 일을 굉장히 자세하게 아시더구나. 특히나 네 활약을 말할 때는 박수까지 치시며 좋아하셨다."
"그렇습니까?"
"보고는 30분도 걸리지 않았고, 네 이야기만 1시간은 한 것 같아. 하하하!"
"하아..."
후작이 국왕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며 팔불출을 부리는 장면이 상상되기 시작했다.
"이 녀석아. 장난이다. 장난."
장난이라고 하지만, 후작의 표정을 보니 장난 같지가 않았다.
"아, 파티는 내일 저녁부터 시작이니, 미리 준비하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이 녀석은 아직도 예법에 서투르니, 페루 네가 잘 챙겨주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럼 난 가보마, 좀 쉬어야겠다."
"모시겠습니다."
후작의 방까지 따라가서 그가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본 뒤에 다시 내방으로 돌아왔다.
"내일인가..."
**
나와 후작은 흰색 바탕에 붉은 용의 문양이 조화롭게 섞인 거대한 문 앞에 서있었다.
"준비됐느냐?"
"네."
후작이 문 앞에 있는 위병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위병 8명이 문을 당기기 시작했다.
쿠궁.
문이 열리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을 빼곡하게 수놓고 있는 수십 개의 샹들리에였다. 무슨 마법처리라도 했는지, 성스러울 정도로 신비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들어가자."
"네."
파티장에는 이미 많은 귀족들이 자리를 잡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성들은 가지각색의 드레스와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자신들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남성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가문의 인장이 박혀있는 고귀해 보이는 예복을 입고 있었다.
"윌링턴 록스 후작각하, 유렌 록스 공자님 입장하십니다!"
우리가 파티장에 걸음을 내딛자마자, 안쪽에 있던 하인들이 후작과 내 이름을 귀족들에게 알렸다.
"모두가 너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늙었나 보다."
"설마요."
"봐라. 다 너만 보잖아."
후작의 말에 가볍게 대꾸를 하며 우리에게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옆을 보니, 일리아의 아버지인 레이언 마르쿠스 후작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자네는 더 훤칠해졌군."
"그럼. 누구아들인데!"
"또 시작이구나. 아들자랑. 하아..."
마르쿠스 후작은 록스 후작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일리아는 오지 않은 겁니까?"
숙소에 있으면서 계속 만나지 못해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아예 오질 않은 모양이다.
"자네 때문일세."
"네?"
"자네가 여기저기서 활약을 하고 다니는 덕에 그 아이가 자네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수련장에 박혀서 나오질 않는다네."
"하하..."
그녀는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승부욕이 강하다. 파티고 뭐고 수련하느라 바쁜 모양이다.
나중에 보면 장난 아니겠군.
"로페르 엘리온 공작각하, 카일 엘리온 공자님 입장하십니다!"
안으로 들어온 로페르 공작은 이전에 후작들과 만났었는지 간단하게 눈인사만 하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유렌! 자네가 북벽에서 활약해준 덕분에 폐하께서 심한 꾸중을 하지는 않으셨네.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제가 뭘 했다고..."
"하하하, 지금은 입장 중이니, 조금 이따가 못 다한 얘기를 나누자고."
공작은 계속 나와 말을 하고 싶어 했지만, 다음 사람이 입장할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타니우스 토른 공작각하, 켄 토른 공자님 입장하십니다."
토른 공작가가 입장하자, 모두가 숨을 죽였다. 토른 공작의 눈빛은 엘리온 공작가의 활기찬 느낌과는 정 반대로 한겨울의 북풍 같은 싸늘함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자신들에게 지정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제 오시겠구나. 준비하거라."
"네."
계급이 낮은 순서부터 입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남은 사람들은 왕족들뿐이었다.
구구구궁.
5분 정도가 지난 후 문이 부서질 것처럼 힘차게 열리기 시작했다.
"모두 예를 취해주십시오!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천장을 뚫을 것 같은 하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를 포함한 모든 귀족들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음."
안으로 들어온 국왕은 모두의 예를 받으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뭐지?
공주야 그 일이 있었으니, 오지 않은 게 이해가 가지만, 왕자 하나 없이 국왕 혼자 온 것은 예상 밖이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어서 2층에 앉아있는 국왕을 쳐다보았다. 짧은 금발, 떡 벌어진 어깨를 하고 있는 건장한 체구는 왕이 아니라, 기사라고 해도 어울릴 정도였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이름: 에거시스 브라이어드]
[특성: 위엄(威嚴), 통찰lv4, 매력lv4, 검위(劍威), 혈계 아공간]
[호감도: 51(상당한 호감) ]
[현재 기분: 대견함. 조금의 의문. ]
후작이나 공작이 한 말에 과장이 섞여 있을 줄 알았는데, 국왕은 정말로 나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해졌군."
거기다 국왕의 기분에 나타난 조금의 의문을 보니, 내 계획대로 된 모양이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왕실의 정식 파티이니,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모두가 똑같은 말을 하며 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
고개를 들어 올리며 국왕을 다시 쳐다 볼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국왕은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유렌님."
"안녕하세요. 유렌님."
다시 국왕의 상태창을 보려고 할 때 젊은 귀족들이 내 앞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유렌 공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유렌님."
"저는 펠트 남작가의..."
"잠시만..."
**
"피곤하지?"
"하아, 네..."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겨우 빠져나와서 후작 옆으로 갔다. 후작에게 계속 구해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후작은 못 본 척 하며 다른 테이블로 이동해버렸다.
"앞으로 자주 겪어야 될 일이니, 익숙해져야한다."
"정말 제 취향이 아닙니다."
"후후."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은 피곤하면서도 귀찮은 일이었다. 거기다 신분이 신분들이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어서 더욱 힘들었다.
"모두 즐겁게 즐기고 있는가?"
"폐하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지금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구경만하고 있던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알겠지만, 올해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소. 뛰어난 기사들이야 매해 나왔지만, 올해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능력자들이 많이 나와서. 더욱 기분이 좋소."
국왕은 2층에서 내려오면서 모두가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특별한 몬스터를 잡은 뛰어난 실력자도 있었고, 다른 지역의 위기를 도와준 용맹한 자도 있었고, 그 두 가지를 모두 해낸 사람도 있었소. 그래서..."
국왕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와 몇몇 젊은 귀족들을 쳐다보며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초대한 영웅들에게 왕실 보고를 열어주기로 결정했소."
"오오!"
"왕실 보고라니, 몇 년 만인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의 은혜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모두가 국왕을 찬양하고 있을 때 나는 왼쪽 구석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지우고 있는 베일 파비앙을 보고 있었다.
왕실 보고라는 말을 들은 베일의 눈빛은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거기다 그는 왕을 보고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
저자는...
베일이 보고 있는 자는 이번에 초대를 받은 궁사 다르 카스테인이었다. 나 정도는 아니었지만, 본 렉스를 잡아서 꽤나 큰 관심을 받은 사람이었다.
베일과 다르는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확실하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아하."
이제 정확히 알았다. 이 둘이 무슨 관계이고, 무슨 생각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모두 따라오라."
국왕은 파티장으로 내려와서 우리가 들어온 출입문으로 향했다. 귀족들은 홀린 것처럼 국왕의 등을 쫓았다.
"유렌, 이건 엄청난 기연이다."
"네?"
"왕실 보고에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무기나 방어구, 네가 익혔던 마도서나 기술서까지 많은 보물들로 가득 차있다."
후작은 왕실 보고를 본 적이 있는지, 굉장히 흥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폐하의 성격상 순서는 정하지 않을 테니, 달려가서 제일 좋은 것을 잡거라."
"제일 좋은 게 뭔데요?"
"음..."
내 말에 후작은 별로 필요 없는 고민을 시작했다.
"검은 네가 안 쓰니까, 단검이 있던가? 아니, 그러면 방어구가..."
후작이 고민을 하는 동안 국왕은 우리가 들어온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출입문에 도착해 있었다.
"후후, 여기가 왕실 보고일세."
보고를 열어준다던 국왕은 우리가 들어온 출입문 앞에 서있을 뿐이었다. 그 의미를 아는 귀족들 가볍게 미소 짓고, 모르는 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로카 라페크 일루인..."
국왕은 빙긋 웃더니, 문에 손을 가져다 대고 주문을 외웠다.
우웅.
국왕의 손에 닿은 문은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왕실 보고는 평소에는 아공간에 있다가, 국왕 폐하의 허가에 따라 현세에 나타나게 된다. 즉, 화장실 문이라도 국왕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보고로 향하는 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지."
"그, 그렇군요."
국왕의 특성인 혈계 아공간이 왕실 보고니,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후작의 설명에 놀라는 척하며 입을 벌렸다.
쩌적.
국왕이 온통 황금색으로 바뀌어버린 문을 가볍게 밀자,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
"오오..."
"대단해."
"여전히 아름답군."
모습을 드러낸 왕실 보고에는 무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석, 마도서, 이상한 재료나 가치를 전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무기들은 강철조차 가를 수 있을 정도로 예기가 넘쳐흐르고 있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보석들은 하늘의 별이라도 된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한쪽에는 고풍스러운 책들이 쌓여 있었는데, 모두가 평생가도 보기 힘든 마도서나 마법서였다.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유렌 록스, 켄 토른, 카일 엘리온, ... 베리트 레븐, 다르 카스테인 이렇게 12명일세."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국왕의 말에 이름을 호명당한 사람들이 앞으로 나왔다. 나 역시 그들과 줄을 맞춰서 보고의 입구에 섰다.
"모두 하나씩만 고르도록."
국왕의 말에 호명당한 모두는 기대감을 가지고 보고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냉정을 유지한 채 한걸음 뒤에서 베일과 다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 움직여 봐.
**
‘분명 이곳에 있어.’
베일 파비앙은 왕실 보고의 문이 열리자마자, 자신의 능력까지 사용해가며 보고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자신의 부하들을 왕실 파티에 초대되도록 만들었지만, 왕실 보고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에 무조건 얻어야해.’
왕실 보고는 국왕만이 열수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열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베일의 마음은 급박해졌다.
그의 시선은 이름 높은 명검에도, 아름다운 보석에도, 고대의 기예가 담긴 마도서에도 가있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보고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찾았다..."
베일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다. 왼쪽 구석 휘황찬란한 검이 있는 뒤쪽에 코끼리 상아를 2배 부풀린 것 같은 붉은 색의 ‘이빨’이 있었다.
저 이빨이 베일을 2년 동안 왕궁에서 지내게 한 이유였다.
베일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행히 자신 이외에 그 이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하등한 놈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 보고에 있는 무기 전체를 준다고 해도 절대 바꾸지 않을 물건이거늘.’
이곳에서 저 이빨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부하인 다르 밖에 없었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침착하게 다르에게 신호를 주었다.
"음."
베일의 신호를 읽은 다르는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 살펴보던 활을 내려놓았다.
다르가 이빨이 있는 왼쪽 구석으로 가려할 때 그보다 앞서서 움직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어?"
다르는 그 남자가 당연히 다른 것을 잡을 거라 생각했지만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빨을 잡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헉!"
혼이 빠질 정도로 놀란 베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
마찬가지로 넋이 나간 다르는 대체 누가 이빨을 잡은 건지, 핏발이 선 눈으로 남자의 등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빨은 잡은 남자, 유렌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난 이걸로 해야겠네. 뭔지는 몰라도 마음에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는 유렌의 눈에는 이빨의 모든 정보가 보이고 있었다.
[신살수(神殺獸) 글라디오스의 송곳니]
신수, 영물, 악귀, 정령같이 영력이 있는 존재를 잡아먹고 살았다는 계(界)의 짐승 글라디오스의 송곳니다. 송곳니에는 글라디오스의 살기가 깃들어 있어, 무기로 만든다면 신수와 영물, 악귀, 정령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신살의 속성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