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카메른 (51/241)

카메른

"자, 잠깐만요."

졸린 눈을 하고 있던 여자는 벌떡 일어나서 테이블 위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요."

"직접 봐."

블라인드 마우스에게 물린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아주 얇게 찢어진 상처를 내공으로 조여서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었다.

"사, 상처가 없어?"

"몇 번을 묻는 거야. 괜찮다니까."

"말도 안 돼. 블라인드 마우스의 이빨은..."

"감당된다니까."

"으..."

씩 웃으며 조금 전에 여자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니, 그녀가 내 손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찍!"

그녀의 반응을 즐기며, 눈앞에서 어벙하게 찍찍대고 있는 귀여운 쥐의 정보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블라인드 마우스]

시궁쥐에 비해 작은 20cm정도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 작은 체구, 밝은 털색과 통통한 꼬리로 굉장히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블라인드 마우스의 이빨에는 동물의 눈을 실명시키는 지독한 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여기서 이런 희귀한 놈을 보다니!

출정을 나갈 때 페루에게 구해달라고 했던 독 중에 하나가 블라인드 마우스의 독인데 아직까지도 구하지 못할 정도로 블라인드 마우스는 굉장히 희귀한 동물이다.

이런 녀석의 독을 공짜로 먹다니, 보통 행운이 아니다.

"간보기는 끝났으니, 이제 본론으로 가지."

귀엽게 찍찍대고 있는 블라인드 마우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여자를 보았다.

"이 아이는 가죽 장갑이나 신발조차 뚫어버리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어요. 거기다 그 이빨에선 눈을 실명시키는 지독한 독이 나오죠. 위험하신 행동이었어요."

"내 피부가 좀 단단하거든."

"음..."

피부를 단단하게 하는 기술이나 능력은 꽤나 흔하다. 그녀는 내 의도대로 내 능력을 피부 강화 정도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알겠어요. 말씀하신 대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어떤 정보를 원하시나요?"

"난 아직 네 이름도 모르는데?"

"아! 죄송해요. 경황이 없어서..."

여자는 다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당연하겠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름: 베로아]

[특성: 분석lv2, 재빠른 몸놀림lv2, 집중lv3 ]

[호감도: 0(중립) ] 

[현재 기분: 뭐하는 인간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당황스러움. ]

베로아의 정보를 다시 보니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겉으로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아직까지도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베스. 이 지부의 지부장입니다."

역시나 베로아는 자신의 본명을 말하지 않고, 가명을 쓰고 있었다.

"나는 발론이다. 다른 정보는 필요 없겠지?"

나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미리 준비한 흔한 가명을 사용했다. 

"물론입니다."

랙커드의 최고의 장점은 뛰어난 정보력이 아니다. 그들의 진정한 장점은 고객의 정보를 절대 팔거나 파헤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일 랙커드를 이용한 고객들의 정보가 빠져나간다면 작게는 가정불화에서 크게는 대륙에 전쟁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럼 필요하신 정보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혹시 카볼이라는 사람 알아?"

"카볼... 일단 저는 모르는 이름입니다."

생각 할 필요도 없이 바로 나오는 대답이다. 이런 점은 확실해서 편하다.

"그럼 첫 번째 의뢰다. 검술서나 체술서 같은 무서 중에 카볼이라는 저자가 쓴 책을 구해줘."

"카볼의 검술서와 체술서. 알겠습니다. 의뢰 받아드리겠습니다.

베로아는 테이블에 있던 백지에 내 의뢰를 차분하게 적어 내려갔다. 

"두 번째는 카렌스 백작, 포비앙 남작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

"카렌스 백작님과 포비앙 남작님은 지금 왕궁에 계시는 분들이군요."

"그런 건 모르겠고, 되나?"

"물론입니다."

카렌스 백작은 나랑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다. 랙커드의 보안이 특별하고, 내 얼굴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혹시나 하는 일이 발생할지 몰라 끼워 넣은 인물이다.

그 이후에도 남작 두 명의 이름을 추가해서 더욱 내 의도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상당히 많으시네요."

"이게 마지막이야."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입을 열었다.

"이름은 라시드, 나이는 20살, 아스 성 근처에 있는 리파마을 출신이다."

라시드, 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이젠 알아야겠다.

"이 자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아봐줘."

**

내가 의뢰한 게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베로아는 한 달 후에 다시 와달라고 부탁했다. 알겠다고 한 뒤 파랑새를 나와서 축제가 진행 중인 대로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는 모습에 나도 잠시 쉬어갈까 해서 바로 앞에 보이는 아늑한 분위기의 주점에 들어갔다.

테이블은 모두 차있었기 때문에 비어있던 카운터 자리에 앉아서 파랑새에서 마시지 못 한 흑맥주를 주문했다.

"자네, 그거 아는가?"

"또 네 딸이 귀엽다고 자랑할거냐? 이제 지겹다 지겨워..."

옆에 앉은 두 중년인들이 맥주잔을 시원하게 부딪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 딸이 귀여운 건 신께서 정한 사실이고,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왕국 파티야."

"갑자기 웬 왕궁 파티?"

"원래 왕국 파티에 고위 귀족이 나오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올해는 유독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

대화를 주도하는 딸 바보 중년인이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는 여기저기서 강한 몬스터들이 많이 나타났잖아. 그 몬스터들을 잡는데 활약한 사람들이 모두 초대 받았대."

"그럼 그곳에 그분도 오시려나?"

"그분?"

"오크 투사, 씨 서펜트, 샤크라이 킹을 잡은 최고의 신성. 유렌 록스님 말이야."

"아, 그 분이야 당연히 불렀겠지. 아마 그분이 처음으로 초대되지 않았을까?"

갑자기 내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 했다. 바로 옆에 있는 제 3자들에게 내 이야기를 듣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 조카가 북벽에서 복무하는 거 알지? 그 녀석이 부상 때문에 휴가를 받아서 잠시 돌아왔는데 유렌님 보고 인간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인간이 아니라고?"

"그래. 단검 하나를 던지면 몬스터가 무조건 한 방에 죽는다는 거야. 구울, 트롤, 오우거, 더블 헤드 오우거까지 모든 몬스터를 단검 한 자루로 녹여버렸대!"

"나도 듣긴 했는데 그거 당연히 뻥 아니었어?"

"나도 그녀석이 말하기 전에는 당연히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거짓말을 하는 얼굴이 아니야. 유렌님을 진심으로 신처럼 생각하더라고. 유렌님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서 빛이 나와."

두 중년인은 계속 내 활약을 이야기하며 옆에 있는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파티 얘기는 왜 꺼낸 거야?"

"아, 그게 본론이지. 유렌님이나 다르님 같은 영웅들에게 국왕 폐하께서 왕실 보고를 열어주신다는 소문이 있어."

"뭐?"

"요 몇 년 간은 한 번도 열린 적 없지만, 원래 폐하께서 나눠주는 거 좋아하시잖아. 이번에 영웅들을 많이 부른 이유가 보고를 개방해서 무기를 나눠주시려고 한다는 소문이..."

"흠, 그럴 가능성이 있기는 하겠지. 그런데 그거 소문이 아니라, 다 네 추측이잖아."

"으윽."

딸 바보 중년인이 정곡을 찔린 듯 어깨를 움츠렸다.

"하하하! 하여간 소문내는 거 무지하게 좋아하는 놈이야. 네 딸이 마을에서 제일 귀엽다고 소문내고 다니더니. 이젠 왕실 보고냐?"

"크하하하!"

두 중년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 번 시원하게 웃더니, 다른 화제를 꺼내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몇 년 간 열린 적 없는 왕실 보고라..."

갑자기 베일 파비앙에 대한 실마리가 보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마움에 두 중년인의 술값까지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왕실 보고에 내가 모르는 물건이 있다면?"

왕실 보고에 내가 모르는 희귀한 물건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었기 때문에 베일의 목적이 왕실 금고에 있는 물건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해놔야겠어."

술집에서 나와서 바로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의 정원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공자님!"

귀족들 사이에서 찔끔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던 페루가 나를 보고 잽싸게 달려왔다. 

"대체 어딜 가셨던 거에요!"

"바람 좀 쐬고 온다고 했는데 못 들었어?"

"들었죠. 그런데 왕궁 어디에도 계시질 않으시니..."

"왕도에 나갔다왔어."

"네?"

어이가 없다는 듯, 페루가 벙찐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런 때 혼자 나가시면 위험해요. 축제 같은 게 열릴수록 귀족들을 노리는 놈들이..."

"별 걱정을 다한다. 내가 그런 놈들에게 당할 거 같아?"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다."

페루가 무슨 의미로 내게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기 때문에 웃으며 녀석의 투정을 들어주었다. 

"그럼 들어가자."

"대공자님."

"응?"

페루가 나를 따라오지 않고 저물고 있는 태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가고 뭐해?"

"잠시만 따라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페루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예요."

페루가 걸음을 멈춘 곳은 정원의 서쪽이었다. 귀족은커녕 정원사나 하인도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이었다.

"여기가 어딘데?"

"대공자님을 찾으며 정원 전체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저 꽃이 뭔지 아시나요?"

"꽃?"

페루가 쳐다보고 있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태양처럼 화사한 주황색의 꽃 몇 송이가 단아한 자태를 뽐내며 피어있었다. 

솔직하게 모른다고 할까 하다가, 눈을 켜보았다. 

[카메른]

낮에는 햇살 같은 주황색, 밤에는 핏빛 같은 빨간색으로 색이 변하는 아름다운 꽃이다. 주황색일 때는 아무런 효능이 없는 향기로운 꽃이지만, 밤이 되어 빨간색이 되면 강력한 독성을 품게 된다.

"카메른이군."

"역시! 대공자님이십니다."

방금 알았지만, 나는 예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고, 책에서 본 거라 긴가민가했는데 대공자님이 확인해주셨으니, 확실하네요."

나를 찾다가 독화를 발견하다니, 페루도 보통 녀석은 아니다.

"자연적으로 핀 걸까요?"

"글쎄다."

일단 정원사가 알고 심은 것은 절대 아니다. 다른 꽃들은 수백송이가 줄을 맞춰서 심어져 있지만, 카메른은 12송이만 피어있었으니까.

"밤에 정원 일을 할리는 없을 테니, 정원사는 카메른의 독성을 발견하지 못 했을 거야. 아마 구석이고 예쁘니까 낮에 모양만 맞춰놨겠지."

누가 노렸을 수도 있고, 자연적으로 피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페루야, 일단 두 송이만 뽑아."

태양이 산 밑으로 숨어가려고 할 때 페루에게 말했다.

"네? 아직 주황색이라, 지금 뽑으면 독성이 없는데요."

"알아. 그래서 뽑으라는 거야."

카메른은 주황색일 때 뽑으면 아무런 독도 없는 꽃일 뿐이지만, 내가 뽑으라고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알겠습니다."

페루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내 말대로 두 송이의 카메른을 뽑았다. 

"와! 색이 변하고 있어요."

잠시 뒤 해가 완전히 저물자, 카메른의 색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햇빛 같았던 꽃의 색이 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나머지를 뽑을까요?"

"그래."

페루는 주머니에서 장갑과 마스크를 꺼내서 빨간색 카메른을 조심스럽게 뽑기 시작했다. 

"지금 드릴까요?"

"아니, 네가 보관하고 있어."

"넵."

페루는 뽑은 카메른을 따로따로 감싸서 자신의 독초 주머니에 넣었다. 

"놀라지 말고 들어. 지금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거든."

화단을 쳐다보면서 별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입을 열었다.

"크헉!"

페루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려고 했지만, 내가 페루의 어깨를 잡고 막았다.

"와, 왕실 정원에서 꽃을 딴 게 알려지면 저 처형되는 거 아니에요?"

겁에 질려서 덜덜 떨고 있는 페루의 등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싱긋 웃었다.

"괜찮아. 이거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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