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메라
"왕궁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몬스터와의 전쟁이 끝났으니, 왕궁에서 보고식 겸 축제가 열릴 걸세. 자네 아버지도 매 년 참석했을 텐데. 모르는 건가?"
"아!"
"이제 기억났나 보군. 원래는 지금 쯤 열려야 했지만, 우리가 북벽을 탈환하는 것 때문에 연기 됐다네. 조만간 날짜를 다시 잡아서 연락이 갈 걸세."
로페르 공작의 말을 듣고 나니 생각이 났다.
몬스터들과의 전쟁이 끝난 뒤 국왕이 영주들을 초대해서 보고를 받고, 그 후 왕도에 성대한 축제를 개최한다.
축제 중에 왕궁에서 왕족과 고위 귀족들이 모이는 파티가 열리는데, 그 파티엔 한 해 동안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기사나 문관들도 초대를 받는다.
공작은 내가 그 파티장에 불려갈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자네는 무조건 왕궁의 파티에 가게 될 걸세."
"설마요. 그리고 가더라도 조금 부담스러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아! 부담이라니, 영광이지. 자네의 신기에 가까운 능력을 국왕폐하께서 직접 인정해 주실 텐데. 거기다 큰 선물을 주실 지도 모르고."
돈은 넘치도록 있고, 아그네스가 있기 때문에 뭘 받아도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거기다 영광이라니, 이들에게 국왕은 하늘이겠지만, 현대에서 살던 내게 국왕은 그냥 사람일 뿐이다.
"공작 각하. 성문 보수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성문 쪽에 있던 공작의 부관이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음, 미안하지만 가봐야겠네. 연락을 해 놨으니, 곧 마탑에서 나올 게야."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고맙다는 말은 내가 자네에게 해야지. 나중에 왕궁에서 보세."
로페르 공작은 손을 휘젓고선 부관과 같이 성문 쪽으로 향했다.
"음, 그럼..."
주변을 둘러보다가, 오늘 나와 같이 다녔던 신관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유렌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신관은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다가 내가 오자,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신관님이 고생 많으셨죠. 지금도 일하고 계시잖아요."
"하하, 그래도 앞에서 싸우시는 분들이 가장 힘들죠."
누가 신관 아니랄까봐, 말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사르르 녹이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주변에서 사악한 기운 같은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곳에서 말인가요?"
"네."
신관은 정신을 집중하려는지,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이 주변에서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잠시 뒤에 눈을 뜬 신관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신관님들은 주변에 숨어있는 악령이나 마물들을 찾으실 수 있습니까?"
"힘을 개방하고 있는 하급의 악령이나 마물들은 멀리서도 느낄 수 있지만, 힘을 숨기고 있는 고위급들은 알아채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지금 포메라는 바로 신관과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둥둥 떠 있었다. 영체화까지 해서 힘을 최대한으로 숨기고 있다보니,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미숙한 저와는 달리, 고위 신관분들이나 감이 좋으신 분들은 상위의 악령들도 찾아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혹시나 흑마법사가 숨어있지 않을까 걱정해서 물어보신 거죠? 끝까지 마음을 놓지 않고 해결하시려는 모습 존경스럽습니다."
"아, 아니에요."
이 신관은 나랑 같이 다녀서 그런지, 내게 엄청난 신뢰감을 보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줄 것 같은 느낌이다.
신관은 티끌하나 없는 미소로 웃고서 다시 환자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고위신관이 신성력을 쓰는게 아닌 이상 포메라의 정체가 들킬 일이 없다는 소리에 마음이 편해졌다.
계획대로 포메라를 내 마법사로 써도 될 것 같았다.
신관과 대화를 끝낸 뒤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던 아린에게 다가갔다.
"별일 없었어?"
"대공자님이 언데드들을 쓸어버리시고, 홀로 흑마법사까지 찾아가셨는데 별 일이 있을 수가 없죠."
아린은 조금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제대로 싸워보지 못 했던 것이 불만이었나 보다.
"하하, 미안해. 그래도 네가 잡고 있던 녀석들은 건드리지 않았어."
"그게 아닙니다. 제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공자님이 강하신 것은 잘 알지만,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흑마법사의 거처를 찾아가시다니요. 너무 위험했습니다."
아린은 제대로 싸우지 못해서 불만을 가진게 아니라, 내가 혼자 흑마법사를 찾아간 것에 화를 내고 있었다.
"아..."
아린이 바뀌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주제넘은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아니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 그럼..."
아린은 그 말을 하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이제야 부끄러운 모양이다.
"혼났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을 해줬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저 녀석은 뭐하는 거지."
콜린은 성벽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서 자신의 검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온 보람이 있었어?"
"집에서 혼자 검을 휘둘렀던 것 보다야 낫지만, 형님이 혼자 다 잡고 다니시는데 제가 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콜린 역시 아린과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녀석의 어조는 아린보다 훨씬 평온했다.
"저와 형님의 실력 차이를 느낀 것으로도 온 보람은 충분했습니다. 기사학교에서 검으로 저를 가지고 놀았지만, 역시 검이 주무기가 아니셨군요."
콜린은 내 허리에 꽂혀 있는 비수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 진짜는 이 녀석들이지."
비수를 하나 뽑아서 콜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백발백중으로 단검을 던지는 것도 놀랐지만, 전장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신비로운 이동술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콜린은 소룡지보를 말하고 있었다. 아린에게 창피하다고 들었던 소룡지보는 이제 콜린조차 신비롭다고 생각할 정도의 기예가 되어 있었다.
"형님과 저 사이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바위에 앉아 있던, 콜린이 일어나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형님을 목표로 잡고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콜린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다른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저렇게 까지 변하다니, 괜히 검제를 이어 받은게 아니라는 건가."
내가 유렌의 몸에 들어 간 것처럼, 콜린의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간 것 같았다.
"나 때문인지, 다들 변해가는군."
**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마법사들의 워프를 받아서 후작가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부상자들에게 치료 조치를 한 후 바로 후작을 찾아갔다.
"유렌! 정말 수고 많았다!"
후작은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근한 반응이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로페르 공작님께서 네 칭찬을 어마어마하게 하시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분이 그 정도로 말씀을 하시다니, 네가 정말 엄청난 활약을 한 모양이야."
로페르 공작은 바쁘다더니, 어느새 통신마법으로 후작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다. 후작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원래 귀족들은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거든. 특히나 자신보다 낮은 계급이면 신경도 쓰지 않지. 그런데 로페르 공작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 얘기만 하더구나. 네가 정말로 마음에 들으셨나 봐."
후작은 로페르 공작에게 내 칭찬을 들은게 너무 기뻐서 자신의 감정을 주체 못하고 있었다.
"하하..."
"예전에 마르쿠스 후작도 그렇지만, 공작님까지 네 칭찬을 하고 있으니 내 어깨가..."
이대로라면 후작의 수다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일단 그를 진정시킨 뒤 보고를 시작했다.
"북벽의 탈환은 성공했습니다. 저희 쪽 부상자는 15명, 다행히 모두 경상자입니다. 치료를 받도록 조치 해놨고, 나머지 인원은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 했습니다."
"그래. 잘했다. 부상자들은 내가 직접 보러가야겠구나."
바로 부상자를 보러 간다는 것을 보니, 역시나 후작은 아래 사람을 챙길 줄 아는 지도자였다.
"아, 잊기 전에 말해두마. 조만간 나와 같이 갈 곳이 있다."
"왕궁에 가는 겁니까?"
"역시 알고 있었구나."
후작은 나와 같이 왕궁에 간다는 것이 기쁜 건지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벌써 날짜가 정해졌습니까?"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만, 너를 데려오라는 소리는 얼마 전부터 와 있었다."
"네?"
"오크 투사에 샤크라이 킹, 씨 서펜트까지 네가 잡은 몬스터들의 이름이 중앙까지 퍼진 모양이다. 국왕 폐하께서 꼭 너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
"아..."
"거기다 로페르 공작께서도 이번 일을 여기저기 소문내고 계시는 것 같으니, 널 데려가지 않으면 내가 쫓겨날지도 몰라. 후후."
자신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 후작이 히죽 웃기 시작했다. 내가 칭찬을 받고 관심을 받는게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그래. 날짜가 정해지면 바로 알려주마."
"그럼. 가보겠습니다."
후작에게 인사를 한 후 바로 내 방으로 향했다.
"일단 녀석부터 불러올까."
마법 주머니에서 포메라의 혼의 구슬을 꺼냈다.
[주인.]
혼의 구슬을 꺼내자마자, 귓속으로 포메라의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집에 도착했으니, 이쪽으로 와."
[알겠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구석에서 회색 먼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잠시 뒤 먼지 구름에서 보라색 로브를 걸치고 나무지팡이를 들고 있는 조그마한 해골마법사가 나타났다.
"여기가 주인의 집인가?"
"큭. 그 모습 괜찮네. 전혀 리치론 안보여."
귀엽게 생긴 해골 마법사는 포메라였다. 집에서 리치의 모습을 할 수는 없으니, 포메라는 어제보다도 작아진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도 미쳤다는 소리 좀 들어봤지만, 주인 만큼은 아니다. 후작가의 자제가 리치를 협박해서 부하로 받다니, 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가."
"음모는 무슨."
음모까진 아니어도 재미있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포메라를 리치로 타락 시킨 녀석들에게 역습을 할 계획을.
"정말 주인이 원하는 것이 뭐냐."
"말했잖아. 너를 내 개인 마법사로 쓴다고, 앞으로 많이 굴려줄 테니 준비 단단히 하고 있어."
"정말 제 정신이 아니다."
포메라는 여전히 믿기 힘든지, 작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근데 너 말투가 왜 이렇게 딱딱하냐? 아깐 말 잘했잖아. 연기도 해놓고 왜 이래?"
"지금 모습 때문인 것 같다."
귀찮아서 포메라가 반말을 해도 놔두려고 했는데, 작은 해골이 되고선 말투자체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뭐지?"
"주인의 능력은 언데드의 영혼까지 제거 할 수 있는 것이냐?"
"잘 알고 있네."
"대체 무슨 능력이냐."
포메라는 궁금증이 커졌는지, 눈구멍에서 푸른 불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말해줄 수 없지. 그래도 시험해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나도 궁금하긴 하거든. 혼의 구슬에 영혼이 담긴 리치에게 내 힘을 쓰면 어떻게 될지."
"으윽..."
포메라는 겁을 먹었는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내 눈을 피해서 바닥을 보았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네가 검은 구슬에서 마력을 조금 더 뽑은 상태였다면 바로 죽였을 거야."
"주인은 그 구슬이 뭔지 아는 건가?"
"그래."
내 말에 깜짝 놀랐는지, 바닥에 앉아 있던 포메라가 갑자기 내 앞으로 달려왔다.
"2년 전 숙소에 돌아왔을 때 샀는지, 받았는지, 주웠는지 조차 기억에 없는 구슬과 책을 손에 들고 있었지?"
"그, 그걸 어떻게..."
"넌 이용당한 거야."
인간의 탈을 벗고, 비어버린 안구에 푸른 불꽃을 켜고 있는 포메라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구슬은 저주이자 봉인이다. 타락한 네 영혼을 씹어 먹고 풀리는 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