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알고 있어
우리가 벽 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쿵.
쿵.
쿠웅.
로페르 공작과 다른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기도 전에 벽 안쪽에서 언데드 몬스터들이 나오고 있었다.
"크르르..."
"카아악!"
방금 내게 달려들었던 오우거, 오우거 보다는 작지만 민첩한 트롤, 곰의 몸에 늑대의 머리가 달린 베어울프까지 북쪽의 대형 몬스터들이 벽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저 몬스터들 뒤에 있는 검은 오라는..."
"어둠의 부활이란 마법으로 되살아난 놈들입니다. 예상대로 이번 사건의 원흉은 고위 흑마법사가 맞는 것 같습니다. 이정도 수준이라면 리치 이상이겠군요."
"역시 그런가."
로페르 공작 옆에 있는 마법사가 공작에게 몬스터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크르르."
"카그그그."
"키아악!"
몬스터들의 살점은 사정없이 뜯겨나가 있었고, 놈들의 등 뒤에선 악령처럼 검은색의 오라가 타오르고 있었다.
"키아악!"
"기기긱."
대형몬스터들뿐 아니라, 좀비, 구울, 해골병사들까지 나오고 있었다. 숫자를 보니, 이곳에서 총력전을 벌이자는 뜻 같았다.
"왜 덤벼들지 않는 거지?"
"술자의 명령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제 생각엔..."
공작과 말을 하고 있던 마법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는 내가 가진 능력 때문에 흑마법사가 경계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시간을 준다니, 우리에겐 잘된 일이군. 모두 전투 준비!"
"기사들은 모두 앞으로, 창병은 기사들의 바로 뒤에 위치하라!"
"신관들은 빛의 그물을, 마법사들도 미리 주문을 완성시켜주시오!"
"알겠습니다."
공작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내게 질문을 던지기보다 앞으로 일어날 전투를 위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흠..."
몬스터들의 숫자를 보니, 이곳만 뚫으면 일사천리로 북벽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의 스토리에선 샤브트라라는 몬스터가 나온다. 샤브트라는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는 언데드 몬스터로 소환사를 대신해서 언데드들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 유용한 몬스터다.
덕분에 주인공도 놈의 전략에 고생을 했는데, 멍청한 리치는 넘쳐나는 시간을 몬스터들의 덩치와 양을 불리는 데만 사용했다.
샤브트라 한 마리만 있어도, 우리는 상당한 고생을 할 텐데, 지금 이곳에 있는 몬스터는 지능이 모자란 뼈다귀와 근육돼지들뿐이다.
원래의 스토리보다 훨씬 많은 몬스터들이 나타났지만, 훨씬 쉽게 상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실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이 일의 배후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했다. 놈은 새로 얻은 아이템의 실험일 뿐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멍청함을 자위하고 있을 거다.
"크아아아!"
"키이아아!"
그 증거로 몬스터들을 아무런 전략도 없이 그대로 돌진시키고 있었다.
"마법사!"
"파이어 익스플로젼!"
"썬 플레어!"
"메가로 파이어볼!"
이미 영창을 마치고 발동을 준비하고 있던 마법사들의 양손에서 팔각형의 마법진들이 생성되었다.
콰과과과광!
콰아앙!
소태양처럼 타오르는 화염의 구들은 빛의 그물을 지나가면서 신성력을 머금고, 언데드 몬스터들을 터트려버렸다,
"크아아아!"
"키아악!"
"마법사 한 번 더! 기사들은 전투를 준비하라!"
동료의 죽음에도 언데드들은 두려움을 모르고 계속 달려들었다. 두 번째 마법까지 사용한 마법사들이 뒤로 빠지고 기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퍼억!
캬컁!
"키아악!"
어둠의 부활을 이용해서 되살아난 몬스터들은 생전의 습관을 따라간다. 즉 놈들의 전투방식은 생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리를 맡아."
"알겠습니다!"
"팔 제거 했습니다."
공작가의 기사들은 매 년 해왔듯이 조를 이뤄서 대형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어둠의 부활 덕에 몬스터들의 속도와 힘은 강해졌지만, 그건 축복을 받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작가의 기사들에게 대형 몬스터들을 맡기고, 지원을 나온 기사단은 일반 언데드들을 처리했다.
퍼억!
"키익!"
나는 전장을 돌며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구울만을 노렸다.
"쿠아아아아!"
"더블 헤드 오우거입니다."
"허어, 저 괴물 녀석까지 당했다니..."
더블 헤드 오우거는 이름 그대로 머리가 두 개 달린 오우거다. 일반 오우거보다 힘과 민첩성, 지능이 뛰어나서 잡기 쉬지 않은 몬스터다.
하지만 더블 헤드 오우거 역시 뒤에 불길한 검은 오라를 달고 있었다.
"쿠아아!"
더블 헤드 오우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외곽에서 구울을 잡고 있던 내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마음에 안 들겠지."
수정구슬로 이곳을 지켜보는 놈의 지시인지, 더블 헤드 오우거의 적의로 불타는 눈은 오로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그네스."
슈우욱.
아그네스를 엄지손톱만한 하얀색 쇠구슬로 만들었다. 움직이는 모습이 빛살 같다는 암기 백광환(白光丸)이다.
파앙!
백광환을 가운데 손가락위에 띄운 뒤에 그대로 튕겨냈다. 소림의 탄지신통(彈指神通)과 비슷한 사천당가의 암기술 일섬뢰(一閃雷)다.
슈아앙!
퍼억!
백광한은 백색의 궤적을 남기며 더블 헤드 오우거에게 날아갔다. 오우거가 양손에 들고 있는 몽둥이로 막기도 전에 백광환은 이미 놈의 복부를 뚫고 지나가버렸다.
"쿠아악!"
백강환에는 당연히 화골산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복부에 구멍이 뚫린 더블 헤드 오우거는 그대로 땅에 무너져서 움찔거렸다.
"쿠악..."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한 채 북쪽의 폭군이었던 더블 헤드 오우거가 녹아서 사라졌다.
만일 더블 헤드 오우거가 언데드가 아니었다면 저 터프한 놈을 잡기 위해 백광환이 아니라, 각종 독과 암기를 썼어야 했을 거다.
"언데드화 시켜줘서 정말 고마운데."
오우거를 언데드로 만들어준 리치 녀석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반 언데드들은 모두 쓰러졌고, 대형 몬스터 한두 마리만 남아서 발악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내 계획대로 움직일 때라고 생각했기에 공작을 찾아갔다.
"공작 각하."
"유렌! 정말 대단했네. 자네 덕분에 일이 정말 쉽게 풀리고 있어!"
공작이 양손으로 내 어깨를 만지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북벽으로 가실 겁니까?"
"그래. 지금 사기가 한창일 때 움직이는 게 좋을 거 같네."
"그럼. 저는 옆에서 따로 움직이며 주변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위험한 몬스터가 있으면 제거를 하며 가겠습니다."
"자네는 좀 전에도 위험한 병사나 기사들을 뒤에서 도와주었지.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내 겸손한 대답에 로페르 공작의 입가에 시원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에 대한 호감도가 신나게 상승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네. 믿어주십시오."
공작의 허락을 구한 뒤 우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지금부터는 모두 모여서 벽을 돌파 할 겁니다. 이대로 공작님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유렌님께서는 같이 가지 않으십니까?"
검을 정비하고 있던 키론 기사단장이 물었다.
"네. 저는 따로 움직이면서 위험한 몬스터들을 제거할 생각입니다."
"확실히 유렌님만 가능한 일이네요."
"키론 단장님, 카록스 단장. 기사와 병사들을 잘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몸조심 하십시오."
"대공자. 고생하시오."
키론의 진심이 담긴 인사와 카록스의 공허한 인사를 들으며 아린에게 갔다.
"아린, 카록스가 헛짓하지 않나 잘 봐."
"대공자님. 저도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여기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잖아. 네가 남아줘서 내가 혼자 움직일 수 있는 거야. 다른 사람들을 잘 챙겨줘."
"알겠습니다."
아린은 같이 가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믿는다고 말한 게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두침침한 동굴 안, 뜯어 먹다 만 것 같이 살점이 묻어 있는 뼈다귀들이 균형 있게 쌓아올려져 있었다.
우웅.
테이블같이 쌓여진 뼈다귀들 위에는 사람 머리통만한 수정구슬이 있었는데, 구슬 속엔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뭐, 뭐야. 이 미친놈은!"
수정 구슬 앞에는 보라색 로브를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구슬을 만지는 그의 오른 손은 새하얀 뼈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듀라한이 단검에 죽었다고? 이 무슨 개 같은..."
이번 언데드 사태의 원흉, 리치 포메라는 수정구슬 속에서 남자가 단검 하나로 듀라한을 죽이는 것을 보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대체 무슨 능력인지, 다시 봐야겠어."
포메라는 유렌에게 죽은 듀라한을 다시 소환하려고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계약이 지워졌다고?"
듀라한은 상급 언데드 몬스터다. 듀라한을 소환하기 위해선 계약을 해야 했는데, 듀라한과 자신이 맺은 계약이 사라져있었다.
"듀라한의 혼이 사라진 건가? 저 단검이 대체 뭐길래!"
포메라는 단검을 던지는 인간을 관찰하기 위해 몬스터들을 인간들에게 돌진시켰다. 구울, 해골병사, 언데드 오우거에, 더블 헤드 오우거까지 모든 언데드 몬스터가 그의 단검 하나에 사라져버렸다.
"저놈 대체 뭐야!"
남자가 활약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포메라는 확신했다. 저 인간은 일격에 언데드의 혼까지 날리는 위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저놈하고 만나서는 안 돼..."
포메라는 리치이기 때문에 혼의 구슬만 무사하다면 언제라도 되살아 날 수 있다. 하지만 저 남자의 단검에 맞는 다면 자신조차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 할 수가 없었다.
"계획과는 다르지만, 어쩔 수 없지. 이건 실험일 뿐이니까."
포메라는 인간들을 끝까지 놀린 후 사라지려 했지만, 단검의 남자와 만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필요한 물건을 챙긴 후 벽에 그려진 마법진을 만졌다.
위이잉.
마법진이 180도로 돌아가더니, 순식간에 포메라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인간들이 놀라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
포메라가 이동한 곳은 좀 전의 자신이 있던 던전의 반대편 은신처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등잔 밑이 어둡다’였기 때문에 시선을 끌기 위한 던전 뒤쪽에 자신의 은신처를 만들어서 숨겨 놓았다.
"어떻게 움직이는지만 보고 떠나야겠군."
여유를 가진 포메라는 다시 수정구슬로 인간들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는데, 갑자기 단검을 쓰는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괴물 놈 어디 간 거지?"
인간들을 관찰하고 있는 투명 잠자리를 아무리 돌려봐도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 인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체..."
삑!삑!삑!
"침입자?"
은신처의 입구에 달아놓은 알람마법이 울리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이 은신처의 입구에는 자신의 환상마법이 걸려있다. 다른 것보다도 환상마법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포메라이기에 그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저 괴물이 왜 여기 있는 거야!"
포메라는 재빠르게 수정 구슬을 돌려서 침입자를 살펴보았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자는 자신을 겁먹게 만든 단검을 쓰는 미친놈이었다.
"저놈이 어떻게..."
포메라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저 놈이 어떻게 여길 알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이곳에는 자신의 생명줄이 있었다. 저 놈이 오기 전에 생명줄을 가지고, 떠나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해 보였다.
"싸우는 건 최악의 수야. 제기랄, 어쩔 수 없지..."
포메라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포메라의 뼈가 모래처럼 사그라지면서 그의 로브가 땅으로 떨어졌다.
"후우, 이런 꼴을 하다니."
포메라가 선택한 방법은 이미 이곳을 떠난 척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뼈로 된 육체를 버리고, 자신을 영체로 전환했다.
혼의 구슬만 있다면 언제라도 부활을 할 수 있는 리치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었다.
저벅.
포메라가 영체화를 한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
남자는 땅에 떨어져 있는 보라색 로브와 그 위에 있는 수정 구슬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저 놈 뭐하는 거지? 서, 설마 나를 본 건가?’
포메라는 남자가 주변을 둘러볼 때 아주 잠시지만 자신을 쳐다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야, 눈으로도 보이고, 내공으로도 느껴지네. 좋구만."
남자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오른쪽 구석, 바위로 이루어진 벽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끄헉!"
그 장면에 너무 놀란 포메라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저 벽에 걸어 놓은 환상마법은 밖에 걸어놓은 환상마법보다도 한 단계 높은 마법이었다. 저렇게 보자마자 파악하는 것은 대마법사도 쉽지 않은 일이다.
"큭."
쿠궁.
남자는 포메라의 신음 소리에 빙긋 웃고서, 환상마법이 걸려 있는 벽에 손을 넣어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면서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네, 네놈이 어떻게 그 장소를!"
"그냥 보이거든."
"크으윽!"
쿠구궁.
포메라가 급하게 육체를 생성시키려고 했지만, 그전에 벽에서 3가지 물건이 튀어나왔다.
퉁.
인간의 피부로 표지를 만든 책과 어둠이 일렁이는 구슬 마지막으로 새하얀 구슬이 나왔다.
포메라를 비웃고 있는 남자, 유렌은 그중에 새하얀 구슬을 움켜잡은 뒤 육체를 갖추고 있는 포메라를 보며 씩 웃었다.
"네 썩은 영혼이 들어있는 구슬 치고는 색이 참 곱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