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실적 평가 (38/241)

실적 평가

파앗!

다시 한 번 세상이 바뀌었다. 

"여긴 또 뭐야..."

내 죽음을 보여주겠다고 하더니, 순식간에 알 수 없는 곳에 와있었다. 

"시간은 밤이고, 장소는 숲인가?"

지금 있는 곳은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숲이었다. 신기하게도 나무와 수풀에서 하얀색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일반적인 숲이 아니라, 어떤 전설을 품고 있는 영기가 가득한 장소 같았다.

"전혀 모르겠어."

당연하겠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파악이 되질 않는다.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나무들뿐이다. 

저벅.

그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있었다. 

미래의 내가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꿀꺽.

미래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자동으로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스쳐지나가 버렸다. 

"역시 보이지 않는 건가. 그건 그렇고... 왜 저런 것들을 입고 있는 거지?"

미래의 나는 번개가 그려져 있는 황금색의 방어구들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들의 능력은 딱 한 가지에 특화되어 있었다. 

"대체 뭐 하러 온 거야?"

무언가 생각이라도 하는 듯 천천히 걷고 있는 미래의 나를 뒤따라갔다.

따라가기를 한참, 자로 잰 것처럼 일정하던 걸음이 멈췄다.

"여긴..."

미래의 내가 멈춘 곳은 나무도 수풀도 없는 공터였다. 공터의 가운데에는 비석 다섯 개가 줄지어서 서있었는데 무슨 제단같아 보였다. 

"역시, 만지지 못하는군."

비석을 만져보려 했지만, 연기를 만지듯 스쳐지나간다. 이곳에서 나는 유령처럼 없는 존재였다. 

미래의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비석 앞에 서있을 뿐이었다. 

번쩍!

10분 정도 지났을까, 밤이 낮이라도 된 것처럼 하늘이 잠시 밝아졌다. 

눈부신 것을 참고 고개를 들자, 하늘 위에 번쩍이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저게 뭐야."

눈을 살며시 떠서 그것을 쳐다보았다. 

"설마..."

용의 머리에 곤의 비늘, 사슴의 몸통에 소의 꼬리를 가진  동양신화 속 환상의 동물 기린(麒麟)이었다. 

"기린이라고?"

나는 원래부터 신화속의 동물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서양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영물들을 소설 속에 넣어 놨었다.

하지만 기린의 역할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그저 어떤 곳을 수호하도록 설정해두었을 뿐이다. 

실제로 주인공은 기린을 보지도 못한다. 그런데 미래의 내가 왜 기린을 만나러 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다른 소리는 들리지만 미래의 내가 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미래의 나는 진지한 얼굴로 기린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기린은 별 반응 없이 미래의 나를 보며 공중에 둥둥 떠 있을 뿐이다. 

"기린은 전음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건가."

기린은 아무런 행동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미래의 나의 반응을 보니,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응? 뭐야."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미래의 나는 암기를 꺼내 들었고, 기린은 다시 번쩍이기 시작했다. 

"설마, 싸운다고? 저 신수랑?"

미래의 나는 거대한 우산살 같은 것을 생성 시켜서 땅에 꽂아 넣었다. 

콰르릉!

번쩍이던 기린의 뿔에서 뇌전(雷電)이 흐르기 시작했다. 

빠지지직!

그 뇌전은 미래의 나를 노리고 떨어졌지만, 거대한 우산살에 걸려서 그대로 땅으로 흘러들어갔다. 

지지직!

"피뢰침? 아그네스로 피뢰침을 만든 건가?"

기린은 계속 번쩍이면서 벼락을 떨구었지만, 피뢰침에 걸려서 모든 뇌기는 땅으로 흘러갔다. 

하늘의 벼락뿐 아니라, 땅에서 흘러넘치는 뇌기도 위협적이었지만, 미래의 나에겐 통하지 않았다. 

번개가 그려진 황금빛 장비들의 특징은 높은 수치의 뇌속성 저항력이다. 미래의 내가 입은 장비들이 땅에서 흐르는 기린의 뇌전을 모두 차단 시켜주었다.

지금 보니 미래의 나는 처음부터 기린과 싸울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 같았다.

슈아아아!

미래의 나는 붉은 빛이 도는 쇠말뚝을 꺼내서 기린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그것은 나와 기린사이의 가장 짧은 선을 이은 것처럼 기린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녀석의 몸을 꿰뚫어버렸다.

콰르르르릉!

기린의 몸에 박힌 쇠막뚝 평범한 무기가 아닌지, 기린은 고통으로 미쳐 날뛰면서 사방으로 뇌전을 뿌려댔다. 

하지만 피뢰침과 장비 덕에 미래의 나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빠지지직!

기린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 뇌전을 자신의 몸에 두르기 시작했다. 

번쩍!

섬광탄을 바로 앞에서 본 것처럼 세상 전체가 하얗게 변했다. 시린 눈을 참고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기린은 미래의 나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시발..."

옆에 가서 보니, 기린의 뿔이 나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잠시 후 기린 역시 출혈 때문에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고? 녹용에 찔려서?"

[재생 완료.]

[죽음을 보여주는 미래의 눈이 종료됩니다.]

팟!

"헉!"

앞에 샤크라이 킹의 거대한 몸체가 보였다. 나는 샤크라이 킹의 목을 베고 구슬을 주웠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후우..."

이게 왜 보상인지, 이제야 알 거 같았다. 이건 내게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미친 보상이군."

처음이라서 그런 건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보상이었다.

"기린이라..."

미래의 나는 기린을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노리고 만난 거였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긴장하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언젠가 내가 스스로 기린을 찾아가게 되는 사건이 발생 할 거다. 다만 기린의 마지막 공격을 어떻게 피할지는 생각을 해두어야 할 거 같다. 

"기린이야 그렇다 치고, 구슬과 그 깨진 방은 뭐지."

금이 가있는 하얀 방은 정말 수수께끼였다. 이젠 이세계가 내가 쓴 소설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에휴, 모르겠다. 애들은 잘 싸우고 있으려나?"

구슬과 하얀 방은 지금 생각해 봐야 답이 안 나올 거 같아서 아린과 크라이드의 전투나 봐야겠다는 생각에 성벽으로 올라갔다. 

슈웅!

아린은 이미 샤크라이 한 마리를 잡았는지, 걸레짝이 되어있는 시체를 뒤에 두고 새로운 샤크라이에게 검을 날리고 있었다. 

콰아아앙! 

크라이드는 힘자랑이라도 하는지, 샤크라이와 치고받기를 하는 중이었다. 물론 버서커 상태였기 때문에 곤죽이 되어가는 것은 샤크라이였다. 

내 기사들의 활약을 보자, 가라앉았던 기분이 시원하게 풀렸다.

"좋구만, 역시나 잘 뽑았어."

**

"찔러!"

"찔러!"

샤크라이 킹이 죽고 나서부터 몬스터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볼라크나 만타르 같은 녀석들이 자주 나타났는데 병사들을 단련시키기에 좋은 상대라고 생각해서 나는 나서지 않고 뒤에서 병사들을 지휘했다. 

"창병 앞으로!"

"창병 앞으로!"

샤크라이 킹을 죽인 이후 병사들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은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나를 완벽하게 믿고 있었다. 

"대공자님! 샤크라이가 나타났습니다."

"몇 마리지?"

"2마리입니다."

자신들의 왕을 죽인 복수라도 할 생각인지 한동안 샤크라이들이 엄청나게 나타났지만, 놈들은 모두 아린과 크라이드의 수련상대로 죽어나갔다.

수많은 샤크라이들을 죽여서 씨가 마른건지, 겁먹고 나타나지 않는 건지, 이젠 한두 마리씩 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린, 크라이드!"

"한 마리씩 맡으면 되나요?"

"그래."

"대공자님."

아린과 크라이드가 샤크라이를 향해 달리는 것을 보고 있을 때 필로가 말을 걸었다. 

"네?"

"후작 각하께서 일주일 후에 하이와 섬 앞으로 오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일주일 후에요?"

"네. 이곳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도 몬스터들의 개체가 확연히 줄었다고 합니다. 저희 쪽도 이젠 하루에 20마리도 나타나지 않으니, 복귀하려고 하시는 거 같습니다."

"그럼 집으로 오라고 하지 왜 그곳으로 오라는 거죠?"

하이와 섬 앞으로 가는 것도 일이고, 거기서 다 모여서 돌아가는 것도 일이다. 왜 모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원래 출정이 끝나면 배를 타고 바다를 돌며 문제가 없나 확인하는 게 마지막 일입니다."

"그렇군요."

후작은 나와 콜린, 라온을 데리고 잠시 바다로 나가는 경험을 시켜주려는 것 같았다. 

"4일정도 상황을 보고 별일이 없으면 5일째에 출발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

시간이 지날수록 몬스터들은 점점 더 줄어갔다. 3일이 지난 후부터는 아예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계획대로 5일째 새벽에 성벽을 나와서 하이와섬을 향해 움직였다. 

후작의 명령대로 7일 정오에 섬 앞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제일 늦었는지, 콜린과 라온, 후작까지 모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집사님의 말을 들으니, 후작님이 가장 힘든 곳을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게 록스 후작의 일이니까."

세 아들 모두가 무사히 전투를 끝낸 것이 기쁜지, 후작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 

"형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라온이 다가와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녀석은 다친 곳 없이 매우 건강해 보였다. 

"저놈도 참 꾸준하다. 꾸준해."

그에 반해서 콜린을 날 못 본척하고 옆에 있던 기사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럼 모두 모였으니, 시작할까."

후작은 단상위로 올라갔고, 우리는 그 앞에 각자의 진형대로 정렬했다.

"출정 기간 동안 끝도 없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와아아!"

후작의 말이 끝나자, 기사와 병사 모두가 기쁨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이번 출정은 유독 사상자가 적었다. 몬스터를 모두 처리한 것보다도 사상자가 적어서 더욱 행복한 기분이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준 덕분이다."

"감사합니다!"

"우와아아아!"

후작의 밝은 웃음에 앞에 있는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를 내질렀다. 

"내가 길게 말하는 거 안 좋아하는 거 다들 알고 있을 테니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대부분 알고 있었겠지만, 이번 출정에는 하나의 시험이 걸려있었다. 내 후계자를 선정하기 위한 첫 번째 시험이었지."

후작은 모두에게 후계자를 뽑기 위해 이번 출정동안 실적 평가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부터 실적을 발표하겠다. 라온과 3집사는 앞으로 나와라."

후작의 말에 라온과 그를 따라다녔던 3집사가 단상위로 올라갔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라온은 뒷짐을 지고 앞을 보고 있었고, 3집사가 입을 열었다. 

"라온 공자님은 맡으신 서쪽의 성벽을 완벽하게 사수하셨습니다."

"오!"

"와!"

3집사의 말에 모두가 우러나오는 탄성을 터트렸다. 

"저희는 미리 후작님과 몬스터들의 점수를 매겼습니다. 볼라크 1점, 만타르 3점, 케라인 5점, 샤크라이 30점입니다."

몬스터들의 수준에 맞춰서 점수를 냈기 때문에 모두가 납득  할 만한 점수 분배였다. 

"저희가 처리한 몬스터는 볼라크 1854마리, 만타르 467마리, 케라인 341마리, 샤크라이 22마리입니다. 그래서 총 점수 5620점입니다."

"우와아아아!"

"라온님!"

엄청난 수치에 모든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라온은 예의 바르게 세 방향으로 고개를 숙였다.

"훌륭하구나! 정말 수고 많았다."

후작이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라온은 환호성보다 후작의 손길이 더 기쁜지 활짝 웃고 단상에서 내려갔다.

"다음은 콜린."

"네."

콜린과 2집사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녀석은 나를 살짝 보더니,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쟤는 진짜 맞아야겠다."

재수 없게 웃는 것을 보니, 라온보다 더 많은 몬스터를 잡은 게 확실했다. 

"콜린 공자님도 라온 공자님과 마찬가지로 성벽을 완벽하게 사수하셨습니다.

"오!"

"몬스터는 볼라크 2554마리, 만타르 545마리, 케라인 423마리, 샤크라이 35마리입니다. 그래서 총 점수 7354점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

"대단합니다!"

"콜린 공자님!"

라온보다 1700점 가량 높은 수치에 사람들이 더욱 큰 환호성을 내었다. 콜린은 특유의 비틀어진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대단하구나. 네가 나보다 더 많은 몬스터들을 처리한 거 같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아버님을 따라겠습니까."

"장하다. 콜린."

"감사합니다."

후작의 칭찬에 콜린도 연신 미소를 지으며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유렌 나오거라."

"네."

필로와 같이 단상위로 올라갔다. 필로는 미리 준비해둔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일단 저희 진형의 성벽은 부서졌습니다."

"아..."

"저런."

"으음..."

우린 진형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수련기사 2명만 데려가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들이다. 

"풉!"

앞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콜린이다.

"아, 죄송합니다. 놀라서..."

전혀 죄송한 표정이 아니다. 녀석은 삐뚤어진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저희가 잡은 몬스터는 볼라크 1332마리, 만타르 281마리, 케라인 197마리..."

"크흡!"

몬스터들의 숫자를 듣자, 입을 막고 있던 콜린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콜린!"

후작이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콜린의 웃음이 멈췄다. 

"죄송합니다. 아, 왜 이러지?"

콜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얄밉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잠시 뒤엔 콜린뿐 아니라, 지금 떠들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 테니까. 

"계속하겠습니다. 샤크라이 169마리. 모두 합쳐서 총 8230점입니다."

"무, 무슨 개소리야! 샤크라이가 169마리라니, 그걸 너희들이 무슨 수로 잡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짓말 하지 마시오!"

"아, 죄송합니다."

콜린과 그의 보좌들의 항의에 필로가 들고 있던 종이를 뒤집으며 사과를 했다. 

"실수가 있었네요."

"장난 칠 때가 따로 있지. 똑바로 하시오!"

"역시나."

"그럴줄 알았지."

필로의 말에 다른 진형의 사람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옆 사람들과 떠들고 있었다.

"네. 똑.바.로.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샤크라이 킹이 1마리, 샤크라이 킹의 점수는 1만점. 해서 유렌 록스님의 총 점수는 1만 8230점입니다."

웅성거리던 모든 인간들이 얼어붙은 것처럼 한꺼번에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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