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서커
"저한테 잠재된 능력이 있다고요?"
"그렇다니까."
"으음..."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크라이드를 쳐다보았다. 내가 계속 당당한 모습을 보이자, 크라이드도 약간 믿음이 생긴 것 같았다.
"아린, 크라이드."
"네."
"둘이 대련 한 번 해봐."
아린은 표정변화가 없었고 크라이드와 한스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요? 조금 있으면 몬스터랑 싸워야 하는데요?"
"그래. 한스, 수련검 두 개만 가져다 줘."
"네? 아, 네..."
한스가 수련검을 가지러 가는 동안 아린 옆으로 갔다.
"아린."
"네."
"크라이드의 검로를 최대한 분석하고 파악해놔. 그리고 다 됐다 싶으면 단숨에 끝내."
"알겠습니다."
아린은 내게 신뢰를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 아까부터 내 말에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뭘 시키든 완수해주겠다는 느낌이었다.
한스가 수련검을 가지고 온 후, 아린과 크라이드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한 번 붙어보고 싶긴 했는데... 그럼 가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크라이드가 먼저 아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하던 것과는 달리 막상 대련을 시작하니 기분이 좋아보였다.
후우웅!
딱!
아린은 크라이드의 괴력이 담긴 횡 베기를 검을 살짝 틀어서 흘려버렸다.
딱!
딱!
딱!
대련은 크라이드가 덤벼들고 아린이 회피와 방어를 하는 모습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대련이 진행되면 될수록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대련을 시작한지 5분이 지나자, 크라이드의 검은 아린을 스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명경지수..."
못 본 사이에 레벨이 오른 아린의 명경지수를 보니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5분 만에 크라이드의 검로를 완벽하게 파악해 버렸다.
아린은 속도, 크라이드는 힘이 주무기다. 그냥 싸워도 아린이 상성 상 유리한데 명경지수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애와 어른의 싸움이 되어버렸다.
슈욱!
"큭!"
10분이 지나자, 아린은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크라이드를 제압했다.
"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쳐있는 크라이드와는 달리, 아린은 호흡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끄응, 정말 강하시네요."
"아닙니다."
크라이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아... 이것 보세요. 전 이분을 제대로 스치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제게 무슨 잠재된 능력이 있어요."
"말했잖아. 잠재되어 있다고, 그게 쉽게 나오겠냐?"
그를 가볍게 위로했다.
그 이후로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 3일간 아린과 크라이드를 매일 대결 시켰다.
아린이 크라이드에게 이것저것 시험해 보는 것과는 달리 크라이드는 무기력하게 패배하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
"후우..."
누군가가 내 방으로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 느꼈기 때문에 내공심법을 운용하다가 눈을 떴다.
"대공자님!"
한스의 목소리였다.
"왜?"
"몬스터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장비를 챙긴 후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저, 저희 정말 지원 안 오나요?"
"응, 안 와. 기대하지 말고, 있는 사람끼리 잘 해보자고"
빠르게 달려서 성벽위에 올라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닷물 위로 뾰족한 것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볼라크를 비롯한 몬스터들의 등지느러미였다.
"흠, 생각만큼 많지는 않은데?"
"아닙니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며칠 동안 계속 몰려올 겁니다. 절대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다행이고."
"네?"
주위를 둘러보다가 오늘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는 성벽에 기대서 힘없이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라이드."
"네. 대공자님."
"준비해."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린님에게 계속 지기만 했는데."
크라이드는 대련을 하면 할수록 아린의 옷자락조차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절망에 빠진 상태였다.
"날 믿어. 네겐 특별한 능력이 있어."
"알겠습니다."
"아래로 내려가서 네 앞에 연기가 나타나면 거부하지 말고 그대로 몸을 맡겨."
"연기요?"
"그래. 내 말을 믿고, 연기를 거부하지 마. 그냥 연기에 빠져들어."
"네."
크라이드는 망설이지 않고 성문 밖으로 나가서 몬스터들 앞에 섰다.
"화살을 쏠까요?"
"아니."
"하지만..."
"기다려."
한스와 병사들은 크라이드를 걱정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지만, 그에게 걱정 따윈 필요 없었다.
"키에에엑!"
"카아악!"
"크르르륵!"
볼라크들이 육지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준비해 두었던 독을 개방했다.
화아악!
볼라크들이 올라오고 있는 바닷가에서부터 성벽 앞까지 엷은 연기에 휩싸였다.
"이, 이게 뭐야!"
"대공자님?"
"크라이드! 연기에 몸을 맡겨라!"
당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크라이드에게 소리를 질렀다.
"크으윽! 아아악!"
연기에 휩싸이고 30초 정도가 지나자 크라이드의 어깨에서부터 등까지 붉은색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발동되었군."
한 번 발동이 되었으니, 크라이드는 앞으로 버서커를 자유롭게 발동 할 수 있을 거다. 멈추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만.
"크아아아아!"
크라이드 목에서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울려 퍼졌다. 육지로 올라오던 몬스터들이 그 괴성에 움직임을 멈췄다.
화르륵!
아직 검의 인정을 받지 못해서, 작은 불꽃만 튀기던 크라이드의 화염정령의 대검에서 출렁이는 불기둥이 나타났다.
콰앙!
크라이드는 곧바로 앞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돌진했다. 그의 검격에 볼라크 4마리가 그대로 터져버렸다.
퍼퍼퍼펑!
왼쪽에서 오른쪽을 가로지르는 횡베기 한 번에 크라이드를 둘러싸고 있던 볼라크들이 파도처럼 쓸려나갔다. 믿기 힘든 파괴력이었다.
"대공자님. 이, 이 연기는 대체 뭔가요?"
바닷가 전체를 감싸고 있는 연기는 내가 뿌린 살혼연이다.
살혼연은 적아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아군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쓰기가 힘들어서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번 출정이 살혼연의 성취도를 올릴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크아아아!"
"거기다 저 기사님은 왜 저렇게 변하신 거죠?"
크라이드는 같은 수련기사인 아린과의 실력차이에서 절망을 느꼈고, 살혼연을 받아들임으로써 공포를 느꼈다. 두 마이너스 감정에 의해서 깊숙이 숨어있던 버서커의 봉인이 깨져버린 것이다.
크라이드에게 미안하지만, 내 방법이 심력 소모가 적은 각성법이다. 소설 속에서 크라이드는 굉장히 슬픈 사건을 겪고 각성 하게 된다.
콰아아앙!
"크하하하!"
크라이드는 몬스터뿐 아니라, 대지를 초토화 시키고 있었다. 원래의 그보다 파괴력이 수십 배는 증가한 것 같았다.
"아린."
"네."
"쟤 이길 수 있어?"
"대공자님이 무슨 짓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검로는 그대로입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아린은 잠시 크라이드를 지켜본 후 평온한 어투로 말을 했다.
"저 상태가 되면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들거든, 저기 어깨에 타오르는 불꽃 보이지."
"네."
"저게 타오르는 동안은 무적에 가까운 힘을 내. 절대 지치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들지. 하지만 약점이 있어."
크라이드의 버서커는 강력하지만, 딱 한군데 조문(罩門), 약점이라고 할 만한 곳이 있다.
[어깨와 목이 십(十)자로 교차되는 부분에서 10cm위를 치면 기절 할 거야. 그냥 뒷목이라고 생각해도 되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 하게 아린에게 크라이드의 약점을 전음으로 알려주었다.
"크라이드가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는 동안 어떻게 제압할지 머릿속으로 생각해봐."
"알겠습니다."
내가 이곳에 아린과 크라이드만 데리고 온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 크라이드의 버서커를 각성 시킨다. 두 번째 아린에게 크라이드의 제압을 맡기면서 명경지수 레벨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내 살혼연의 숙련도를 올린다.
나는 이곳에서 1석 3조의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크아아아!"
살혼연의 효과도 컸지만, 크라이드의 파괴력 덕분에 몬스터들은 20분 만에 몰살당했다.
"크하하하!"
몬스터를 모두 쓸어버린 크라이드는 광기를 짊어진 채 성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린."
조금 남아 있던 살혼연을 모두 제거한 후에 아린을 불렀다.
"네."
샤악!
아린은 검을 뽑고 그대로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살랑거리며 내려가고 있었다.
"뭐야! 벌써?"
확실했다. 그녀는 이미 바람 정령의 세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콰아아앙!
아린이 떨어지기 무섭게 크라이드가 검격을 뿜어서 공격해왔다. 그의 검이 박힌 땅은 폭탄이 터진 것처럼 파여 나갔다.
챵!
그렇지만 아린은 최소한의 회피로 검격을 피한 후 크라이드의 투구와 갑옷 사이의 틈새를 올려쳤다.
"크르를!"
컁!
아린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크라이드의 투구만을 벗겨버렸다.
부아앙!
후아앙!
크라이드는 짐승 같은 움직임으로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지만, 아린은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면서 틈을 노리고 있었다.
"크아악!"
분노에 가득 찬 크라이드가 기술을 쓰기위해 검을 들어 올렸을 때 아린은 이미 그의 뒤에 도착해 있었다.
퍼억!
"큭!"
아린이 손잡이의 끝부분으로 크라이드의 뒷목을 내려치자, 그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뭐야."
아린이 위험할까봐, 크라이드에게 독도 넣어놨는데, 너무 싱겁게 끝났다.
"쟤 왜 이렇게 쎄지?"
아린은 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그건 그렇고, 한스."
"흐억! 네!"
침을 흘리며 아래를 보고 있던 한스가 정신을 차렸다.
"말한 것 과 다른데? 끊임없이 온다며, 왜 이것뿐이야?"
일단 시작되면 수천의 몬스터가 계속 밀어 닥친다고 했지만 몬스터는 100마리 정도 밖에 나오지 않았고, 바다에서 더 나올 기색도 없어보였다.
한스도 의문이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몬스터들이 나타나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몰아치는데 이상하네요.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
크라이드는 버서커 개방의 반동으로 이틀째 자고 있었고, 그 시간 동안 몬스터들은 씨가 마른 것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실적을 세워야하는 내겐 상당히 답답한 상황이었다.
"집사님."
"네."
말 한마디 없이 나만 따라다니는 후작의 집사 필로에게 말을 걸었다.
"실적은 어떻게 평가하는 거죠?"
"몬스터를 몇 마리나 잡았는지, 얼마나 강력한 몬스터를 퇴치했는지, 성벽을 완벽하게 사수 했는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했는지 등으로 평가하실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몬스터 빼곤 완벽하네요."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아서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뭐, 답답하기는 한데,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 이번 출정 하나로 후계자가 결정 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시다니, 정말 많이 변하셨군요."
필로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대공자님! 나타났습니다!"
필로와 대화를 끝내고 성벽으로 올라가려 할 때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왔나?"
성벽에 올라가보니, 병사의 말대로 바다 위에 많은 지느러미들이 떠 있었다. 며칠 전에 보았던 볼라크들의 지느러미였다.
"근데... 저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볼라크들의 징그러운 지느러미 뒤에 다른 것들이 보이고 있었다.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부드러운 곡선이 있는 삼각형의 지느러미, 상어의 지느러미였다.
"헉!"
"이럴 수가!"
"아악! 말도 안 돼!"
필로가 그 지느러미들을 보고 기겁했다. 한스는 아예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아버렸다.
"대, 대공자! 지금 빨리 후퇴명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지금 인원으론 저것들을 막지 못합니다. 실적 같은 것을 생각 하실 때가 아닙니다!"
"아! 빨리요! 우리 다 죽어욧!"
얼마나 놀랐는지, 한스가 내 옷을 잡고 흔들어 댔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샤크라이]
2m가 넘는 신장을 가진 해양몬스터, 상어의 머리에 괴력의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다. 들고 있는 무기는 가지각색이지만, 대검이나 도끼, 해머 같은 중병을 들고 있다. 무기가 크다고 근접하려 했다간 날카로운 이빨에 통째로 씹어 먹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물속에선 모든 능력이 1.5배가 된다.
기술: 분노(물리), 강철이빨(물리), 피부강화(보조), 가속(보조)
"아, 쟤네구나."
"‘아. 쟤네구나’가 아니에요! 이대로 있다간 다 죽는다고요! 대충 봐도 샤크라이가 40마리가 넘잖아요. 이런 건 처음 봐요! 빨리 후퇴명령을..."
"괜찮아. 내가 해결할게."
새파랗게 질려서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싱긋 웃어주고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키이이익!
"카아악!"
볼라크들이 바다에서 올라왔지만, 놈들은 이곳을 침공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샤크라이에게서 도망쳐 온 것이다.
"흡!"
성문 앞 전체를 살혼연의 범위로 지정하고, 아그네스를 톱날처럼 날카로운 검은색의 원반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암기 묵봉(墨蜂)이었다.
"그, 그건 뭡니까?
부우우웅!
손가락으로 묵봉을 돌리자, 수천마리 벌떼가 우는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그 소리를 즐기며 얼이 빠져있는 필로를 불렀다.
"집사님. 순식간이니까, 숫자 잘 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