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달라진 대공자 (34/241)

달라진 대공자

"심각한 문제라니?"

"이틀 전에 이곳에서 일하시는 대장장이분과 같이 무기고에 들어갔습니다."

"무기고에?"

"네. 그분이 일 좀 도와달라고 하셔서요. 제 1 무기고에 들어갔는데, 수리가 필요한 무기들을 확인해서 빼놓는 작업이었습니다."

기라녹스는 불안한지 손을 비비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분은 앞에 있는 무기들만 살펴보라고 하셨는데, 제가 손이 좀 빠르다보니, 그분보다 일을 먼저 끝냈습니다. 더 할 일 없나 뒤지다가 호기심에 본검이라고 써져있는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이 정도까지 들었으니, 기라녹스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상상이 갔다. 

"앞에 있는 무기들과 달라보여서 한 번 뽑아 봤는데... 그건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무기라고 할 수도 없어요. 질이 정말 떨어졌습니다." 

"어느 정도지?"

"그 검으론 가죽 갑옷조차 베지 못 합니다. 아니, 그것으로 남을 베려다간 오히려 자기가 다칠 겁니다. 돈을 받아도 가져가지 않을 최하급 품이었습니다." 

"앞쪽에 있던 건?"

"어디에 내놔도 쓸 수 있는 중급 품이었습니다."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장난칠게 없어서 목숨이 달린 무기로 장난을 친단 말인가. 

"그 이후에 제 2 무기고에 갔는데 그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쪽은 나쁘지 않았지만, 교묘하게 숨겨둔 창들의 창대는 흔들리고, 창날의 쇠는 고철로도 못 쓸 정도였습니다."

"하, 개 같은 새끼들..." 

"말씀드려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는데..."

"무슨 소리야. 정말 잘했어."

기라녹스가 왜 고민을 했는지 이해가 갔기 때문에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 새끼들은 진짜 인간쓰레기들이야. 왜 인줄 알아?"

"비리를 저질러서요?"

"그건 당연한 거고, 무기고의 무기를 쓰는 사람들은 기사들이 아니야."

"아!"

"그래. 기사들은 개인 무기가 따로 있지. 무기고의 무기들은 병사와 수련 기사들을 위한 거야. 문제가 생겨도 따지지 못하는 약자들에게 그딴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지금 당장 이 일에 관련된 놈들을 모아다가 와염독을 부어버리고 싶어졌다. 

"거기다 앞쪽은 정상적으로 해놔서 속였다는 게 더 열 받네."

"방패와 갑옷이 있는 곳은 보지 못했지만, 비슷할 거라 생각 됩니다."

"그렇겠지. 하! 이 새끼들 진짜." 

화나기도 화나고 기라녹스에게 창피하기도 했다. 

"미안하다. 좋은 대우 해주겠다고 기껏 데려와서 못 보여줄 꼴을 보여줬네."

"아, 아닙니다. 대공자님이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대신에..."

피가 날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 말을 이었다. 

"내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줄게."

**

"허어, 이야기도 해주지 않고 그저 어디든 출입하고 검사 할 수 있는 허가권을 내어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꼭 필요한 일입니다."

여러 준비를 끝낸 뒤에 후작의 집무실을 찾아가서 어느 장소든 들어 갈 수 있는 허가권을 발급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니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느냐."

"허가권을 발급해주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허어, 참..."

"일리아에게 얻어맞아 기절한 이후 단 한 번도 후작님을 실망시켜드린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이번 일이 끝나면 후작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을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일이면 모두 아시게 될 겁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후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들어줄 수밖에... 알겠다. 집사에게 말해둘 테니, 내일 받아가거라."

"감사합니다."

후작에게 예를 갖춘 인사를 올리고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준비는 모두 끝났군."

**

"대공자님."

다음 날 오전, 페루가 급하게 뛰어왔다. 

"지금 후작가 입구에서 상자들을 들고 대공자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정확한 시간에 왔네."

"네?"

"남자 하인이랑 집사들 전부 입구로 보내서 거기 있는 물건 가지고 제 1 무기고 앞으로 오라고 해."

"저, 전부요?"

페루가 잘못 들었는지,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말 중요한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내가 시켰다고 하고 다 보내."

"알겠습니다."

"너는 지금 공방으로 가서 대장장이들 불러서 제 1 무기고 앞으로 와."

"저는 다른 일이네요."

"나도 따로 가져 올게 있으니, 무기고 앞에서 보자."

그렇게 말하고, 후작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오셨군요."

"후작님이 맡겨 놓으신 게 있을 텐데요."

문 앞에는 후작의 제 1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집사는 품에서 서류 한 장을 주었는데, 오늘 하루 동안 어디든 출입하고 검사, 통제를 할 수 있는 허가서였다.

"후작님은 뭘 하고 계십니까?"

"후작 부인께서 찾아오셔서, 잠시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후작님께 정오까지 감찰관을 데리고 제 1 무기고로 오시라고, 꼭 전해주세요."

"네?"

"제대로 전하지 않으면 후회할 겁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집사를 내버려 두고, 무기고까지 느긋하게 걸어갔다. 

"당신들 대체 뭐하는 거요! 여긴 정원이 아니오!"

"미안하지만, 저희도 여기에 불려온 거라서..."

"그럼 다른 곳에 가서 기다리라고!"

"대공자님이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시키셨습니다."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에 집사와 하인들, 대장장이들까지 모두 무기고 앞에 있었다. 그들은 무기고를 지키는 병사들과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대공자님!"

"대공자님, 오셨습니까?"

내 앞으로 페루와 기라녹스가 달려왔다. 

"기라녹스 수량은 모두 맞췄어?"

"네. 물론입니다. 하나하나 확인해서 좋은 물건들로만 가져왔습니다."

"잘했다."

기라녹스와 페루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무기고 앞으로 걸어갔다. 

"멈춰 주십시오!"

"뭐지?"

"이곳은 무기고입니다. 허가되지 않은 인원은 이곳에 접근하실 수 없습니다."

"저 뒤에 상자들 보이지?"

"네? 네."

"저것들은 아스 성에서 구해온 검과 방패, 갑옷들이다. 출정 때 쓰기위해서 내가 구입해 온 거지."

집사와 하인들이 가져온 스무 개의 상자들을 가리켰다. 

"저것들 넣어야 하니까, 문 열어."

"기, 기다려주세요."

"아아, 그래. 병기관리관이 와야 하겠지."

"네. 지금 불러 오겠습..."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이미 불렀잖아."

"네?"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병사가 마른 침을 삼켰다. 

"병기관리관이 무기고 앞에서 사소한 일만 터져도 자신을 부르라고 했겠지. 아니야?"

"그게..."

"그리고 저기 부리나케 뛰어오고 있는 사람이 병기관리관이겠고."

귀티 나는 중년인이 이쪽으로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헉, 헉... 이, 이게 다 뭐야! 무기고 앞에서 뭣들 하는 거요."

"내가 시켰다."

"대, 대공자..."

병기관리관은 나를 보고 놀랐는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출정 때 쓰기 위해서 무기와 갑옷들을 사왔다. 무기고에 넣으려고 하니, 문을 열도록."

"사오셨다고요?"

"그래."

"아... 죄송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기고는 허가를 받아야 열 수 있습니..."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품에서 후작에게 받은 허가서를 보여주었다. 그곳엔 후작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잔말 말고 열어."

"아..."

병기관리관은 팔을 덜덜 떨다가 무기고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대, 대공자님. 다른 물건은 건드리면 안 되고 넣기만 하셔야."

"페루, 기라녹스"

"네."

"넵!"

"저기 가서 가장 앞에 있는 상자 하나 꺼내 와라."

"알겠습니다!"

그들은 무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공자님. 무기를 확인해 보시는 건 허가가..."

"딱 하나만 볼게. 가져와."

병기관리관은 안 된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그의 입가에 나타난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정말 안 되는데..."

안 된다는 말과는 다르게 그는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쿵!

페루와 기라녹스는 가장 앞에 있던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열어."

파칵!

상자 안에는 가죽 검집에 담긴 검으로 꽉꽉 차 있었다. 그중에 네 개를 집어다가 대장장이들에게 건내주었다. 

"어때?"

"나쁘지 않습니다. 관리도 잘됐고, 질도 좋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급이상입니다."

"병기관리관 관리 잘했네. 후작님께 말씀드려서 칭찬해줘야겠는데." 

"하하, 창피하게 왜 그러십니까. 확인도 하셨으니, 가져오신 무기나 빨리 넣고 쉬러 가시죠."

"그게 좋겠네."

크게 미소 짓고, 하인들과 집사들을 보았다. 

"그럼..."

"상자들을 넣을까요?"

"아니, 무기고에 있는 상자 전부 다 꺼내."

순식간에 미소를 지우고, 냉기가 흐를 만큼 차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안 됩니다! 대공자님!"

"왜?"

"더 이상은 월권입니다! 대공자님이 아니라, 후계자라고 하더라도 상자를 꺼내는 것은!"

퍽!

"커헉!"

허가서를 보여주는 척하면서 병기관리관의 뺨을 날렸다. 순식간에 그의 뺨이 붉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대, 대공자!"

"여기 잘 봐. 모든 것을 확인할 권리. 보이지."

허가서의 네 번째 줄을 병기관리관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됐으니, 모두 상자 꺼내와."

"네."

"알겠습니다."

"자, 잠시만! 후, 후작님이..."

병기관리관이 집사와 하인들을 가로막았다. 

"야."

"아..."

"한 번만 더 막으면 다리 잘라버린다."

내 분노가 기세가 되어 병기관리관을 통째로 집어 삼켰다. 그는 이빨을 덜덜 부딪치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 안 돼..."

병기관리관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고 하인과 집사들은 무기고에 있던 상자를 모두 꺼내왔다. 

"전부 뜯어."

드드득.

"어디 한 번 볼까?"

열린 상자에서 검을 하나 뽑아들었다. 검은 이빨이 나가있고, 균형이 맞지 않아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공짜로 줘도 안 가져 갈만한 폐품이었었다. 

"이건 어떤가?"

"이, 이건 절대 납품될 품질이 아닙니다. 연습용으로도 못쓸 물건입니다. 누가 이따위 물건을!"

"그렇겠지."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대장장이가 대답했다. 

"지금부터 윌링턴 록스 후작을 대신해 유렌 록스의 이름으로 제 1, 제 2, 제 3 무기고와 식품저장고를 폐쇄한다."

후작의 허가서를 들고 크게 외쳤다. 그리고 집사 3명에게 각각 창고로 가서 내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뭣들 하는 거냐."

집사들이 출발하자마자 제 시간에 맞춰서 주역이 등장했다. 후작과 후작부인 그리고 감찰관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나타났다. 

"무기를 확인해 보고 있습니다."

"무기를? 갑자기 왜?"

"직접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전부 까."

멈췄던 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컥.

모든 상자가 열리고, 안에 있는 무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

후작은 대체 뭘 하냐는 듯 천천히 주변을 돌며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은 후작이 아니라,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감찰관을 보고 있었다. 

"직접 보시죠."

검이 들어있는 상자를 통째로 후작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이건, 이것도, 설마... 이거 전부?"

후작은 상자안의 검들을 하나하나 뽑아보더니,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며 감찰관을 노려보았다. 

"감찰관."

"에, 예!"

후작의 목소리는 여태 들어 본적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한 달 전 감사 때 무기고엔 아무 문제없는 것으로 보고했지 않나?"

"그, 그게... 이, 이놈이 장난질을 친 것 같습니다. 저는 분명..."

감찰관은 혼이 나가있는 병기관리관을 삿대질 하며 그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개 잡소리하고 있네. 이게 한 달 동안 빼돌린 양으로 보이나?"

"아, 아니야. 난..."

"입 닥쳐."

"컥!"

"사람 목숨을 가지고 돈 놀이를 해?"

"끄으윽..."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감찰관을 짓눌렀다. 그는 내 기세에 숨조차 쉬지 못하고 꺽꺽거리고 있었다. 

"이제 무슨 일인지 아셨을 겁니다. 제가 왜 허가서를 달라고 했는지, 왜 그것을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는지."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벌겋게 변해 있었다.

"이곳뿐만이 아닙니다. 제 2 무기고, 제 3 무기고, 식품저장고까지 제대로 된 곳이 없을 겁니다. 올해의 출정은 무사히 넘긴다 치고. 내년은? 내후년은 어떨까요?"

"그건..."

"우리는 전쟁 중에도 좋은 무기를 가지고 좋은 식사를 할 겁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어떨까요? 윗사람이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런 쓰레기 무기를 들고, 독이 들은 것 같은 처참한 식사를 하게 될 겁니다."

독이야기를 하며 후작 옆에 있던 카이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눈을 보곤 얼굴이 창백해져서 뒤로 물러났다. 이건 내가 그녀에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였다. 

스윽

옆에 상자에 있던 검을 뽑아서 감찰관 앞으로 갔다. 

"죄,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

캬갸걍!

"히이익!"

검을 감찰관의 다리 사이에 내리찍어서 부숴버렸다. 그의 바지는 축축이 젖어 들고 있었다. 

"당장 이 개자식들을 패죽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거야 말로 월권. 제 권한을 넘는 일이죠. 이후로는 후작님께 맡기겠습니다."

"너는 대체..."

"저기 있는 상자는 검과 갑옷 그리고 방패입니다. 제 대장장이가 아스 성에서 사온 물건이니 품질에는 하자가 없을 겁니다. 쓸 수 없는 것들은 버리고 저것을 사용해 주세요."

내가 장비까지 준비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후작은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일에 관계된 자들은 한 둘이 아닐 겁니다. 여긴 있는 두 명에 대장장이, 위병에 문관까지 모든 관계자를 확실히 처벌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후작에게 맡긴다고 말했지만,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  치는 놈들에게 인간다운 처벌을 받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 둘은 이미 내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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