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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빛의 기사 (32/241)
  • 빛의 기사

    나를 포함한 세상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엔비를 보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후우우.

    엔비의 주먹과 창은 내 코앞에 있었지만, 그 속도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사고는 그대로지만, 시간이 느리게 흐르니 엔비의 공격을 피할 방법은 무수히도 많았다. 

    먼저 날아오는 주먹을 고개를 숙여 피한 후 옆으로 굴러서 창을 피했다. 

    콰아앙!

    내 얼굴대신 바닥을 친 엔비의 주먹에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포탄이 터진 것처럼 바닥이 함몰되어 있었다. 

    "크르르!"

    엔비의 광기 어린 눈에 이채가 돌았다. 내가 어떻게 그 공격을 피했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으하하하하!"

    쾅!

    콰콰콰쾅!

    엔비가 땅을 밟자 여덟 방향의 바닥에서 돌창이 올라왔고 그의 본체는 공중에서 내려찍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어디로도 피할 수 없는 필사(必死)의 공격이었겠지만, 공격의 흐름이 보이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는 내겐 피할 수 있는 허점투성이 공격이었다. 

    콰아아앙!

    엔비가 내려찍기 전에 그곳을 벗어났고, 그가 낙하한 곳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창조주의 눈이 발동 중인 내겐 그의 움직임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우우웅!

    아그네스에 내공을 가득담자, 검에서 하얀색 아지랑이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지랑이는 점점 모여들어서 하나의 선을 이루었다. 

    부우웅!

    검 위에 검을 덮어씌운 것처럼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검기? 검강? 뭔지는 모르겠다만!

    푸아악!

    검을 움켜쥐고 엔비에게 돌진했다. 빛나는 검은 엔비의 검은 갑옷을 두부처럼 꿰뚫었다

    "크아악! 이, 이따위 공격으론!"

    "알아."

    간단하게 대답한 후 엔비에게 꽂혀있는 아그네스를 암기로 변화시킨 후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잘 가라."

    딱!

    콰아아앙!

    내공으로 보호하고 있는 귀에서 이명이 들릴 정도로 엄청난 소리가 터졌다. 

    "성공인가..."

    아그네스를 흑철폭으로 바꿔서 그의 몸에 쑤셔넣고 그대로 터트렸다. 원래보다 많은 내공을 때려 박았기 때문인지 소음도 위력도 2배 이상이었다.

    "커어어..."

    먼지가 걷히고 엔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오른쪽 복부엔 자동차 바퀴만한 구멍이 나있었다. 그곳에선 피가 아닌 검은색 액체가 끈적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너, 인간, 네놈, 죽인..."

    엔비는 말을 어눌하게 하며, 몸이 액체처럼 변해서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크르륵..."

    겉으로 보기엔 엔비가 점점 죽어가는 것 같았지만, 내 머릿속에 엔비를 잡는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건 모습만 저렇게 보일뿐, 실제론 힘이 모여들고 있는 중이었다. 

    3페이즈라니! 

    솔직히 생각도 못했다. 원래의 내 시나리오는 1페이즈의 엔비를 버티다가 기사와 위병이 오면 놈이 도망가고 그사이에 나도 빠져나가는 거였다. 이런 개 같은 상황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키힉! 다 죽일 거야! 모두 죽는 거다!"

    엔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3페이즈가 발동 되는 중임을 확신하고 도망치려고 할 때 엔비에게 천 같은 것이 날아 왔다. 

    쉬이익!

    "크악! 이 개 같은 년! 말리지마! 인간은 전부 죽여 버릴 거야!"

    검은색의 천은 수십 번 넘게 휘돌며 엔비를 봉인하듯 감싸버렸다. 

    "설마!"

    고개를 들어서 천이 날아 온 곳을 쳐다보았다. 높게 솟은 첨탑 위 검은 머리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성의 손에서 천이 나오고 있었다. 

    왜 이곳에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신룡굴에서 내려오면서 만났던 바로 그 여자였다. 

    "이쪽이다!"

    "빨리 와!"

    "너희들은 경계를 세워!"

    "알겠습니다!"

    그 여자를 보고 있을 때 기사와 위병들이 이곳으로 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싸울 의지가 없는지, 그저 엔비를 자신에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젠장."

    그 여자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 기사 목소리가 들린 반대편으로 도망갔다. 지금 이곳에 있다가 기사들에게 잡히면 내가 테러범으로 몰릴 지도 몰랐다. 

    "크아아악!"

    "아악!"

    "무, 뭐야 이 실은!"

    "도망친다. 잡아!"

    그 여자가 기사들을 죽이고 있는지, 뒤에서 기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상승의 경지가 해제됩니다.]

    "크악!"

    달리는 와중에 상승의 경지가 해제되어 바닥에 구를 뻔했다. 참기 힘들 정도의 두통이 한 번에 몰아쳤다. 

    "윽!"

    입술을 깨물어서 고통을 중화시킨 후 계속 내달렸다. 내공이 바닥을 드러낸 지금 믿을 건 체력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빠져나갔다는 생각에 얼굴에 붙은 아그네스를 풀어 원래 얼굴을 한 후 주머니에 있던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대로로 나왔다. 

    "와, 살았나..."

    아직도 소름이 끼쳐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좀 쉬어야 겠다."

    행인에게 약속 장소인 용의눈물 여관을 물어봐서 찾아갔다.

    "대공자님!"

    여관에는 기라녹스만 있고 둘은 보이지 않았다. 

    "애들은?"

    "테러범이 나타났다고 잡겠다고 나가셨습니다."

    "뭐? 하아, 멍청한..."

    잡긴 뭘 잡는단 말인가, 한 방에 찌그러질 놈들이...

    "출국신청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콜린 공자님이 진행하신 거라."

    "그러냐?"

    기라녹스를 보니, 정말 살았다는 실감이 들어서 힘이 쭉 빠졌다. 

    "아, 아깝네. 진짜 나랑 만났으면 단칼에 죽였는데."

    "파손된 건물을 보니, 우리가 상대 할 사람이 아니던데요."

    "에이,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콜린과 라온이 대화를 하면서 용의눈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 대체 어디 갔다 온 겁니까?"

    "그냥 구경 좀 다녀왔다. 출국신청은 했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황태자를 죽인 암살자가 나타났어요."

    알아. 인마. 좀 전까지 신나게 싸우다 왔어. 

    "암살자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괴물이랍니다. 바닥에서 돌 기둥을 소환하고 괴물로 변해서 다 때려 부수고 장난 아니었대요."

    라온은 자신이 직접 본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을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놈에게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딱!"

    "딱?"

    "하고 기사가 나타났대요."

    나를 기사로 봤다면 성공이다. 처음부터 암기를 썼다면 좀 더 편하게 싸웠을 테지만, 그들에게 내 정보를 노출시키기 싫어서 검을 든 거니까.

    "그 기사는 괴물에게서 사람들을 구하고, 괴물과 홀로 싸우면서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까지 벌었대요. 엄청나죠! 그야 말로 기사의 본보기에요!"

    라온은 어린애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는 이런 영웅담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 기사는 검에서 빛을 내뿜었다고 해요. 빛나는 검으로 그 괴물을 베고, 폭발시켰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기사에게 빛의 기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도 붙었지."

    콜린은 라온이 말하던 것을 뺏어서 자신이 끝을 맺었다. 별 관심 없어 보이던 콜린도 빛의 기사에겐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아, 나도 그런 칭호 가지고 싶다. 빛의 기사라니, 진짜 멋있다. 누군지 진짜 보고 싶네."

    "그렇죠! 저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검을 나눠보고 싶고!"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던데, 지금 대기 중인 기사중에 한 명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얘들아, 그 빛의 기사 여기 있다. 

    두통 때문에 힘없이 의자에 축 쳐져 있는 내가 빛의 기사니까 많이 봐라. 

    명예로운 칭호도 좋고, 그들에게 경고를 한 것도 좋았지만, 오늘 몇 번을 죽을 뻔했는지 모르겠다. 다시는 경험하기 싫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그 다음에 괴물의 동료가 나타나서 죽어가는 괴물을 데려갔고, 빛의 기사도 사라졌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괴물의 동료인 여자가 도망치면서 기사와 위병 30명을 죽였대요."

    "그래서 그 빛의 기사가 더 칭송받고 있지. 그는 혼자서 싸웠으니까."

    아니다. 솔직히 운의 연속으로 살아남은 거다. 마지막에 상승의 경지가 안 나왔다면 죽어도 진즉에 죽었을 거다. 

    "하아, 그럼 출국신청은?"

    "됐어요. 역시 록스라고 하니까 통하더군요. 다만 일이 또 터졌으니,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마탑으로 가자. 시간 끌었다가 진짜 못 갈지도 모르니."

    "알겠습니다."

    우리는 마탑으로 가서 록스 후작령으로 공간이동을 신청했다. 확인을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다른 명령이 내려온 것은 없는지, 마법사들은 우리를 이동시켜 주었다. 

    록스 후작령의 마탑을 나오니, 이미 하늘은 어두웠고 달이 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집에 온 느낌이 드네요."

    "빨리 가자. 시간이 늦었어."

    제국의 마탑에서 신원확인을 하느라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후작가로 향했다. 

    록스 후작의 세 아들이 한 번에 돌아왔으니, 원래라면 난리가 났겠지만, 늦은 시간이라 일부러 조용히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소자, 복귀했습니다."

    저택에 들어가니, 후작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각자 다른 인사를 했다. 

    "잘 왔다. 제국에서 큰일이 있었다지?"

    "네. 아버지! 제가 말씀드릴까요?"

    "재밌을 것 같다만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이야기 하자. 내가 너희를 부른 이유도 내일 모두 말해주마."

    후작은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

    "알겠습니다."

    "네."

    하인을 불러서 기라녹스가 쉴 곳을 마련해주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비싼 침대에 누우니 날아갈 것 같았다. 

    "역시 좋구나."

    침대에 누워서 이번에 나갔다 온 일들을 생각했다. 나름 재밌고 많은 것을 얻었지만, 역시나 오늘일은 많이 오버한 것 같았다. 

    "다시는 그딴 짓 안해야지."

    너무 피곤했기 때문인지, 나는 빠르게 수마에 빠져들었다. 

    "공자님."

    "어?"

    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오랜만입니다. 공자님."

    "아린!"

    아린이 커튼을 걷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린을 보니 정말 반갑고 기분이 좋았다. 역시 아침엔 아린을 보면서 일어나야 하나보다. 

    "잠시 나가신 사이에 굉장해져서 돌아오셨군요."

    "뭐가?"

    "아스 성에서 강철의 마법사의 칭호를 얻으시고, 왕도에 가셔서 루키 학살자의 칭호를 얻고 오셨으니까요."

    "루키 학살자는 뭐야?"

    "모르시나요? 왕립 기사 학교에서 마스터 클래스의 학생 네 명을 혼자 때려잡으셨죠?"

    "그랬지."

    멜라이, 룰라, 카릭, 콜린까지 네 명이네.

    "그 사람들은 루키라고 불리는 기대주들인데 그들을 모두 이겨서 루키 학살자라고 불리신답니다. 후작각하께서 웃으시면서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하하하!"

    재밌는 별명이라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빛의 기사도 나니까, 이번 여행에서 칭호만 세 개를 얻어서 왔다. 

    "오늘 아침식사는 후작각하께서 공자님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알겠어."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이따 저녁에 와, 줄 것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아린이 가져온 물로 간단히 세면을 하고 깔끔한 옷을 꺼내 입었다. 

    "공자님."

    잠시 뒤에 페루가 나타났다. 

    "이야 페루 얼굴 좋아졌네. 다크 서클도 없어지고."

    "네? 감사합니다. 공자님도 난리 났던데요. 아, 지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식당에 가셔야해요. 후작님이 나오시기 전에 가있어야 합니다."

    "알겠다."

    페루를 따라서 대식당으로 갔다. 그곳엔 이미 자리가 차려져 있었고, 콜린과 라온도 와 있었다. 

    "흥."

    콜린이 똥 씹은 표정인 것을 보니, 저 녀석도 내가 루키 학살자라는 칭호를 얻은 걸 들었나 보다. 피식 웃고 자리에 앉았다.

    "오셨습니까, 형님."

    "그래. 잘 잤어?"

    "네!"

    그에 비해 라온은 생긴 건 양아친데 행실은 예의도 바르고 똑 부러진다. 이 녀석만큼은 잘 챙겨주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후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잘 잤느냐?"

    "네."

    "잘 잤습니다."

    "오랜만에 제 침대에서 자니, 좋았습니다."

    "그래. 나도 많이 나가봤지만, 집이 제일이다."

    후작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너희들을 왜 불렀는지부터 말해주마."

    이렇게 바로 본론이 나올지 몰랐는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콜린의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후계자 선정을 위한 시험을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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