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아, 아..."
어제 천무지체가 됐다는 메시지를 보고 정신을 잃었는데 일어나보니,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흠."
몸이 너무도 가벼워서 약간의 허리반동만으로도 몸이 일으켜졌다.
"몸이 깃털 같다는 게 이런 건가."
몸이 가벼운 게 다가 아니었다. 무공을 익히고 나서 거리감에 대해 굉장히 민감해 졌는데 어제와 시야가 확연히 달랐다.
키가 커진 건가.
눈높이에 차이가 날 정도로 시야가 달라졌다. 분명히 키가 커진 것 같았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이름: 유렌 록스]
[특성: 창조주의 눈, 사천당가(四川唐家), 백독불침(百毒不侵), 천무지체(天武肢體)]
[특이사항: ]
[싱크로율: 89.01%]
오랜만에 상태창을 보니, 꽤나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천무지체라니, 실화냐..."
천무지체는 스토리가 중반이상 진행되었을 때 주인공이 얻게 되는 소설 최강의 신체다. 한 번 보면 어떤 자세나 기술도 따라 할 수 있는 하늘이 내린 무(武)의 그릇이다.
거기다 점점 신체가 성장하고 적응하는 특징도 가지고 있었다.
천무지체라면 모든 검술의 형(形)만큼은 마스터 할 수 있겠네. 이러면 검이나 권을 배워도 되겠는데.
"이곳에 와서 얻은 진짜 기연은 아그네스가 아니라, 천무지체였어."
[뭐? 너 내 욕 한 거지.]
"와, 눈치 빠른 거 보소."
[이 자식! 너같이 버릇없는 주인은 처음이야!]
팔찌로 변해 있는 아그네스는 윙윙 거리면서 내 팔을 흔들었다.
똑똑.
"대공자님."
"들어와."
기라녹스는 이미 세면까지 마쳤는지, 물기 있는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아스 성까지 내일 안에 아스성에 도착하시려면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나갈게."
"그럼 아침식사를 시켜 놓겠습니다."
"그래."
기라녹스를 내보낸 후 간단히 세면을 마치고 아래로 내려갔다. 빵과 스프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길을 나섰다.
"흐음..."
"왜?"
기라녹스는 무언가를 고민하는지 계속 내 옆에서 촐랑거리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네?"
"너 왜 그러냐고"
"이런 말하면 미쳤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요. 공자님 키가 좀 많이 커지신거 같아서요."
"아니, 나도 느끼고 있어."
기라녹스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티가 날정도로 커졌다는 뜻이다.
"제가 대장장이다 보니, 길이나 무게를 굉장히 잘 보거든요. 근데 공자님 키가 어제에 비해 6cm정도 커지신 거 같아요."
기라녹스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내 위아래를 살피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가보다.
"근데 그냥 커졌다가 아니라, 수치까지 알고 있는 거야?"
"어제 공자님 키가 176cm였는데 지금은 182cm정도 되세요."
"헐, 눈대중이 아니구나."
"네. 대장장이들은 다 알 걸요. 일종의 직업병이죠.
직업병 참 별나다. 어찌됐든 기라녹스 덕에 내 정확한 키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좋은 건가.
기라녹스와 남자의 키에 관해서 가벼운 잡담을 하면서 아스 성으로 향했다.
하루를 노숙하고 그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아스 성에 도착했다.
"그래도 마차를 얻어 타서 빨리 도착했네요."
"그러네. 예상은 저녁 넘어서 도착이었으니까."
"이 후덥지근한 화로의 향기. 후끈후끈 한 게 역시 아스 성이 좋네요."
예전에 방문한 아스 성은 기라녹스의 말대로 찜질방처럼 후끈 거리고 더웠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천무지체의 효과로군.
천무지체에는 수화불침(水火不侵)의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인지, 얼마 전에 아스 성에 왔을 때와 달리 전혀 덥거나 끈적거리지 않고 상쾌한 상태가 유지 되고 있었다.
"바로 마탑으로 가자."
"넵!"
마탑에 도착하자, 예전에 봤던 아저씨는 없어지고 푸른 로브를 입은 소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법사라기엔 너무 어려보이는 외모였다.
"어서 오세요!"
"마법사님은 어디 계시나요?"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기라녹스가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에? 여기 있잖아요. 여기!"
소녀는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 세계엔 어리지만, 강한 존재들이 많이 있다. 외모가 어려보일 수도 있는 거고, 실제로도 어릴 수 있지만, 겉으로만 평가하다간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
"워프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어디로 가시죠?"
"왕도로 갑니다."
마법사 소녀는 탁자로 가서 꼼지락 거리더니, 작은 막대기를 가지고 왔다.
"왕도로 워프를 하기 위해서는 신분확인이 필요합니다. 왕족에게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왕성이 아니라, 왕도를 가는데요?"
"맞아요. 왕도로 가도 신분 확인이 필요합니다. 저도 귀찮은데 필요한 절차라서요."
마일리지를 위해 이름을 적는 게 아니라, 신분확인을 한다니, 난 이런 설정 한 적 없다.
이건 따지자면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들어가려면 민증 검사를 해야 한다는 건데 어이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네. 난 록스 후작가의 유렌 록스, 이 녀석은 내 대장장이인 기라녹스요."
"유렌 록스... 유렌 록스?"
별 생각 없이 내게 막대기를 들이밀던 소녀 마법사가 고개를 세차게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반짝이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헤엑, 정말 유렌 록스에요? 강철의 마법사?"
마탑에서 오크 투사를 확인했기 때문인지 이곳에선 내 이름이 널리 퍼져있었다.
"뭐?"
"강철의 마법사라고?"
"유렌 록스?"
주변에서 신경을 끄고 할 일을 하던 마법사들이 물건들을 뒤집으면서 내게 달려왔다.
"유렌님 대체 무슨 마법을 사용하시는 건가요?"
"그런데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데요."
"하지만 병사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실제로 오크 투사의 상처는 검으로는 만들 수 없는 상처야."
"단검이 끝도 없이 나온다던데 그건 어떻게 하신 건가요?"
"단검으로 목표물 지정은 대체 어떻게 하시는 건가요? 수식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내가 답변을 할 허용범위를 넘어섰다. 거기다 점점 마법사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내 옆에 있던 소녀 마법사는 마법사들 사이에 낑겨서 보이지도 않았다.
쿵!
땅을 내리찍는 소리가 들린 후 이곳에 있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말을 해도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일런스! 침묵 마법이다!
"여전히 너희들은 적당히 라는 걸 모르는 구나."
마법사들 사이에서 잘생긴 중년인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걸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말을 하지 못 하고 뻐끔 거리고, 중년인 혼자 소리를 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유렌 공자님. 이 녀석들이 호기심이 많아서..."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 역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일단 다른 곳으로 가시죠."
우웅.
중년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와 기라녹스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는 주문도 수식도 없이 순식간에 두 명을 이동시킨 것이다.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여기는?"
"제 연구실입니다. 그곳에 있다간 끝이 없을 거 같아서 임의로 이동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창조주의 눈을 쓰지 않아도 이 마법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복덕방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미소를 보이고 있지만, 그는 저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수천 명을 죽이는 학살자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이름: 유비온]
[특성: 마나친화lv4, 공간장악lv4, 고속계산(高速計算)]
[호감도: 0(중립)]
역시 맞네. 이 음흉한 새끼.
"아스 성 지부의 장을 맡고 있는 유비온라고 합니다."
"유렌 록스라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강철의 마법사 유렌 록스 공자님"
유비온은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속을 알고 있는 나는 그 미소에서 일렁이는 어둠이 보이는 것 같았다.
"탑을 찾아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왕도로 공간이동을 하려고 합니다."
"아, 그럼 제가 보내드리겠습니다."
유비온은 잘 되었다는 듯 손뼉을 쳤다.
"이곳에도 공간이동을 위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유 없는 호의는 받지 않는 게 신조라서요. 제값을 치르고 가겠습니다."
"하하, 오해가 있군요, 돈은 내셔야죠. 제 말은 아래로 가시면 복잡하실 테니 여기서 이동시켜드린다는 겁니다."
좀 걸리는데,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나.
이 자식의 공간이동을 받기 꺼림칙해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 이상 거절하면 오히려 관심을 끌 거 같았다.
"알겠습니다."
나와 기라녹스는 그에게 왕도까지의 워프비용을 내고 마법진에 올라섰다.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유비온님은 제게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네요."
"하하, 저도 유렌님께 궁금한 게 많습니다만..."
웃으며 말하던 유비온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과는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아서요."
후웅.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린 다른 공간으로 와 있었다. 유비온은 사라지고 앞에 문이 있었다.
"왕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상쾌한 목소리를 가진 여마법사가 인사를 해왔다.
"왕도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또 찾아주세요!"
그녀의 인사를 뒤로 하고 곧바로 마탑을 나왔다.
"진짜 아무 것도 안 느껴졌는데 우리가 왕도에 온 거에요? 진짜 대단하네요. 마법이란 건."
기라녹스의 말을 들으며 유니온이 내게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몰라, 몸을 점검해 봤는데 딱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정말 우연히 만난 건가, 요 며칠 왜 이렇게 무서운 인간들만 만나나 몰라...
"우와, 무슨 건물들이 이렇게 화려하죠."
왕도는 재개발 된 도시 같이 구역이 깔끔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건물들은 대부분 3층 이상에 깔끔한 외관을 하고 있어서 오랜만에 현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같은 나라 맞나요? 아스 성도 꽤 괜찮은 곳인데 여긴 신세계네요."
기라녹스는 건물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건물들뿐만이 아니야. 사람들의 옷과 신분, 외모까지도 비교 불가야. 여긴 왕국의 중심이니까."
"그러네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귀티가 나는 거 같아요."
기라녹스는 자신의 허름한 옷차림과 반대편에 있는 신사복장의 귀족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부러우면 내가 준 돈으로 옷이나 사."
"에이, 제가 무슨..."
우리는 왕도를 구경하며 왕립 기사 학교로 향했다. 구역이 잘 정해져 있고 안내표지도 있어서 찾아 가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여기네요. 왕립 기사 학교. 여긴 더 무지막지하네요."
"무슨 대학교 같네."
"네?"
"아니야."
기사 학교는 대학교 같이 다른 형태의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아마 커리큘럼에 따라 다른 곳에서 수업을 받는 모양이다.
나는 커리큘럼이나, 건물이나 아무 것도 정하지 않았는데 그런 설정들이 알아서 돌아간다는 게 참 신기했다.
"어서 오세요."
맨 앞에 있는 가장 큰 건물에 들어가니, 안내원이 인사를 해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면회를 신청하려고 왔습니다."
"본인의 성함과 찾으시는 학생의 성함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전 유렌 록스, 찾는 사람은 제 동생인 콜린 록스입니다."
"아!"
안내원은 내 이름을 듣자, 탄성을 터트렸다.
"오크 투사를 잡으셨다는 유렌 록스님이시군요!"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돌았다고?
"유렌 록스라고?"
안내원이 말을 할 때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곳엔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과 광채를 발하는 은안을 가진 사람이 서있었다. 이 왕국에서 저렇게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사람은 한 가문뿐이다.
"엘리온 공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