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아그네스 (21/241)

아그네스

2단계 개방이라니, 나는 저런 거 설정해 둔적 없다.

"이, 이게 대체 뭐죠?"

기라녹스는 허공에 떠서 빛나는 아그네스를 보고 겁에 질렸는지, 이빨을 연속으로 부딪쳤다. 

나도 몰라. 이 자식아.

주인공이 아그네스를 쓸 때는 주문을 통해 이름을 부르면 계약이 완료되고 바로 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아..."

아그네스의 빛이 더 찬란해 지자, 기라녹스가 아그네스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려고 했다. 

여기가 골목이라 다행이지, 대로였으면 난리 났겠네.

[2단계 개방이 완료되었습니다.]

[아그네스와 영혼의 계약을 진행하시겠습니까?]

"계약한다!"

내가 계약을 외치자마자 무언가가 심장에 박히는 감각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서 빛나던 검은 사라지고 투명하고 작은 무언가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이 투명한 게 아그네스인가.

내가 처음 등장시켰던 아그네스와 다른 모습이라 당황스러웠다. 

[대체 뭐야!]

굉장히 귀여운 여성의 목소리가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울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설정대로 귀여운 여자 성우의 목소리네. 

기라녹스가 멍 때리고 있는 것을 보니 아그네스의 목소리는 내게만 들리고 있나보다.

[뭐냐고!]

"뭐가?"

[너 뭔데 나를 해방시켰냐고! 재능이라곤 쥐뿔도 없는 놈이!]

"엑!"

아, 이 녀석 소설이랑 성격이 완전 딴판이네. 내가 검의 재능이 없어서 이러는 건가?

소설 상에서 아그네스는 주인공의 재능에 반해서 모든 것을 퍼주는 열성팬이 된다. 

존댓말을 사용하며 주인공을 위해선 뭐든지 하는 노예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내겐 처음부터 시비로 시작한다. 

[와, 어이가 없으려니까! 이런 무능한 놈과 계약이 되다니! 열 받아서 뒈지겠네.]

"좀 진정하고."

귀여운 여자 목소리로 저런 소리를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진정? 지인정? 생각해봐! 몇 백 년 만에 깨어났는데 세상 제일의 추녀와 결혼하래. 너라면 열 안 받겠냐? 무재능아!]

아그네스는 진심으로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거기다 내 해방주문은 어디서 알아 온 거야! 나는 어떻게 알아낸 거고,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누구긴 누구야. 너를 만든 소설가지.

"예언가에게 들었어."

[예언가? 말도 안 돼! 아직도 대예언가가 존재한다는 거야?]

"그래."

대예언가는 내가 소설의 개연성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 논 설정이다. 대예언가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고, 사람과 물건의 위치까지 모두 알고 있다.

모든지 나오는 현실의 검색 사이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길. 예언가는 하필이면 너 같은 무재능에게 나를 알려준 거지?]

아그네스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뻔하다. 그녀 역시 소설 속 물건이기 때문에 내 무공과 내공에 대해 알지 못 하는 것이다.

아그네스에게 나는 어떠한 특성도 없는 그냥 무능이로 보이고 있을 거다.

[그래도...]

"어?"

[얼굴은 봐줄만 하네.]

"..."

아그네스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차라리 재능을 밝히는 게 낫지. 검 주제에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더 어이가 없다. 

목소리를 여성으로 설정했다고, 여자가 되어버린 건가.

"저기 유렌님?"

"아, 미안."

아그네스와 대화를 하느라, 기라녹스를 너무 방치해뒀나 보다. 그가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말을 걸어서."

"네? 설마 자아가 있는 건가요?"

"그래. 이 녀석은 아그네스라고 해."

"아그네스..."

역시나 모르는 이름인 듯 기라녹스는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숙녀의 이름을 함부로 알려주지 말라고!]

"괜찮아. 이 녀석은 내 소속이니까."

[흥!]

숙녀에다가, 흥이라니, 정말 여자와 다를 바가 없네. 

아, 그러고 보니 물어볼게 있었지. 

"아그네스, 2단계 개방은 뭐야?"

[아, 그거 나도 전혀 몰랐는데 그냥 머릿속에서 생각났어.]

아그네스는 정말 내 얼굴은 마음에 들었는지, 갑자기 조금 친절해졌다. 

"갑자기 생각났다고?"

[그래. 난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지만, 네가 나를 해방해주면서 태어났을 때부터 알던 것처럼 생각이 났어.]

내가 무공을 배운 방식과 똑같이 머릿속에 박히는 방식인가 보다. 

"그래서 그 2단계는 뭔데."

[분열이야.]

"분열?"

[그래. 나는 한 번에 한가지로만 변할 수 있어. 어? 너 근데 내 능력도 알아?]

아그네스가 갑자기 날카로운 질문을 해왔다. 

"예언자가 말해줬지."

뭐든지 통하는 예언자로 일단 넘겼다. 

[그래? 그럼 얘기가 빠르지, 이제 나는 동시에 두 가지로 변할 수 있어. 검과 검, 검과 갑옷을 동시에 만들 수 있지. 어때 엄청나지?]

"그래. 엄청나네."

와, 개사기 됐네.

아그네스에겐 침착한 척 했지만 엄청 놀랐다. 그녀의 말 대로 라면, 두 개의 아그네스가 생긴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근데 어차피 너는 못 써. 내가 봤을 때 너는 평생 수련해도 오러를 못 쓰거든. 하, 진짜 얼굴의 반의반만 실력이 따라갔어도.] 

"그거 쓰는데 오러가 필요해?"

[그래. 많이 필요해. 너는 평생 개방 할 일 없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럼 상관없다. 내공을 오러대신 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실험이 끝났으니.

"기라녹스"

아그네스하고는 천천히 얘기하고 일단 기라녹스의 일을 끝내야 할 거 같아서 입 벌리고 있는 그를 불렀다. 

"예, 예!"

"여기 있는 검들 다 얼마지?"

"글쎄요. 대략 30골드 정도 될 거 같은데요."

"그래?"

주머니에서 30골드를 빼서 그에게 주었다. 돌아갈 워프 비용이었지만, 어차피 돈과 보물을 훔쳐서, 아니 빌려 갈 테니 상관없었다. 

"정리하는데 시간은 얼마나 필요해?"

"삼일, 아니 이틀 정도만 주시면 됩니다."

"그럼 이틀 후 정오에 중앙에 있는 분수대에서 보자. 그곳이 만남의 광장 같더군."

오늘 돌면서 보니, 분수대에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 구경하며 기다리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도망치면 대륙 끝까지 쫓아간다."

"힉! 절대, 절대 도망치지 않습니다."

장난으로 던진 농담을 진심이라 생각했는지, 기라녹스가 기겁을 했다. 

"아그네스 와라."

내가 부르자, 허공에 떠있던 아그네스가 환하게 빛나더니, 내 손가락에 감겨서 아름다운 반지가 되었다. 

[어? 너 대체 뭐야! 어떻게 나를 바로 쓰는 거야?]

아그네스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머릿속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잡아야 한다. 그런데 알려주기도 전에 내가 변화를 성공시켰으니, 그녀가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네 주인이지, 뭐긴 뭐야."

[이익!]

그녀가 아무리 입으로 떠들어도, 계약에 묶인 이상 내가 주인이고, 아그네스는 내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너 정체가 뭐냐고!]

"나도 너한테 할 말도 많고 시킬 것도 많으니까 가서 얘기 합시다."

[시, 시키다니 내게 뭘 할 셈이야!]

아, 벌써 피곤해.

**

다음날 나는 근처 숲에 가서 아그네스를 시험해보았다. 

그녀는 계속 찡얼거리면서도 내 명령에 거부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변해 주었다. 

가장 걱정했던 것은 내 머릿속에 있는 사천당가 암기의 구조를 그대로 재현 할 수 있냐는 거였는데 다행히 모든 암기를 그대로 만들 수 있었다. 

거기다 아그네스의 힘 때문인지 설명보다도 더 강한 위력을 내고 있었다. 

한 가지를 더 시험해 보기 위해, 나는 약속의 날인 오늘도 숲속에 와 있었다. 

[너 오늘 약속 날이잖아. 안 갈 거야?]

"아니, 한 가지만 더 해보고."

[어, 어제도 내 몸을 그렇게 주물러 놓고 또 뭘 하려고?]

"누가 들으면 오해한다..."

어제부터 변신시키면 계속 저 소리를 해댄다. 상대하기 정말 피곤하다. 

[근데 네가 변신시키는 거 대체 뭐야. 뭔데 그런 위력을 내는 거야?]

"암기라는 거야."

[암기는 나도 알지! 하지만 그런 정교한 형태는 한 세대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못해도 수백 년 동안 제대로 잡은 형태야.]

역시 무기라 그런지,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 게 있어."

[흥, 말 안 해줄 건 알고 있었어. 그래서 오늘은 뭘 할 건데?]

"분열."

[하아, 하고 싶은 거야 이해하지만, 오러나 마나가 있어야 한다니까.]

"오러와 마나로 어떻게 하는 건데?"

[내게 힘을 주입하면서 두 개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돼.]

"간단하구만."

나는 아그네스의 말대로 양손에 두 개의 단검을 이미지 하며 그녀에게 내공을 주입했다. 

[꺅! 뭐, 뭐야 이 힘은!]

아그네스는 내가 주입한 내력에 놀랐는지,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깨끗한 힘이라니! 이런 건 처음 느껴봐!]

만독자전신기의 내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그네스는 희열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냈다. 

우웅

그와 동시에 내 양손에는 내가 이미지 했던 단검이 생겨났다. 

[유렌, 뭐야 대체!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데 왜 내가 느끼지 못한 거지?]

"너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네."

아그네스는 내가 이름을 알려줘도 계속 너라고만 했는데 이제 나를 인정했는지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고 뭐고, 네 힘 뭐냐고! 나는 주인의 힘을 파악 할 수 있게 만들어 졌어. 네 특성과 재능, 그리고 현재의 힘을 느낄 수 있는데 네게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단 말이야.]

아그네스는 자신이 내 힘을 느끼지 못 한 게 분하다는 듯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그게 네 한계라는 거지."

[으윽!]

"나 같이 홀로 존재하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거든, 너 같은 평범한 유물은 내 힘을 모르는 게 당연한 거야."

오늘 한 방에 아그네스를 놀려주기 위해서, 어제 내공을 전혀 쓰지 않았다. 말 많은 아그네스가 한 마디도 하지 못 하는 것을 보니, 정말 시원했다. 

"이제 주인 말 잘 들어라. 주인의 위대한 힘도 느끼지 못하는 허접한 유물아."

[이익! 너!]

후우웅.

나는 양손이 든 단검 형태의 아그네스를 그대로 내던졌다.

쿠구궁!

아그네스는 앞에 있는 나무를 꿰뚫고 뒤에 있는 나무에 박혔다. 

힘을 빼고 던져도 이 정도라니, 내가 강해진 것도 있지만, 아그네스의 파괴력이 엄청나네. 

아그네스를 향해 손을 뻗자, 날아갔던 아그네스가 다시 내손에서 나타났다. 

사실 이게 최고 장점이지.

아그네스는 검보다도 암기에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았다. 수  많은 암기로 변할 수 있으며 던진 이후 바로 회수가 가능하다 

아그네스는 검이 아니라, 암기를 위해서 태어난 유물이었어. 역시 주인공에게 넘기지 않기를 잘 했다! 

"할 건 다 해봤으니, 돌아가자."

[약속시간이 된 거야?] 

"시간이 좀 남긴 했는데, 미리미리 가 있는 게 사회인의 자세야."

[사회인?]

또 현실에서 쓸법한 말이 나왔다. 나는 아직도 현실물이 덜 빠졌나 보다. 

아스 성으로 들어가서 성의 중심에 있는 분수대를 향했다. 

"여전히 사람 무지 많네." 

성안은 기사와 용병들로 북적이고, 대장간에서는 열심히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복잡하고 시끄럽고 사람 사는 거 같네."

[이게 사람 사는 거라고?]

"원래 사람이란 게 복잡하거든."

이곳을 보고 있으니 시장이나 마트를 보는 것 같았다. 

"아직 안 왔나 보네."

분수에 도착했지만, 내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는지 기라녹스는 보이지 않았다. 분수대에 걸터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좋을 때다."

용병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팔짱을 끼고 꽁냥대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흐뭇했다. 

이런 게 아저씨 마음인가. 

"유렌?"

커플을 쳐다보고 있을 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기라녹스의 목소리가 아닌데.

나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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