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외출
"급해 보이던데, 무슨 일로 보자고 했느냐."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후작을 찾아 가자, 그는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 해주었다. 이제 완전히 나를 믿고 있는 거 같다.
"잠시 외출하려 합니다."
"외출이라? 흠, 뭐 한동안 안 나가긴 했구나. 후작령의 마을에 가려느냐?"
"네."
속여서 죄송하지만, 엄청 멀리 갈 거에요.
"그래. 갔다 오거라. 며칠이나 갔다 올 생각이냐?"
"옆 마을까지 갈 생각이니, 일주일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이라, ㄴ호위는 어쩌겠느냐?"
호위라, 올게 왔다. 절대 받아들이면 안 된다. 무조건 나 혼자 나가야한다.
"딱히 필요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이 록스의 대공자다. 네 위치를 자각 하 거라."
"겨우 앞마을에 가는 건데 호위는 필요 없습니다. 혼자 감당 할 수 있습니다."
"쯧, 네 녀석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건 인정하마. 하지만 아직 네 한 몸 지킬 무력은 갖추지 못 했다."
후작은 한참 멀었다는 듯 혀를 차며 나를 내려 보았다.
"세상에는 무서운 게 많아. 네가 스스로를 보호 할 무력을 갖췄다고 해도 독에 중독되면 어쩌겠느냐. 그 순간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잡혀버릴 거다."
아닌데요. 독 안 통하는데요.
"누가 네 음식에 수면제를 넣는다면 어쩌겠느냐, 일어나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포박되어 있을 거다."
그것도 아닌데요. 수면제도 안 통하는데요.
아쉽게도 할 말은 많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순간에 호위가 있으면 너를 구해줄 수도 있고, 시간을 끌어 줄 수도 있다. 호위는 무조건 데려가거라. 명령이다."
어쩔 수 없지. 플랜 B로 간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알겠습니다."
"그래. 이해해주니 고맙구나."
이해 한 게 아니라, 후작이 양보 할 생각이 없어보여서 내가 물러난 것뿐이다.
"그럼 호위는 누구를 데려가겠느냐?"
"정해주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아린은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는데 부르면 미안하잖아요."
"호오!"
후작은 내 배려에 감탄한 듯 탄성을 터트렸다.
방금 발언으로 호감도 올랐겠네.
"그래. 네가 불편하지 않을 사람들로 골라주마. 그럼 언제 출발하겠느냐?"
"이틀 후에 출발 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마."
"감사합니다."
나는 후작에게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이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잘 다녀 오거라."
"네."
후작의 방을 나와서 곧바로 내방을 향했다.
"내일 바로 출발하려면 준비 좀 해야겠네."
후작에겐 이틀 후라고 했지만, 나는 내일 출발 할 생각이다. 호위 따위를 데려가면 불편해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호위를 모두 떼놓고 하루 먼저 출발하는 것이 내가 정한 플랜B다.
플랜B는 말없이 가출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만, 워낙에 망나니였던 과거가 있어서 괜찮을 거 같다.
"마법 주머니가 있으면 편할 텐데, 젠장."
저장 공간이 압축되어 있는 마법주머니를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내 방엔 그런 물건이 없나보다.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느다.
똑똑.
주머니 찾는 것을 포기했을 때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좋은 아침입니다. 대공자님."
들어온 사람은 페루였다. 하루 푹 자서 그런지, 눈 밑에 다크서클은 많이 사라졌다.
"너 왜왔냐? 가서 쉬라니까."
"아, 그냥 인사만이라도 드리려고."
"난 괜찮으니까, 그냥 가서..."
잠깐만, 이 녀석 그거 있잖아, 마법 주머니.
"야, 페루야."
"네."
"마법 주머니 좀 줘봐라."
"예...?"
페루가 식겁하더니, 내게서 한 발 물러섰다.
뭔가 삥 뜯는 느낌인걸.
"무슨 일로..."
페루는 어쩔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내게 마법 주머니를 넘겨주었다.
"아 나 여행 가는데 배낭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대공자님 마법주머니 없으십니까? 귀족 분들은 필수로 가지고 계실 텐데."
"몰라. 찾아봤는데 없던데."
"그, 그렇군요."
"아, 그리고..."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돈 좀 있냐?"
"에?"
어차피 삥 뜯은 거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만일 내일 예산담당관이 돈을 준비 안했다면 아무 것도 없이 나가야 하는데 일단 이 녀석 돈이라도 뜯기로 했다.
"그, 그게 조금 있긴 한데요."
"내가 나갔다와서 2배로 줄게. 좀 빌려 줘봐."
빌려달라고 했지만, 아마 내 표정은 강탈과 다를 바가 없었을 거다. 페루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도, 도박이라도 하시게요?"
"뭔 소리야. 보물찾기 하고 올 거야."
"하아..."
페루는 내말을 믿지 않고 도박에 돈을 가져다 바친다고 생각했는지, 처음으로 내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너 내 앞에서 한 숨 쉬었냐?"
"아뇨. 그냥 숨 쉬었습니다. 하하!"
페루는 언제 얼굴을 찌푸렸다는 듯 태양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페루의 생각이 훤히 보였다. 그는 지금 괜히 왔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거다. 그의 속마음을 생각하니 웃음만 나왔다.
"인마. 진짜 네 돈 몇 배로 돌려줄게."
"알겠습니다. 그럼 주머니 주세요. 주머니에 돈 넣어가지고 가져오겠습니다."
페루는 결국 포기했는지, 주머니를 가지고 나가서 돈을 넣어 왔다.
"호오, 꽤나 많네."
"제 봉급 모은 거 전부랑, 그들에게서 받은 돈을 조금씩 빼 놓은 겁니다."
"고맙다."
상당한 금화가 주머니에서 나왔다. 이정도면 그곳에 갈 여비가 될 거 같았다.
"고맙다. 정말 몇 배로 돌려줄게."
"아닙니다. 그냥 돌려만 주셔도..."
페루는 전혀 나를 믿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도박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됐고 나를 믿어라."
"예..."
"그리고 이거 지금 먹어라."
나는 페루 앞에 붉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구슬을 주었다.
"이건..."
"한 달분의 해독제다. 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지금 먹도록 해."
"아..."
페루는 떨리는 손으로 내가 만든 구슬을 잡았다.
사실 저건 정원에 있는 장미를 내공으로 뭉쳐놓은 거였다. 한동안 창가에 놔둬서 냄새를 빼놓았다.
"솔직히 얘기하지. 너는 지난 시간 동안 꽤나 잘해주었다. 지금처럼만 한다면 나는 네 독을 완전히 해독해 주겠다."
"도, 돈을 계속 바치라는 소린가요?"
"아니야!"
페루는 나를 양아치로 보고 있나 보다.
"너도 카이나와 카록스의 가문인 리빙타인 가문을 좋아하지 않겠지?"
"그건..."
말은 하지 않았지만, 페루의 표정만 봐도 그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너를 중독 시켰을 뿐이지, 감정은 없다. 신뢰관계가 쌓인다면 너를 진짜 내 집사로 쓸 거야. 리빙타인에 복수도 해주마."
"신뢰관계라는 건 어떻게 파악하실 거죠? 제가 거짓말을 할 수 도 있잖아요."
"나는 보이거든,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호감도라는 사기 스킬이 있으니까.
"아..."
페루가 입을 벌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저 표정, 저건 분명 나를 미친놈으로 보는 것 같았다.
"진짜야. 보인다고."
"네..."
"이자식이!"
**
"대공자님. 아침입니다."
다음날 아침, 아린이 나를 깨우러 왔다.
"내일 출발이시니, 오늘은 그 준비를 하실 건가요?"
"아아, 그래야지. 근데 아린."
"네?"
"돈 좀 있어?"
아린의 눈빛에 냉기가 도는 게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일어나자마자 돈 얘기는 좀 아니었나.
근데 워프 비용이 워낙 비싸다 보니, 어느 정도의 여윳돈은 준비해야 한다.
"무슨 일로 돈이 필요하신 거죠? 예산담당관에게 받으시면 되지 않나요?"
그거 못 받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그냥. 돈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도박인가요?"
아린은 페루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유렌 녀석 예전에 도박으로 돈 좀 날렸나보다.
"정말 도박은 아니야. 묻지 말고 조금 만 빌려 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거절 할 거 같았던 아린은 나갔다가 돌아와서 내게 작은 보자기로 주었다.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말씀 믿겠습니다."
"물론이야."
아린은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호감도가 떨어질까 봐 걱정했지만, 이제 그녀는 나를 완전히 믿고 있었다.
"자 그럼, 나도 준비할까."
내 방 책상에 미리 적어둔 편지를 남기고 수련장에 가듯이 저택을 벗어났다.
"돈을 빌려서 다행이네."
중간에 예산담당관에게 들려서 돈을 받기는 했지만, 마을에서 논다고 해서 그런지 그리 많은 돈을 받지는 못 했다.
미리 아린과 페루에게 돈을 빌리지 않았다면 원하던 곳에는 가보지도 못 할 뻔했다.
"역시 사람은 준비성이 철저해야해."
"대공자님 안녕하십니까!"
내가 스스로의 준비성에 감탄하며 정원을 지나갈 때에 나이든 정원사가 내게 인사를 해왔다.
"그래. 수고해."
자주 만나는 사람이라, 나도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는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평소와는 다른 기이함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이 감각은 대체 뭐지?
정원사의 몸에서 아주 얇고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다.
"왜 그러십니까? 대공자님."
"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에게 창조주의 눈을 쓴 적 없었지.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창조주의 눈을 써보았다.
[이름: 폴레인 록스]
[특성: 쾌검lv4, 오러변화lv4, 검명(劍鳴)]
[호감도: 47(호감) ]
록스라고? 거기다 레벨4? 이 인간 대체 뭐야!
나는 이런 사람을 설정한 적이 없었다. 록스 후작에게도 뒤지지 않는 무력을 지닌 이 할아버지는 누구란 말인가.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 아니야. 수고해."
나는 도망치듯 그에게서 벗어났다. 하지만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했다. 나는 소설 속에 많은 은거기인들을 설정했었다. 하지만 록스가의 정원사에 저런 사람을 넣은 적은 없었다.
록스라는 이름이면 스파이는 아닐 테고, 저 무력으로 정원사나 하고 있다니 대체 정체가 대체 뭐야.
"하, 답답하네."
정원사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후작가의 정문에 도착했다.
폴레인 록스에 대해선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계획대로 움직여야 할 거 같네.
"대공자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정문 앞에 있는 문지기 두 명이 내게 인사를 했다.
"그래. 수고한다."
"외출하십니까?"
"그래."
문지기들은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저건 아마 군대 위병소처럼 이름과 시간을 적어 두는 거겠지. 이제 보고가 들어갈 거야. 시간이 없어.
"그런데 혼자 가십니까?"
"아아, 바로 앞에 뭐 사러가는 거니까."
"그렇군요."
다행히 내가 내일 외출한다는 얘기가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문이 열리자마자 넓고 화려한 마을을 구경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한 방향으로 뛰었다.
이곳의 지리도 위치도 모르는 내가 방향을 정하고 뛰는 이유는 간단했다. 딱 보이는 랜드마크가 있으니까.
녹색 빛으로 둘러싸인 높다란 탑, 마법사들이 모인 마탑으로 향했다.
딸랑.
마탑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 위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오, 커피 집 종소리 오랜만에 듣는군.
"어서 오세요."
녹색의 로브를 입은 미인 마법사가 카운터에 앉아있었다. 무슨 마법이 걸려있는지, 안은 외부에서 보는 것 보다 2배 이상 넓어 보였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워프를 이용하려고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혹시 이전에 이용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용이요?"
"네. 워프는 워낙 비싸다 보니, 마일리지를 쌓아드리거든요."
맞다. 마일리지 내가 설정해 뒀지.
"아뇨. 없습니다."
"그럼 이름을 적어주시겠어요?"
유렌 록스 대신 게임 할 때 가끔 쓰던 닉네임인 ‘폴리온’을 적었다.
"위치는 어디시죠?"
"아스 성입니다."
"아스 성, 꽤나 머네요."
마법사는 중얼거리면서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워프 이용금액은 50골드입니다."
"크음..."
예상했던 대로 더럽게 비싸.
다행히 주머니에는 50골드 보다는 많은 돈이 있었다.
돈을 받은 그녀는 나를 구석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들어가 보니, 방 전체가 수십 개의 마법진으로 둘러 싸여있었다.
"안에서 기다리시다가 노크소리가 들리면 나오시면 됩니다."
"네."
그 말을 남기고 마법사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시작이군."
이번 여행의 최우선 목적은 주인공이 가지게 될 유물을 내가 먼저 차지하는 것이다.
유물의 이름은 영검 아그네스.
세상 어떤 것보다 내게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