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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후작과의 내기 (4) (17/241)

후작과의 내기 (4)

"왜 그러느냐. 말해 보거라"

"후계자의 자리를 주십시오."

내 말을 들은 후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올게 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고 말하면 들어주실 겁니까?"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내 권한 안에 있는 일이지. 그리고 나는 내기를 할 때 네게 뭐든지 들어준다고 했다. 네가 그것을 원한다면 들어줘야겠지."

후작은 들어준다는 말은 했지만, 편한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후계자가 된다면, 나나 후작이나 여러 가지 귀찮은 일에 휩싸이게 될 거다. 

"들어주시겠다면서 표정은 굉장히 불편해 보이시네요."

"크흠..."

"지금 제가 후계자가 된다면 문제가 많을 겁니다. 반발도 일어날 테고, 후작님의 명성이 떨어질 것이며, 아마 동생들과 부인께서도 난리를 치겠죠." 

"커흠..."

사실을 듣는 것이 부끄러운지 후작은 연신 헛기침을 했다. 

"제가 가장 바라는 소원은 후계자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후작님을 생각해서 딱 한 번 양보하죠."

"고, 고맙다."

솔직히 전혀 생각이 없었다. 후계자가 되면 하루 종일 후작에게 1:1로 교육을 받고, 기사단 훈련에 참여해야 한다. 모든 일을 후작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자유 없는 삶이었다. 

사천당가의 숙련도를 올리고 세계에 퍼져있는 기연들을 얻으러 돌아다녀야 하는 내게 그런 곳에 시간을 쓸 여유가 없었다. 

내 계획대로 된다면 앞으로 록스 후작가는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될 테니, 딱히 지금 후계자가 될 필요는 없지.

"그럼 네가 바라는 소원은 무엇이냐?"

"일단 제가 양보해 드린 거 인정하시는 거죠?"

"물론이다. 정말 고맙다." 

원하지도 않는 소원을 버리는 것으로 후작에게 빚을 하나지게 했다. 최고의 결과였다. 

"저는 아린과 크라이드를 제 기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뭐?"

후작은 자신이 잘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귀를 한번 후볐다. 

"지금 제 집사를 해주고 있는 아린과 어제 저와 대결을 했던 수련기사 크라이드를 제 기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게 소원이라고?"

"그렇습니다."

어제 아린은 기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원석일 뿐이지만 앞으로 강력한 기사가 될 크라이드도 찜해 놓기로 결정했다. 

"정말 그거면 되냐?"

"그렇습니다."

후작은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소원을 빌었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최고의 교육과 훈련 받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둘 다 제 사람이니까 다른 놈이 손 못 대게 해주시고."

"그야 물론이지."

후작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구나. 아린." 

"후작 각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린은 허리를 굽혀서 후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니, 유렌에게 고마워해야지. 그건 그렇고 네 집사는 어떻게 하겠느냐? 지금 집사 중에 여유 있는 사람이 없다만."

나는 당연히 그 부분도 생각해 놓았다. 

"저택 주방에서 일하는 페루라는 녀석인 있습니다. 그 녀석을 집사로 쓰고 싶습니다." 

"페루?"

"네. 다만 제가 지정한 게 아니라 후작님이 우연히 지정해주시는 것으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네. 나중에 정리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후작은 이제 완전히 나를 믿는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호감도가 많이 올라간 덕 인거 같다. 

그러고 보니 후작에겐 한 번도 창조주의 눈을 쓴 적이 없군.

[창조주의 눈을 사용합니다.]

[이름: 윌링턴 록스]

[특성: 쾌검lv4, 오러적응lv4, 검제(劍帝)]

[호감도: 74 (신뢰)]

역시 호감도가 신뢰상태라서 내말이 잘 통하는 거군.

원래의 호감도가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건 엄청나게 오른 수치일 거다. 내가 막 깨어났을 때 후작의 눈에서는 냉정함만 보였으니까. 

"아, 그리고 아린은 계속 여기서 살게 해주세요."

"그건 말할 필요도 없지."

후작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네가 말한 것은 빠르게 조치를 취해주마."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네가 뭘 할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믿고 기다리마."

신뢰를 보여주는 후작의 말에 나도 밝은 미소를 보여주고 후작의 방을 나왔다. 

"우아."

뭔가 피곤해져서, 내 방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니야. 내가 망나니짓을 해대서 원래보다 늦게 기회를 잡게 된 건데 오히려 미안하지." 

아린은 아니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기사가 되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래도 되고 싶잖아?"

"...그렇습니다. 검을 잡고 있을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아린은 호감도가 오른 만큼 어느 정도의 속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그걸로 됐어."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왜 페루라는 사람을 집사로 고르신 거죠?"

"아, 걔 말이지."

"저도 그에게 인수인계를 해줘야 하니, 누군지는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걔 첩자야."

"...네?"

어지간히 놀랐는지, 아린이 내게 얼굴을 드리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카록스랑 카이나가 나를 죽이기 위해 보낸 첩자라고."

"카록스라면 은수리 기사단의 단장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카이나님은 현 후작 부인이시고..."

"그렇지."

아린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첩자라는 것을 아신 거죠? 아니, 그것보다 첩자라는 것을 아시면서 왜 집사로 쓰시려는 거죠? 위험하잖아요."

"괜찮아. 걔는 이제 내 명령만 듣게 만들어 놨거든."

"그게 무슨 소리인지..."

"뭐 그런 게 있어. 그 녀석을 이용해서 카이나랑 카록스한테 뜯어먹을 것도 많고."

아린은 당연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다 알게 될 거야."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매일 아침에 나 깨우러 오는 건 네가 해줘."

"계속 저택에서 살 테니,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왜 그러시죠?"

"매일 네 얼굴을 보고 일어나다가 시꺼먼 남자의 얼굴을 보고 일어난다고 생각해봐. 아침부터 기분이 더러워진다고."

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 그녀의 입 꼬리가 올라간 기분이 들었다. 

"너 웃었어?"

"아닙니다."

"웃은 거 같은데?"

"전혀 아닙니다."

**

아린을 보내고 하인들이 퇴근 준비를 할 무렵 방 밖으로 나왔다. 

"대공자님 뭔가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괜찮아."

나를 본 하인 한 명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하인이 내게 먼저 말을 걸은 건 처음인데.

"네. 그럼."

"그래 수고해."

"감사합니다."

하인들은 항상 두려운 눈빛으로 인사만 하고 도망치듯 사라졌었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응원도 받았고, 이제 내 이미지가 변하기 시작하는 구나! 

"대공자님 또 저기 계시네."

"그러게 뭘 하시는 거지?"

1층 바닥을 쓸던 하녀 둘이서 조용히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둘은 속사이듯 이야기했지만 내 귀는 이미 인간의 청각을 넘었는지 그들의 대화가 모두 들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옆에 지나가기만 해도 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는데 지금은..."

"지금은?"

"솔직히 멋있지 않니? 나는 이공자님이 제일 잘 생기신줄 알았는데, 대공자님이 최고였어."

하녀들은 나를 살짝 쳐다보면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너 예전에 대공자님 무서워서 저택에서 일하기 싫다고 했잖아."

"얘는! 그때는 그때고, 지금 대공자님은 달라지셨잖아. 외모도 성격도 모두 변하셨으니, 내 마음도 변한 거지."

"어이구 그래서 어제 ‘대공자님 힘내세요.’ 라고 소리 지른 거니?"

어제 나를 응원해준 사람이 너였구나. 정말 고맙다. 

"헉!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어제 일하느라 못 갔잖아."

"소문 다 났거든, 티렌이 대공자를 사모한다고."

‘티렌’이라고 하는 구나. 내가 꼭 기억할게.

"윽."

"근데 뭐 확실히 저런 얼굴은 반칙이긴 하지."

"그러니까. 진짜 멋있잖아."

지금의 내 얼굴은 이전과는 하늘과 땅차이가 나니까. 저들이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구나.

내가 하녀들을 바닥청소를 다하고 도구를 정리 할 때 쯤 내가 찾던 놈이 로비로 나왔다.  

왔네.

나는 그를 보고 새로 익힌 신기술을 사용했다. 

[전음입밀(傳音入密)을 사용 합니다.]

전음입밀, 간단히 전음은 은밀하게 음성을 전달하는 무공이다. 다른 사람은 들리지 않고 내가 지정한 사람에게만 내 목소리를 전달 할 수 있다. 

[야.]

"헉!"

내가 전음을 사용한 대상은 당연히 페루였다. 그는 깜짝 놀랐는지 손으로 귀를 움켜잡았다. 

[놀라지 말고 들어라. 나 유렌이다.]

"히익!"

놀라지 말라기엔 너무 자극적이었는지 페루는 계속 움찔거리고 있었다. 

"페루야 왜 그러니?"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페루가 내지른 비명에 다른 사람들까지 로비로 나왔다. 

[오늘 밤에 내방 찾아오도록.]

페루는 끙끙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겁이 많네."

페루에게 말을 전했으니, 방으로 들어가서 만독자전신기를 운용했다. 3성에 오른 이후 수련 중에도 외부의 기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내공심법을 해도 상관없었다. 

똑똑. 

페루가 왔군.

"들어와."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잘 지냈지?"

"네..."

전혀 잘 지낸 얼굴이 아닌데. 다크 써클 진한 거 보소.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너 조만간 직업이 바뀔 거다."

"네?"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후작님이 너를 내 집사로 지정해 주실 거야."

"엑?"

나는 페룬에게 후작에게 했던 말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 그렇군요."

"네가 내 집사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을 거야. 그건 엄청난 기회니까, 오히려 놓치는 게 이상하다는 의심을 사겠지."

"그렇죠."

"네가 집사가 된 이후 카록스나 카이나가 네게 더 많은 지시를 내릴 거다. 독을 더 많이 풀라고 하던가, 더 여러 독을 먹이라고 하던가."

"그럴 거 같습니다."

페루가 동의 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내가 활약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더욱 초조하겠지. 자신들의 피가 섞인 둘째나 셋째를 후계자로 만들고 싶을 테니."

"저도 어제 봤습니다. 정말 멋있었습니다."

"고맙다. 어찌됐든 그들에게 돈을 왕창 받아서 스네이크 마인드를 사와." 

"스네이크 마인드라면 백 마리의 독사에게서 축출한 독이잖아요."

"맞아."

페루는 독술사답게 이름만 들어도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있는 대로 돈을 뜯어서 독을 사와."

"아,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남은 독 없어?"

"네? 그때 드렸던 독은..."

"그건 그날 다 먹었지."

"헉!"

나는 페루의 옅어진 동공을 읽을 수 있었다. 저 녀석은 더 이상 나를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내게 공포를 느끼는 거 같았다.

"저기 대공자님은 혹시 마법사신가요?"

"마법사?"

"네. 아까의 메시지 마법도 그렇고."

그는 전음을 메시지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희같이 직접 독을 다루는 독술사와는 다르게 마법으로 독을 다루는 흑마법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네. 전에 저를 중독 시킨 마비독도 그렇고 대공자님이 흑마법사가 아니실지."

아직은 흑마법사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기 때문에 흑마법사라고 해도 상관없으려나. 그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건 한참 후니까. 

"제, 제가 괜한 질문을..."

내가 아무 말하지 않자, 겁을 먹었는지 페루가 부들거렸다. 

"그건 네 좋을 대로 생각해. 일단 내말은 다 알아들었지?"

"네. 그럼 독은 모두 스네이크마인드로 구입하나요?"

"음, 일단 5병 정도만 사고 돈 남으면 여러 가지 사와. 전에 샀던 건 필요 없으니까 말고."

독은 뭐든 먹으면 도움이 될 테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어디에 쓰십니까?" 

"어디?"

"네. 용도에 맞게 포장을 해오거든요."

"아, 그렇군. 전부 내가 먹을 거야."

"헉..."

페루는 이제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럼 나가봐."

"예, 예.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아니, 죄송합니다. 수고하세요." 

저 녀석 과하게 겁먹었군.

**

일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며칠 후에 페루가 집사로 지정됐고, 아린은 일주일간의 인수인계를 끝낸 후 곧바로 기사단 수련에 합류했다. 

기사단 수련에 잘 적응 했는지, 아침마다 보는 아린은 조금 밝아진 거 같았다. 

"대공자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와..."

"왜 그러시죠?"

"매일 미인이 깨워주다가 남자가 깨워주니까 열 받네."

"엑!" 

오늘은 아린이 외부 훈련을 간 날이라, 어쩔 수 없이 페루가 나를 깨우러 왔는데 일어나자마자 보는 얼굴이 저 녀석이라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역시 아린이 깨워줘야 해.

"너무 싫어하시네요."

"네 얼굴을 봐라. 당연한 거 아니냐."

"윽. 그래도 대공자님이 좋아하실만한 소식이 있습니다."

"엉?"

페루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주머니는 설마."

"네. 드디어 대공자님이 기다리시던 물건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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