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 마르쿠스
록스 후작가문은 크란시스 왕국의 남방을 수호하는 검의 명가로 이름을 떨쳐왔다. 록스의 검은 뚫리지 않는 철벽의 방패였으며, 패배를 모르는 무적의 창이었다.
수백 년 동안 쌓아온 명성으로 인해 록스는 크란시스 왕국의 국민들에겐 신뢰의 이름이 되었다.
하지만 록스의 정예들이 피땀 흘려 쌓아온 명성은 망나니 하나에 의해서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후작령에서만 사고를 쳤다면 어떻게든 무마가 됐겠지만, 유렌의 행패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왕도에서도 사고를 쳤었으니, 유렌이 망나니로 왕국 전체에 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유렌의 변화에 대한 소문이 조용히 퍼지기 시작했다.
"록스의 망나니가 훈련을 시작했다는 소문 들었나?"
"에이 무슨! 그 살덩이 대공자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또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하녀들 희롱이나 하겠지."
"나도 들은 거니,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하루 종일 운동만 한다고 하네."
"에이! 술 맛 떨어지는 소리하지 말게! 내가 보기에 그 놈은 구제불능이야. 그놈이 왕도가서 사고 친 거 잊었나? 그것 때문에 후작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그만해!, 나도 그 망나니 편드는 건 아닐세. 에휴, 술이나 마시자고."
"흠흠..."
변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오히려 헛소문이라고 유렌을 욕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1주, 2주가 흘러가며 더 정확하고 확실한 소문들이 나타났다.
"망나니가 하루도 빼먹지 않고 훈련을 하고 있다고 하던데."
"나도 들었네. 이젠 살덩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거의 살도 많이 빠졌다더군."
"정말인가?"
"그래. 내 친척이 후작가에서 하인로 일하지 않나. 가끔씩 그 망나니를 보는데,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하네. 인성에서나 용모에서나."
"인성? 살만 빠진 게 아니란 말인가?"
"다른 하인들이나 기사들을 괴롭히지도 않는 다고 하네. 하루 일과가 수련장에서 수련하다가 집에 와서 자는 것 밖에 없다고 하던데."
"드디어 그 망나니가 정신을 차린 건가?"
"아니지. 조금 더 봐야지. 인간이 그렇게 쉽게 변하던가."
망나니로 이름 높은 유렌이기 때문에 그의 변화 소식은 호사가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왕국 전체에 퍼져나갔다.
유렌의 소문은 왕국의 서쪽을 수호하는 마르쿠스 가문까지 들렸다. 마르쿠스 가문은 록스가 와 마찬가지로 크라시스 왕국을 수호하는 검의 가문. 그리고 유렌과 약혼을 한 일리아 마르쿠스의 가문이었다.
마르쿠스 가문에서는 이미 유렌과의 파혼이 결정되었지만 일리아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보고 결정하겠다고 하며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록스 가로 떠났다.
록스가에 도착한 일리아는 유렌을 기다리면서 점점 기대감이 커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또한 너무 충동적으로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하지? 너무 갑작스럽게 온 건가.’
"대공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건만, 밖에 있던 하녀가 유렌의 도착을 알렸다. 일리아는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휴우..."
일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고 뒤쪽에 있는 문을 쳐다보았다.
"아?"
문 앞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압도적인 미남이 서 있었다. 수려한 용모에 쭉 뻗은 팔다리, 차가워 보이는 분위기까지 그녀가 여태 본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남자였다.
너무도 극적인 변화에 일리아의 뇌는 그가 유렌이라는 생각자체를 하지 못했다.
"누구?"
**
"누구?"
"응?"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들려온 ‘누구’ 소리에 잠시 멍해졌다.
그건 그렇고 역시 예쁘긴 더럽게 예쁘네.
일리아 마르쿠스는 역시나 소설의 히로인답게 연예인 뺨때릴 만한 아름다운 외모와 생기 넘치는 보랏빛 머리를 가진 절세미인이었다.
그녀가 내 변화를 보고 놀란 것만큼 나도 그녀의 외모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화로운 이목구비에 수련으로 단련된 몸선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워낙 황당한 일들을 겪은 덕인지, 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이야."
처음 봤지만.
"어, 어떻게..."
일리아는 아직도 내 변화가 믿기지 않는지, 초록색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야!"
"노력했으니까."
"노력했다고?"
"너한테 얻어맞고 많은 생각을 했어. 그리고 변해보자고 결심을 했지."
일리아는 내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왼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그거 지금 따지는 거야?"
"아니, 고맙다는 거야. 네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으니."
끼익!
내 진중한 목소리에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는지, 의자를 뒤로 뺐다.
"고맙다고? 너, 너 누구야!"
"전 망나니, 유렌 록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녀가 귀여워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끼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직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너, 뭐하는 거야!"
"그 때 일은 전부 내 잘못이다. 네게 맞아 죽었어도 할 말이 없어. 정말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망나니 유렌의 잘못을 대신 사과 했다.
"너 대체..."
일리아는 내 말과 행동에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다.
일리아, 너는 내 소문을 듣고 이곳에 충동적으로 왔겠지. 하지만 나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
일리아가 파혼을 위해 찾아오는 것은 예정된 일이지만 소설 과 달랐다. 소설에서 그녀는 자신의 가문사람들과 와서 정식파혼을 신청한다.
하지만 일리아는 혼자서 이곳에 왔다. 스토리가 변한 것이다. 덕분에 나에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그녀와 파혼을 하고 아예 남남이 되는가, 아니면 주인공의 여자가 될 그녀를 내 편으로 만드는가.
수많은 고민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내가 결정을 한 이유는 딱 하나다.
[창조주의 눈이 발동합니다.]
[이름: 일리아 마르쿠스]
[특성: 경국지색(傾國之色), 검후(劍后)]
[호감도: -16 (비호감) ]
창조주의 눈을 통해 보이는 그녀의 특성 검후(劍后) 때문이다.
일리아는 단순히 주인공의 도움만 받는 히로인이 아니다. 스스로의 특성으로 강해져서 훗날 쓰러진 주인공을 구하고 주요 악역을 베는 역할도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레벨이 없는 특성 검후다.
일리아와의 약혼이 깨지더라도 관계를 회복시켜 놓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야.
"정말 미안하다. 네 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면 풀릴 만큼 때려도 좋아."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로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서 말했다. 내공을 실은 목소리는 마음을 울리는 묘용이 있어 그녀의 마음에 더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음..."
일리아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직도 어쩔 줄을 모르고 고민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일어나!"
일리아의 외침에 고개를 들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직도 내 행동에 동요하는 듯 그녀의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진심이야?"
"그래. 네게 맞은 이후 깨어났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믿어줘."
꿀꺽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이제야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눈을 보니, 그녀도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약속, 아니 맹세해."
"맹세?"
"그래. 앞으로는 이전같이 살지 않겠다고 맹세해. 맹세를 어기면 내가 때려 죽여주겠어."
우우웅
일리아는 자신의 오러를 개방해서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숨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이 전신에 쏟아졌다.
드르륵.
캬걍!
오러의 기세에 밀려서 내 앞에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난 진심이야. 네가 잘못된 길을 간다면 내가 직접 너를 죽일 거야."
이건 일리아가 주인공에게 한 대사잖아. 이 대사를 내가 듣게 되다니.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러의 압박감이 심해지자 만독자전신기가 스스로 발동되어 오러의 압박감을 상쇄시켜주었다.
우우웅
"어?"
만독자전신기는 그녀의 오러를 상쇄시키는 것을 모자라서 역으로 그녀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3성에 도달한 만독자전신기는 이미 수년간 오러를 익혀온 일리아를 넘어서고 있었다.
"대, 대체..."
자신의 기세가 밀리는 것에 경악했는지 일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나 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진심이 담긴 미소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맹세하지."
**
"유렌은 만나보았느냐?"
"네."
일리아는 유렌과 만난 이후 윌링턴 후작에게 호출 당해 후작의 집무실에 불려와 있었다.
"결정은 내렸느냐?"
"결정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던 번복은 없는 듯, 그녀의 눈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후작은 엷은 미소를 지으면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파혼하지 않겠습니다."
"흠..."
일리아의 말이 의외였던지, 후작은 작게 입을 벌렸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느냐?"
후작도 유렌의 극적인 변화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변한지 2달도 되지 않았다.
후작 자신은 유렌이 아들이니 지켜볼 수밖에 없지만, 일리아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녀의 외모와 실력이면 공작가와 혼인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희 아버지가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갈 거라면 파혼이라는 말만 하고 오라고 하셨지요."
후작은 그럴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는 한 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바뀌었는지, 어렸을 때 상냥했던 유렌으로 돌아왔는지."
일리아는 옛 생각을 하는 듯 시선이 위쪽을 향했다.
"하지만 그는 옛날의 유렌도, 망나니 유렌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되었더군요."
"그런가?"
"네. 믿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허어..."
"그가 다시 망나니로 돌아간다면 제가 때려죽이기로 했습니다."
일리아는 후작 앞에서 그의 아들을 때려죽인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선언했다.
"하하하! 여장부구만! 부탁하네."
"맡겨주시지요."
"크하하!"
후작은 그녀의 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는지,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얼마나 묵고 갈 건가?"
"집에서 도망 나온 거라 바로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도망이라?"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버지께서 파혼 할 거 아니면 보내주지 않는다고 하셔서 몰래 빠져 나왔습니다."
"크하하하!"
후작은 진심으로 즐거운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며칠 묵었으면 좋겠지만그렇게 된거면 어쩔 수 없지."
"조만간 정식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하하 그러게나. 올 때는 워프게이트를 사용했겠지?"
"네."
"그럼 유렌 녀석에게 네 배웅을 시켜야겠구나."
"아닙니다. 혼자 갈 수 있습니다. 그는 매일 수련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아, 그렇지."
후작도 보고를 통해서 유렌이 쉬지 않고 수련을 해온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저 때문에 시간을 썼으니, 못 한 수련을 하는 게 나을 겁니다. 관성은 중요하니까요."
말을 마친 일리아는 살짝 눈을 감았다.
"그녀석을 생각하는 건, 네가 나보다 낫구나. 그래 그럼 잘 가거라. 네 아비에게 인사도 좀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가면서 유렌 좀 오라고 해주게."
"네?"
후작은 그녀에게 더 할 나위 없는 상냥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네 말에 나도 결정을 내렸다. 유렌 녀석도 이제 시작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