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법을 익히다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를 쓰는 문파이기 때문에 적과의 거리유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 덕에 그들의 경공과 보법은 어떤 문파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무림일절로 불린다.
"소룡지보(小龍地步)라..."
소룡지보는 사천당가 – 무공 -보법에서 가장 위에 있는 보법이었다. 그 아래에 훨씬 대단해 보이는 이름의 보법들이 있었지만 배울 수가 없었다.
상급의 보법을 배우려면 하급의 보법의 숙련도를 올려야 한다.
[소룡지보를 습득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소룡지보부터 배웠다. 소룡지보를 배웠다는 메시지가 뜸과 동시에 만독자전신기를 배웠을 때처럼 소룡지보의 걷는 법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이건 편하네."
무공을 배우면 바로 적용 되는 굉장히 스마트한 방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소룡지보 1성 0%]
머리에 박혀 버린 소룡지보의 걷는 법을 그대로 적용해서 연무장을 걸어보았다. 처음이었지만 이전에 해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
일반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기이한 각도로 발이 꺾였지만 통증은 없고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소룡지보의 성취도가 상승했습니다.]
한 번 소룡지보를 수련하니, 성취도가 3%올랐다. 즉 34번만 하면 바로 2성이 되는 것이다.
이정도라면 오늘 안에 3성까진 달성할 것 같았다.
빨리 성취도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들떠서 소룡지보를 써보았지만 이번에는 성취도가 딱 0.1%가 올랐다.
"뭐지?"
눈이 잘못 된 줄 알았다. 0.1.라니, 처음에 오른 3%와는 30배 차이가 나고 있었다.
[소룡지보의 성취도가 상승했습니다.]
이번에 처음보다 많은 4%의 성취도가 올랐다. 이제야 나는 무슨 이유로 성취도가 다른 수치로 올랐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차분하게 보법을 사용했고 두 번째는 급한 마음에 대충 보법을 밟았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시범을 보이듯 집중해서 세밀하게 움직였다.
성취도의 수치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정성과 집중의 차이였다. 제대로 자세는 취했는지, 내공의 인도는 정확했는지,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는지, 그 모든 것이 성취도 상승의 근거가 되었다.
두 번째에 한 것처럼 급한 마음에 빨리빨리 하다간 오히려 성취도가 더 늦게 오르는 것이다.
"대충하는 수련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거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소룡지보를 제대로 익혀서 오늘 안에 3성에 가야겠다고 생각햇다.
저 멀리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린을 애써 무시하고 최선을 다해서 소룡지보의 연습을 시작했다.
**
"헉, 헉"
바로 어제 내공을 다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하루 만에 그 다짐이 깨질 뻔했다. 전부 쓰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양을 써버렸다.
게임에서 경험치가 오르듯, 성취도가 오르는 재미에 시간도 잊고 내력의 조절도 잊고 계속 보법만 수련했다.
소룡지보의 성취도는 이미 2성의 절반을 넘어 섰다. 처음 생각했던 3성에는 미치지 못 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내 걸음은 처음과는 완전 딴판이 되었다. 이젠 물흐르듯이 소룡지보를 사용 할 수 있었다.
일성 때가 로봇 같은 움직임이었다면 지금은 봉제인형정도의 움직임은 된 것 같았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에 엄청난 성과를 낸 거 같다.
"대공자님,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시죠."
"그러자."
하늘을 보니 달이 보이지 않았다.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밤이었는데 내가 불편하지 않게 해가 질 때 쯤 아린이 횃불을 켜주었던 것 같다.
아린을 보고 있으면 에이스 신병이 내 맞후임이 되어서 하나하나 다 챙겨주는 것 같았다.
"고마워."
"네?"
"횃불 켜줘서 고맙다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옆에서 걷던 아린이 대답을 하고, 갑자기 먼저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은 대체 무엇을 하신 겁니까?"
"걷는 법을 익혔지."
"걷는 법이요?"
"그래."
당연히 내 소설에 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린은 아마 오늘 내가 쌩쇼를 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어..."
아린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조금 뭐? 말해봐."
"낮술 드시고 비틀대시는 취객 같았습니다."
"윽..."
그렇게 보일만 했다. 아까 1성의 소룡지보는 걷는 것보다 느렸으니까, 하지만 이제 2성의 반은 넘었으니, 걷는 속도 보다는 빠르게 움직일 것이다.
"빨리 가자. 배고프다."
"알겠습니다."
생각해보니, 보법은 이동을 하면서도 쓸수 있었다.
소룡지보를 사용해서 아린의 뒤를 따라갔다. 예상대로 현재의 소룡지보는 걷기보다는 빠른 속도여서 아린을 따라가기에 무리가 없었다.
"저기 대공자님?"
"응?"
"솔직히 조금..."
"왜?"
"창피한데요."
"억!"
아, 아프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박힌 것 같았다.
미인이 대놓고 창피하다고 하는 말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소룡지보를 사용해서 그녀를 따라갔다.
**
"어라?"
"왜 그러시죠?"
"아니야."
여기 와서 별일이 다 있었지만, 음식에 독이 들어 있지 않아서 실망을 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저녁에 아린이 가져온 치레인 스프에는 이전과는 달리 전혀 독이 들어있지 않았다. 평범하고 맹숭맹숭한 스프일 뿐이었다.
스프를 빠르게 삼기고 빈 그릇을 아린에게 넘겼다.
"오늘은 유독 빨리 드시네요."
"오늘 맛있어서."
이전에 늦게 먹던 이유는 독을 먹으면 올라오는 성취도 상승 메시지를 보면서 먹기 때문이었다.
"대공자님 오늘은 꼭 주무셔야합니다."
"그럴게."
아린의 말이 없어도 오늘은 제대로 수면을 취할 것이다. 새벽에 내공수련하기 좋다는 말이 있었으니, 일찍 일어나서 내공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응. 쉬어."
아린이 나간 후에 침대에 누워서 오늘 익힌 소룡지보를 살펴보았다.
"결국엔 3성이 됐군."
제 4 연무장과 후작저택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단전의 내공이 바닥이 보일 때쯤에 저택에 도착했고 소룡지보도 3성에 도달했다. 목표를 이뤘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언제쯤 오려나."
페루가 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내공심법 수련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무협 소설 좀 읽어봤다는 사람은 알고 있다. 내공심법 수련을 할 때 다른 사람이 건드리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린다는 상식을.
이곳에선 그것이 적용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험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피곤에 찌든 눈으로 자지도 못하고, 심법을 운용하지도 못하고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똑똑
오매불망 기다리던 님이 오신 기분이 이럴까, 노크 소리에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들어와."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기다리면 페루가 아니었다.
"역시 아직 주무시지 않으셨군요."
"어, 조금만 있다가 자려고."
방문자는 아린이었다. 집사 복을 벗고 머리에 물기가 묻어 있는 것을 보니 씻고 온 듯 했다.
"허브티를 가져왔습니다. 허브향이 숙면에 도움이 된다니까, 드시고 주무십시오."
"아린. 정말 고마워."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린이 나가고 나서 아직 옅은 김이 나오고 있는 찻잔을 보았다.
"호감도가 좋긴 좋군."
피곤해 보인다고 허브티를 가져오다니,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응이다. 뚱한 얼굴로 쳐다보고만 있었겠지.
"많이 변했어."
똑똑
아린이 나가고 잠시 뒤에,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맞았다. 푸른 머리카락에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독술사, 페루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제 잘 잤나?"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랬겠지."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분위기다. 그에게 거만하고 신비감에 휩싸여 있는 대공자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저녁 스프에는 왜 독을 넣지 않았지?"
"오늘 저는 비번이어서 조리실에 갈일이 없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독을 모두 들고 오라고 하셨으니, 지금 드리면 될 거 같아서."
"그랬군."
그에게 오른 손을 내밀었다. 페루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뭐야. 저것 밖에 없는 건가?
주머니는 손바닥만 했기 때문에 실망을 하고 있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손바닥 만 한 주머니에서 사람 머리통만한 주머니가 튀어나왔다.
페루가 가지고 있던 것은 판타지 소설이라면 무조건 나온다는 공간이 압축되어 있는 마법주머니였다.
페루는 마법주머니에서 네 개의 보자기를 꺼냈다.
마법주머니는 꽤나 비싼 물건인데, 가지고 있다니 역시 보통 녀석이 아니었다.
"이게 제가 가지고 있는 독들입니다."
"별로 없군."
"죄, 죄송합니다."
속으로 엄청 놀랐지만, 필사적으로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어서 거만함을 더욱 부각시켰다.
"히익!"
내려다보는 눈빛을 본 페루가 몸을 둥글게 말고 부들부들 떨었다.
"어제 내가 준 초독을 먹고 이상은 없던가?"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하고 계속 식은땀이 났습니다."
"걱정마라, 초독이 잘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니, 한 달 동안은 괜찮을 거다. 그 시간이 지나면 죽겠지만."
"아아..."
그럴 리가 있나, 초독은 개뿔이다. 그냥 나뭇잎을 둥글게 만 것뿐이다. 머리가 멍한 것은 잠을 못 자서 그런 거고, 식은땀은 한 달 후 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긴장해서 그런 걸 거다.
내가 이렇게 거짓말을 잘 했던가. 거짓말이 아주 술술 나온다.
"한 달 후에 해약을 받으러 오는 것을 잊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제 하던 거 이어서 해볼까?"
페루는 내가 무슨 질문 할지 알고 있는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 음식에 독을 넣으라고 한 놈은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