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당가 (2)
아예 새로운 설정의 세계관이 아닌 이상, 사천당가가 나오지 않는 무협소설은 본적이 없었다.
사천당가는 무림의 오대 가문중 하나로 정파에 속해 있지만 독과 암기를 쓰는 설정 덕에 악역으로 나오거나, 주인공을 건드리다가 털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사천당가 하면 독이기 때문에 해방을 위해서 독이라도 먹어야 하나 고민해봤는데 정말 독을 먹어야 풀리는 특성이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대체 이렇게 설정한 놈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사천 당가가 해방 된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갑자기 독을 먹은 것.
무슨 독인지는 모르지만 몇 초 후에 죽을지도 모른다.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수저를 입에 물고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대공자님?"
아린이 나를 불렀지만, 대답은커녕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대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속으로 1분을 세었지만 아직 내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통증이 느껴지거나 눈이 안보이거나 하는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 떨어져서 무표정이지만, 걱정이 담긴 눈빛을 보내는 아린을 보았다.
[이름: 아린]
[특성: 쾌검lv2, 명경지수(明鏡止水)lv1, 오러 적응lv1]
[호감도: 20 (깊은 관심) ]
한 달 동안 아린의 호감도는 꾸준히 상승했다. 독을 넣은 사람은 절대 아린이 아니다.
지금 당장은 누가 내게 독을 먹였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독을 먹일 사람이 너무 많았다.
"대공자님!"
"아! 미안."
"뭐하셨던 건가요?"
"잠시 생각 좀."
여전히 중독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것에서 생각해 볼만한 상황은 네 가지 정도다.
첫 번째 아주 미약한 독성이라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두 번째 한 번에 영향을 주는 독이 아니라, 쌓여서 병을 만드는 누적형의 독이다.
세 번째 사천당가의 특성이 작용해서 독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네 번째 시간이 지난 후 발동하거나 술자에 의해 발동하는 고독(蠱毒)종류다.
이정도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네 개다 가능성이 있었기에 현재로써는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빙의한 유렌 록스는 시간이 지난 후에 주인공에게 죽게 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갑자기 독이라니, 내가 한 어떤 행동으로 인해 유렌 록스의 스토리가 변한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운동과 훈련을 했을 뿐이다.
운동과 수련... 내가 운동과 수련을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나?
입에 수저를 문채로 내 머릿속은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때쯤에 록스 가에서 발생할 일이 뭐지?
스토리를 생각하자, 갑자기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선명한 이미지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먼저 둘째 콜린이 후계자로 내정되고, 일리아가 찾아온 후 유렌에게 다시 실망을 한 후에 파혼,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후작이 콜린을 후계자로 확실하게 공표한다는 순서였다.
스토리가 보이고 나니, 누가 내게 독을 먹였는지 범위가 굉장히 좁혀졌다.
후계자가 문제였다. 원래라면 지금쯤 콜린으로 후계자가 결정 됐어야하지만. 하지만 나 때문에 바뀐 것이다.
내가 수련을 시작하고 나서 후작이 마음을 바꾼 거야. 후계자 선정을 연기하기로.
"대공자님 대체 왜 그러십니까?"
"미안."
누가 했는지는 이제 대강은 손에 잡힌다. 이젠 독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방법이 묘연했다.
나는 답답함에 인상을 찌푸리며 스프를 쳐다보았다.
[창조주의 눈lv1이 발동합니다.]
[치레인 스프]
작명자의 조잡한 센스와는 다르게 영양 만점인 스태미나 음식으로 체력과 마력을 천천히 회복시키고, 파괴된 근섬유의 재생을 가속시킨다. 힘든 훈련을 할수록 효과가 좋다.
여기까지는 이전에 봤던 내용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밑에 다른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한양초](속성 : 마비)
한양초는 기본적으로 약초로 쓰이지만 숙성을 시키게 되면 아주 미약한 독성이 발생한다. 성인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의 독성이지만, 그 독이 누적된다면 점차 몸이 마비되다가 죽게 된다.
"우와!"
창조주의 눈의 효과는 미쳐 날뛰고 있었다. 치레인 스프에 어떤 독이 들었는지, 그 독의 효과까지 모두 나오고 있었다.
"대공자님 안 드실 거면 뭔가 다른 것을..."
"아니야. 먹을게."
이거 한 그릇 먹는 정도는 거의 영향이 없기에 일단 먹어치우기로 했다.
"음..."
치레인 스프를 다 먹자 다시 내 눈에 다시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약한 마비독의 해방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
약한 마비독이 해방됐단다. 빨리 아린을 내보낸 후 특성을 봐야 할 거 같다.
"그럼 주무십시오."
"그래. 잘 자."
아린이 나가자마자 거울 앞에 서서 창조주의 눈을 발동 시켰다.
[창조주의 눈lv1이 발동합니다.]
[이름: 유렌 록스]
[특성: 창조주의 눈, 사천당가(四川唐家)+]
[특이사항: 과체중, 미약한 중독, 약한 근육통]
[싱크로율: 97.7%]
"사천당가는 어떻게 쓰는 거지?"
사천당가를 집중해서 쳐다보다가 뒤에 플러스 표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플러스를 눌러보자, 겹쳐있던 폴더가 열리는 것처럼 몇 개의 카테고리가 나타났다.
"뭐야 이게."
[사천당가]-
[사천당가-독(毒)]+
[사천당가-암기(暗器)]+
[사천당가-무공(武功)]+
[잠김]
[잠김]
사천당가 옆에 있던 플러스표시가 마이너스 표시로 변하고 잠겨있는 특성을 제외한 다른 카테고리에는 사천당가처럼 플러스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터치하면 열리는 구조인가. 스마트하구만."
아까 봤던 메시지 창에는 분명히 약한 마비독이라고 했었으니, 일단 독을 눌러 보았다. 독 옆에 있던 플러스표시가 마이너스로 변하면서 여러 종류의 독들이 나타났다.
해방되었기 때문인지, 가장 위에 약한 마비독이 있었고 그 아래에 많은 독들이 쭉 늘어져 있었다.
내려갈수록 독의 이름도 어려워지고 지독해 보였다. 나는 제일 아래에 있는 독들을 살펴보았다.
[당가십독(唐家十毒)-무형지독(無形之毒)]- 하위 독 개방 필요.
무형지독은 무형태, 무색, 무미, 무취의 독이지만, 그 지독함은 당가에서 손에 꼽히는 최악의 독 중 하나다.
"나중에 가면 이것도 쓸 수 있다는 건가."
하위 독 개방 필요라고 적혀 있다는 것은 그 위에 있는 독들을 익히라는 뜻이다.
"사천당가의 개방조건은 독의 섭취, 약한 마비독의 개방조건은 한양초의 섭취로군."
보고 싶은 것에 시선을 주면 마우스커서를 올리고 있는 것처럼 설명이 나오고 있었다. 약한 마비독은 개방이 되었지만 아직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약한 마비독]-(사용불가) 내공심법 필요
내공심법이라, 어찌보면 당연한 소리였다. 사천당가가 독을 사용하는 것은 내공을 이용하는 것이니.
[사천당가-무공(武功)]+ 에 있는 플러스를 눌러보았다. 그러자,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기본 내공심법 선택]
[감독공(紺毒功)]
[각전공(各電功)]
[만독자전신기(萬毒磁電神氣)]
딱히 세 가지 내공심법의 설명을 보지 않아도 무협 소설 좀 봤다하는 사람은 이 세 개를 보자마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당연히 세 번째에 있는 이름도 어려운 만독자전신기다.
세 번째를 선택해야하는 이유는 딱하나, 이름에 신(神)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만독자전신기를 배우시겠습니까? 내공심법은 한 번밖에 선택 하실 수 없습니다.]
세 가지 내공심법의 설명을 모두 정독하고 나서 확실하게 선택을 내렸다. 감독공은 독에 중점을 둔 심법, 각전공은 암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심법이다.
만독자전신기는 가장 익히는데 오래 걸리지만, 독과 암기의 극을 이룰 수 있는 무공이었다. 고민 할 필요도 없었다.
[만독자전신기를 배우셨습니다.]
메시지 창이 뜸과 동시에 머릿속에 만독자전신기의 내용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독자전신기를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쇠뿔도 당김에 빼라고 즉시 만독자전신기를 운용했다. 내가 통제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찌릿 거리는 무언가가 정해진 방향과 순번대로 온몸을 휘돌고 있었다.
기묘하고도 독특한 감각, 구슬 같이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내 몸속을 지나갈 때마다 기이할 정도의 쾌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구슬같이 것이 내공이겠지. 이것들이 몸에 있는 혈도들을 돌면서 점점 많은 내공이 쌓이는 방식인가.
처음엔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점차 생각은 사라지고 내공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되었다.
짹!짹!
새벽녘마다 들리는 새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동이 트는 지금까지 한 숨도 자지 않고 계속 내공심법을 휘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협소설에서 자지도 않고 내공심법을 돌린다고 했던 게 진짜구나. 하나도 안 피곤해."
피곤하기는커녕 오히려 활력이 넘친다. 배꼽에서 몇 센티미터 아래에 있다는 단전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내공 덕분인 것 같다.
"뭔가... 달라."
어제까지 보았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뭔가가 달랐다. 내공이 생겼다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공기의 흐름, 세상의 흐름이 보이는 감각이다.
밖에서 울고 있는 새가 몇 마리인지, 지금 문 밖에 누가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달칵.
내가 아직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일어나계셨습니까?"
들어온 사람은 김이 나는 세숫물을 들고 온 아린이었다. 그녀는 세숫물을 가운데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고 내 주변을 살펴보았다.
"주무시지 않으셨군요."
눕지도 않았기 때문에 깔끔한 침대를 보고 아린은 내가 자지 않았다고 확신한 거 같다.
"어쩌다보니."
"좋지 않은 행동입니다. 오늘 훈련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평소라면 물을 내려놓고 바로 식사를 가지러 가는 아린이지만, 지금은 내가 걱정되는 듯 계속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니, 갈 거야. 지금 굉장히 기분 좋거든."
그건 그렇고, 내공이 생겼는데도 아린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러를 익히고 있고, 오러 적응 특성이 있어서 감이 뛰어나다. 내 변화를 느끼지 못 하는 게 이상했다.
"그럼 식사를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그래."
아린이 나가고 난 후 머릿속으로 사천당가를 떠올렸다. 그러자 거울을 볼 필요도 없이 사천당가의 카테고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역시 보이는 군."
[만독자전신기(萬毒磁電神氣)] 1성 10%
하루 밤 만에 10퍼센트라니, 엄청난 성과였다.
[약한 마비독]-대상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킨다.
독 카테고리의 제일 위에 있는 약한 마비독을 보았다. 어제와는 달리 독이 활성화가 되어 있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쓸 수 있다는 소리였다.
"누구한테 써보지? 연습상대가 필요하긴 한데..."
약한 마비독 바로 아래에 해독이라는 적혀있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바로 해독할 수도 있는 것 같다.
"흠..."
똑똑.
"들어와."
아린이 치레인 스프를 가지고 방에 돌아왔다.
"일단 식사는 드시죠."
"아, 고마워."
여러 생각을 해서 인지, 밤을 새서 인지 배는 고팠기 때문에 일단 아침부터 먹기로 했다.
"음..."
[독(한양초)를 섭취하셨습니다.]
[만독자전신기가 독(한양초)을 흡수합니다.]
[만독자전신기의 성취율이 올랐습니다.]
[약한 마비독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독이 든 음식을 먹다보니 계속 눈앞에 메시지가 뜨고 있었다.
이제 저 시스템창이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내 마비독의 첫 번째 실험용 생쥐가 되어줄 놈도 결정했다.
"조금만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