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대공자 (3)
"대공자님이 아니십니까?"
내 앞에 다가온 자는 은빛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는 정규기사였는데 역대급의 마이너스 호감도를 가진 것 치고는 평범한 말투를 사용했다.
[이름: 렉카 올리안]
[특성: 쾌검lv1]
"렉카 올리안?"
"대공자님께서 저를 기억하시다니, 영광입니다."
렉카는 그 말을 하며, 투구를 벗었다.
"어..."
투구를 벗은 그의 얼굴은 온통 칼로 베인 것 같은 상처투성이였다. 원래라면 상당한 미남일 얼굴이 상처 때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징그러워 보였다.
"흐흐."
렉카가 히죽 웃자, 그의 얼굴의 상처들이 더욱 벌어져서 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는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혐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전혀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았다. 만약 호감도가 보이지 않았다면 평범한 관계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에게서 떨어져서 아린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린."
"네."
"저 기사 얼굴에 있는 상처..."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게..."
당연히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유렌이 아니니까.
"저 기사가 수련기사일 때 대공자님이 직접 하신 겁니다."
"와..."
유렌, 너 진짜 쓰레기였구나.
내가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술하는 동안, 유렌은 성실하고 확실하게 망나니짓을 하며 살았던 거 같다.
렉카는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눈 속에 숨겨진 나에 대한 살의를.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정말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어."
"후작님 때문에 억지로 수련장으로 끌려 나오신 공자님이 화가 난다면서 홀로 훈련하고 있던 저 기사를 불러서 얼굴을 칼로 그으셨습니다."
"...진짜?"
"네."
"그냥?"
"네."
폐 속 싶은 곳에서 한숨이 자동으로 터져 나왔다.
"하아..."
저 렉카란 기사가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솔직히 내가 렉카였다면 당장에 달려들어서 칼을 휘둘렀을 거다.
"아린."
"네."
"도망, 아니 돌아가자."
지금 바로 칼을 들고 덤벼 와도 이상하지 않을 렉카의 눈치가 보여서 더 이상 이곳에 못 있겠다.
"알겠습니다."
아린은 별말 없이 저택으로 복귀할 준비를 시작했다.
"아린."
"네."
"제 4 연무장은 어때?"
"제 4 연무장이 제일 멀리 있는데다가 보유하고 있는 기구도 적어서 거의 이용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 모든 연무장이 꽉 차지 않는 한 제 4 연무장은 쓰지 않을 겁니다."
딱 좋다. 지금 나는 뭔가를 하기 보다는 그냥 몸을 움직여서 살을 빼고 사천당가를 활성화 시킬 생각뿐이니까.
"내일 부터는 제 4 연무장으로 가자."
"내일도 가실 겁니까?"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그렇군요."
아린이 내 앞에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겠지. 아니면 어차피 작심삼일이라 생각해서 별말 안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성격이 너무 빨리 바뀌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약혼녀에게 얻어맞고 정신 차렸다고 생각되는 지금이 변하기 가장 좋은 시기다.
"음..."
뒤통수가 따끔거려서 뒤를 돌아봤는데 멀리서 렉카가 움직이지도 않고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다.
"아린! 빨리 가자."
"알겠습니다."
아린을 재촉해서 연무장을 벗어나니, 따끔거렸던 감각이 사라졌다.
"휴, 이게 살기라는 건가."
"네?"
"아까 저 렉카라는 놈이 쳐다볼 때 뒤통수가 따끔거렸거든."
"그건 그냥 쳐다본 겁니다. 그가 살기를 뿌렸으면 제가 알고 막았을 겁니다. 현재의 대공자님이 살기에 직접 노출되면 숨조차 쉬기 힘들 겁니다."
"억..."
그게 그냥 쳐다본 것뿐이라니, 오직 나에 대한 감정만으로 그렇게 따끔거린 거라 생각하니, 더 소름이 돋았다.
"아린."
"네."
"나랑 저놈이랑 만날 때 절대로 내 곁에서 떨어 지지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놈이 나 죽이려고 할지 모르니까 떨어지지 말라고"
"그럴 리가요. 저자는 후작님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입니다. 아무리 원한이 있어도 대공자님을 해하는 행동을 할리 없습니다."
"아닐걸..."
아린에게 몇 번이나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는 비굴함을 보이면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도 한참 걸렸지만, 렉카에 대해서 걱정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택 앞이었다.
수영장만 한 욕탕에서 씻고 나왔더니, 이미 아린이 음식을 준비해 놨다. 그녀가 가져온 음식은 스프나 스튜로 보였는데 고기나 야채가 덩어리째 들어 있어서 영양이 풍부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테이크를 몇 덩이 먹어도 상관없을 부잣집인데 스프 따윈 먹고 싶지 않았다.
"이건 뭐야."
"기사나 검사들이 훈련 후에 먹는 음식인 치레인 스프입니다. 훈련을 하고 나서 이것을 드신다면 체력과 근육이 늘어나고 지방은 빠집니다."
"흠..."
이름을 들으니, 아는 음식이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배달 어플의 음식들을 보면서 대충 조합한 합성어니까. 물론 맨 앞 글자 치는 치킨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창조주의 눈을 발동해서 아린이 가져온 스프를 바라보았다.
[치레인 스프]
작명자의 조잡한 센스와는 다르게 영양 만점인 스태미나 음식으로 체력과 마력을 천천히 회복시키고, 파괴된 근섬유의 재생을 가속시킨다. 힘든 훈련을 할수록 효과가 좋다.
음식에 대한 정보도 보이다니, 보통 눈이 아니다.
"대공자님. 안 드십니까?"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스프를 째려보고 만 있으니까, 아린이 뭐하냐는 듯 쳐다본다.
솔직히 스테이크나 고기들이 땡겼지만, 몸을 만들 때 까지는 이거나 먹어야 할 거 같다.
"아, 먹을게."
치레인 스프의 맛은 굉장히 부드럽고 고소했다. 흡사 건더기가 추가된 특 곰탕을 먹는 것 같았다.
"잘 먹었어."
스프에 건더기가 워낙에 많아서 딱히 밥을 먹지 않아도 충분했지만 과식이 습관화 된 유렌의 배는 계속 음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주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겨우겨우 배속의 거지를 진정시켰을 때 아린이 그릇을 치우면서 말했다. 치레인 스프는 적당한 수면이 주어지면 더욱 효과가 좋기 때문에 저렇게 말 한 것 같다.
"알겠어."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하아, 어떻게든 하루가 지나갔네."
창가에 있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솔직히 아직도 꿈만 같다. 지금 자고 일어나면 다시 내방의 낡고 먼지 낀 물건들이 날 반겨줄 것 만 같았다.
**
"에휴..."
다음날 아침, 원룸의 빛바랜 천장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소설 속에서 깨어났다.
"으윽!"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한 순간 온 몸에서 들려오는 근육들의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익!"
"근육통이라는 겁니다. 안 쓰던 근육들을 사용해서 생기는 통증이죠. 며칠 쉬시거나, 계속 사용해서 익숙해지신다면 사라질 겁니다."
"알거든..."
아린은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일어나자마자 내게 근육통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으으..."
머릿속에서 ‘내일부터 하자.’, ‘이거 한다고 누가 알아줘?’ ‘근육통이 사라지면 다시 운동하자.’ 같은 마음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모르겠다."
결국 마음의 소리에 굴복하고 이불을 뒤집어쓰려고 할 때 아린의 눈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내가 다시 자든, 일어나든 그녀는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살짝 열이 받았다.
그 얼음장 같은 표정을 깨고 싶었다.
"에라이! 윽!"
그래서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격한 움직임에 다시 온몸의 통증이 느껴졌다.
공중에서 내려오는 이불 사이로 아린의 정지된 표정이 깨져버린 것이 보였다.
"아린, 밥 가져와!"
"네."
아린은 가운데 있던 테이블에 세숫물을 가져다놓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음? 방금. 방금 창조주의 눈으로 본 아린의 정보창에 변화가 있어보였는데.
아린이 너무 금방 나가버려서 확인이 되지 않았다.
"휴우..."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처음이 가장 어렵다. 관성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 일어났으니, 내일도 일어나서 운동을 할 수 있을 거다.
"또 이거야?"
"네. 살을 빼시고 싶으시다면 계속 치레인 스프를 드셔야 합니다. 이 스프는 꾸준히 드실수록, 운동을 많이 할수록 효과가 좋습니다."
"윽..."
아린이 가져온 치레인 스프를 먹고 나서 곧바로 제 4 연무장으로 길을 나섰다.
"익!"
"윽!"
"악!"
걷기 시작하니, 근육통이 더 심해졌다. 유렌의 몸은 고통을 경험해 본적도 없는지, 원래의 내 몸보다 고통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아린은 근육통이 심한 내 배려를 해주고 있는지, 내 신음소리를 들어서 그런 건지 어제보다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배려가 정말 고마웠다.
아린의 뒷모습을 보다보니, 아까 아린의 상태창에 변화가 있던 것이 생각났다.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찌푸렸다.
[창조주의 눈을 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