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후작가의 대공자 (1) (2/241)
  • 후작가의 대공자 (1)

    "으음."

    잠에서 깼어났지만 피곤함이 전혀 없고 상쾌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늦잠을 잔 것이 분명했다.  

    "몇 시지..."

    눈을 뜨자, 익숙하지 않는 천장이 보였다. 등의 감각도 이상했다. 딱딱한 전기장판위에서 잤건만, 등에서 느껴지는 이 솜털 같은 푹신함은 뭐란 말인가.

    "정신이 드셨습니까?"

    "응?" 

    갑자기 눈앞에 본적 없는 여자가 나타났다. 푸른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처음 보는 미인이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집사복장에 검을 차고 있었다. 

    "어어..." 

    "몸은 좀 어떠십니까?"

    당황하여 어버버 거릴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 몸이요?"

    "음."

    내 말을 듣자, 여자가 흠칫 놀라곤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 신관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저, 저기요!"

    여자는 내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이 할 만만 마치고 곧바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 여자 뭐야. 여긴 또 어디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룸이라면 일어나자마자 녹이 슨 빨래건조대가 보여야하는데 보이는 것은 커다란 전신 거울이었다. 

    "뭐야..."

    수염 난 아저씨는 어디가고 십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뚱뚱한 청년이 거울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오른손을 들자. 거울 속 청년이 왼손을 들어올렸다. 

    "하하하, 꿈이구나. 다시 자야겠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침대에 누우려고 할 때 문이 열리고 남자 두 명과 아까 봤던 여자가 들어왔다. 

    앞에 있던 중년의 남자는 폼 안 나는 중세 귀족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그 뒤에 있는 노인은 뉴스에서 봤던 외국 종교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가문의 이름에 똥을 칠한 놈이 드디어 깨어난 건가?"

    중년의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노려보며 화를 냈다. 

    나는 이곳에서 깨어난 것 말고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 아저씨에게 저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허허, 후작 각하 대공자께서 일어나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습니다. 벌은 나중에 주시지요."

    "쯧." 

    후작이라 불린 남자는 혀를 한 번 차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기절할 정도로 맞으신 것 치곤 크게 다친 곳이 없습니다."

    노인이 말을 하며 내 몸에 손바닥을 대자, 따스한 무언가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신비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도 안정되셨고, 상처도 대부분 회복되셨습니다. 다행이군요."

    "다행은 무슨, 차라리 뒤졌으면 좋았을 것을..."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진심인 듯 후작의 눈빛에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냉기만 담겨 있었다.

    "남은 상처들은 자연스럽게 치유가 될 겁니다. 후작각하."

    "수고하셨소. 알리오 신관, 그만 돌아가 보시오."

    "예. 그럼."

    신관은 후작에게 정중한 예를 올린 후에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후작이 나에게 주는 압박감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약혼녀를 덮쳐? 짐승만도 못 한 놈!"

    "네?" 

    설마 저 약혼녀를 덮쳤다는 게 나를 말하는 건가?

    "난 내 귀가 잘 못된 줄 알았다. 벼락 맞을 놈아!"

    "네 나이도 올해로 19살이다. 이제 정신 차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 언제까지 그렇게 망나니처럼 살 것이냐! 셋째도 오러를 개방했는데 맏형이라는 놈이 아직도 오러는커녕 기본 단련도 하지 않아서 살만 뒤룩뒤룩 찌다니!"

    "나도 언제까지나 너를 봐줄 수 없다. 록스 가문은 대대로 장자가 작위를 이어온 가문. 하지만 지금의 너에겐 작위를 물려줄 수 없다. 네가 그 꼴로 록스 가문을 잇는다면 선조님들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셔서 나를 때려죽이실 거다." 

    "네 녀석이 처음으로 록스 가의 전통을 깨겠구나. 아주 좋겠다! 좋겠어!" 

    후작은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몸이 다 낫는 대로 그 아이에게 가서 정중하게 사과하고 오너라." 

    "그 아이?" 

    "그것까지 말해줘야 하냐? 일리아에게 가서 정중하게 사과하고 오너라! 용서를 받지 못 한다면 네놈은 정말 끝인 줄 알거라!"

    "...네."

    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를 한다는 게 굉장히 억울했지만, 어차피 개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네’라고 대답해 버렸다.

    "음?"

    내 대답에 놀랐는지 후작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냉막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록스 가문을 망신시키지 말거라. 유렌. 이게 마지막 기회다."

    록스 가문에 유렌이라니, 지금 나보고 유렌 록스라고 한 거야?

    "내가 유렌 록스라고?"

    "뭐?"

    후작은 황당한지, 고개를 옆으로 틀어서 나를 쳐다보았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럼 당신은 윌링턴 록스?" 

    홀린 듯 내 머릿속에 떠오른 후작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빡!

    "크억!"

    갑자기 뒤통수에서 둔탁한 충격을 느꼈다. 후작이 어느새 다가와서 내 머리통을 후려갈긴 것이다. 

    "이 망나니가 이젠 대놓고 아비의 이름을 부르는구나." 

    머리를 맞은 육체적 충격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컸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다가 바로 앞에 있던 거울속의 뚱뚱한 청년과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그 뚱땡이는 입을 벌린 채, 방금 맞은 뒤통수를 매만지고 있었다. 

    "아..."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유렌! 이 녀석! 유렌!"

    후작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아니, 정신을 놓아버렸다.

    **

    "으음..."

    눈을 뜨자 기절하기 전에 봤던 깨끗한 천장이 보였다. 기절했다가 일어났는데도 나는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일어나셨습니까?"

    아까 봤던 미인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 것 같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아린?"

    "네. 대공자님."

    "하아..."

    들어 올린 고개를 다시 베개에 묻고 눈을 감았다.

    "물수건을 갈아드리겠습니다."

    아린이 내 이마에 있던 식은 물수건을 치우고 시원한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감각이 몸을 깨워주었다. 

    "혹시 제가 여기 누워있는 이유가 일리아한테 들이대다가 얻어맞고 누워 있던 거 맞나요?"

    "갑자기 왜 존댓말을 하십니까?"

    내가 존댓말로 질문하자, 아린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저, 아니 나 일리아한테 얻어맞아서 기절 한 거 맞지?"

    "정확합니다. 이곳에서 일리아님을 덮치시다가 전신을 얻어맞고 기절하셨습니다."

    아린은 고조 없는 목소리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와. 시발 좆됐네."

    나도 모르게 참던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공자님?"

    "아니야. 하아..." 

    이제 내가 처한 상황을 확실히 파악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내가 쓴 소설 속에 들어와 버린 것 같다. 그것도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뒤지는 악역의 몸속에. 

    내가 빙의한 유렌 록스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구제 불능의 망나니다.

    재능 없고, 능력도 없지만, 노력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욕심은 넘치도록 많다. 녀석에게 있는 거라곤 록스 후작가의 장자라는 후광뿐이었다. 

    그 후광만 믿다가 약혼녀를 주인공에게 뺏기고, 그걸 복수 하겠다고 주인공을 습격하다가 먼지 나게 얻어맞고 뒷골목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게 이 유렌의 역할이었다. 

    "휴우,"

    내가 원래의 스토리를 꼬아서 주인공에게 살아남는다고 쳐도, 앞으로 펼쳐질 전쟁, 몬스터 같은 많은 고난들이 내 목숨을 위협 할 것이다. 

    이런 불확실한 미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유렌 록스로써 강해져야 한다. 그렇지만 강해지는데도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내가 들어간 유렌은 비중 없는 엑스트라라서 어떤 재능이 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니야. 괜찮아. 아직 시간이 있어. 분명 어떻게든 될 거야."

    마음을 침착하게 먹었다. 현재 유렌이 19살이라고 했으니, 주인공과 만나거나, 여러 사건이 터질 때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설정들이나, 숨겨진 기연들을 잘 이용하다 보면 분명 좋은 방법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연들과 아이템들은 대부분 주인공과 주요 인물들의 것이지만 뭐 어떤가,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주인공의 기연을 뺏어 먹고 살아남겠다는 긍정적이고 추잡한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어, 어!"

    쿠웅!

    갑자기 비대해진 몸을 생각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움직이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버렸다. 

    "크윽!"

    "괜찮으십니까?"

    아픔보다는 창피함에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들자, 아린이 무표정 속에 한심함을 담고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어라?"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녀의 표정이 아니었다. 내 눈에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아린의 얼굴 옆에 작고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이름: 아린]

    [특성: 쾌검lv2, 명경지수(明鏡止水)lv1, 오러 적응lv1]

    [호감도: 0 (중립) ]

    "뭐야 이게..."

    자세히 보기위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자, 그녀 옆에 있던 작은 창이 사라져 버렸다. 

    좀 전에 나는 침대에서 넘어졌고, 쪽팔림과 아픔을 느끼면서 얼굴을 찡그렸던 게 다였다. 특별한 무언가를 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설마."

    미간에 힘을 줘서 일부러 얼굴을 찡그려보았다. 그러자 사라졌던 아린의 정보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나왔어!"

    이 정보창은 내가 인상을 찡그려 실눈을 만들어야만 보이는 것이었다. 

    "대공자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 정말 이상하시군요."

    "얻어맞아서 머리가 이상해졌나봐."

    "..."

    대충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다시 나온 그녀의 정보창을 차분히 읽어보았다. 아린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만도 한데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이름: 아린]

    [특성: 쾌검lv2, 명경지수(明鏡止水)lv1, 오러 적응lv1] 

    쾌검은 빠름을 장기로 내세우는 쾌검술을 극한까지 익힐 수 있는 특성이고, 명경지수(明鏡止水)는 부동심을 가져서 상대를 파악 하는 관찰형 특성이다. 

    오러 적응은 오러를 모으고 발동하는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오러전용의 특성이다. 

    집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전투에 특화된 고급특성들이지만, 아린은 윌링턴 후작이 직접 키운 검사로 작위만 받지 않았을 뿐이지, 지금도 평범한 기사보다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호감도: 0 (중립)] 

    호감도라니, 이게 무슨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통칭 미연시도 아니고 호감도가 왜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거기다 수치가 왜 0이고 중립인지도 모르겠다. 유렌이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100을 넘어 땅굴을 파고 들어가도 모자랐다. 

    이제 대충 내 눈의 능력이 무엇인지 파악했으니, 아린을 내보내고 내 것을 볼 차례였다.

    "아린."

    "네."

    "아직 몸 상태가 별론라, 혼자 있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아린은 별말 하지 않고 고개를 꾸벅인 후 밖으로 나갔다. 

    "제발..."

    이 신기한 눈은 나 자신에게도 보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특성이 뭔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게 될 수 있을 거다. 

    "휴우..."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인상을 찌푸린 채 실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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