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전속결 1 >
105화. 속전속결 1
LA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캘리포니아 스코츠 밸리에 소재한 넷플렉서 본사로 직행했다.
넷플렉서 본사에 들어서자 란돌프 사장의 여비서가 나를 마중했다.
주한수와 경호원들을 1층 로비에 남겨둔 채 여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여비서는 23층에 있는 사무실로 나를 안내했다.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나를 반겼다.
“채드 란돌픕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회장님.”
“나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악수를 끝마친 후 소파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란돌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넷플렉서를 인수할 의향이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직후 은근한 어조를 흘려보냈다.
“저는 넷플렉서의 앞날이 매우 밝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최소 15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버 슈팅을 하고 있었다.
내가 예상한 가격을 훨씬 상회하는 프리미엄을 요구했다.
“저는 15억 달러 이하로는 지분을 매각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로펌을 동원하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란돌프의 확언이었다.
그는 로펌 협상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일주일 안으로 가부를 결정해 주십시오. 기한이 지나면 어떤 조건을 붙이더라도 넷플렉서를 매각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는 나를 능가할 정도로 성격이 화급한 남자였다.
넷플렉서 본사를 뒤로 한 채 인근의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호텔 방을 서성이며 넷플렉서 인수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넷플렉서는 북미지역의 DVD 대여 시장을 장악한 상태였다.
더구나 최근에는 온라인 VOD 서비스로 영역을 확장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도플갱어는 넷플렉서를 반드시 인수하라고 예언했다.
넥플렉서의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의미였다.
미국은 유료 케이블 방송의 천국이었다.
자본주의 시장의 최첨단을 지향하는 국가답게 미국인들은 보고 싶은 TV 프로에 돈을 아낌없이 퍼붓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넷플렉서는 그런 미국인들에게 충분히 통할 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온라인 유료 플랫폼이 활성화될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란돌프는 넷플렉서의 지분을 100%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15억 달러를 원하는 상태였다.
한화로 1조 8천억에 상당하는 거액이었다.
허나, 넷플렉서는 반드시 인수해야 하는 회사였다.
답은 하나였다.
란돌프가 원하는 가격에 넷플렉서를 인수하는 게 최선이었다.
다음날.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넷플렉서 본사를 다시 방문했다.
란돌프 사장에게 내 의중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고풍스런 인테리어로 치장된 사무실로 들어가자 란돌프가 나를 반겼다.
“마음의 결정을 하셨나 봅니다.”
그가 기대만발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15억 달러에 넷플렉서를 인수하겠습니다. 또한 란돌프 씨가 원하신다면 앞으로 10년 동안 경영권을 보장할 용의가 있습니다.”
순간 란돌프가 격동한 얼굴로 내 손을 두 손으로 공손히 마주 잡으며 소리 높여 외쳤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일주일 후.
LA 코플랜드 로펌에 들어서자 마이어 대표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란돌프 사장님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곳으로 안내해 주시죠.”
“네. 회장님.”
마이어는 나를 12층에 있는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에는 란돌프와 그의 고문 변호사가 있었다.
그들과 차례로 악수를 교환한 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코플랜드 로펌이 작성한 계약서를 세밀히 살핀 고문 변호사가 란돌프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잠시 후, 란돌프의 입에서 뜻밖의 역제안이 흘러나왔다.
“매각 액수를 13억 달러로 하향하는 대신, 제가 요구하는 조건을 계약서에 삽입해 주십시오.”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시원시원하게 즉답했다.
“넷플렉서가 뉴욕 증시에 상장될 경우, 저에게 5프로에 달하는 주식을 양도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삽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밑질 거 없는 거래였다.
“좋습니다. 원하시는 내용을 계약서에 삽입해 드리죠.”
“고맙습니다. 회장님. 우하하하······!”
란돌프의 입에서 호탕한 광소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날, 넷플렉서를 13억 달러에 인수했다.
속전속결이었다.
***
김포공항에 도착할 무렵, 김태섭의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님에게 정민기 건으로 보고 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 밤 9시에 서초동에 있는 일식당에서 봅시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회장님.
다음날.
서초동 인근의 일식당 룸으로 들어서자 태섭이 나를 반겼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인사는 됐고, 본론부터 말하세요.”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를 올렸다.
“정민기는 기업과 정부에서 지원받은 돈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더군요.”
“자세히 말해 보세요.”
“기부금을 사적인 용도로 전용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지인 명의로 서초동 고급빌라를 매입하고, 차명으로 개설한 해외 계좌에 거액의 비자금을 은닉 중입니다.”
이미 예상한 일이라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최근에 결혼한 큰아들의 와이프가 대신그룹 장인철 회장의 막내딸입니다.”
사돈 집안도 보통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답시고 온갖 생쇼를 펼치고 있지만, 정민기라는 작자는 돈과 출세에 환장한 흔해빠진 속물에 불과합니다.”
태섭은 그리 단언하며 내 잔에 정종을 공손히 따라 부었다.
달달한 정종을 한 모금 들이킨 뒤 녀석에게 지엄한 명을 내렸다.
“정민기를 내 앞으로 데리고 오세요.”
“그자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이용가치가 조금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 그놈에게 내가 보잔다고 말을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날 밤.
양재천변의 산책로를 거닐며 정민기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녀석은 나름 이용가치가 많은 인물이었다.
민기는 재야 시민사회단체의 대부로 통하고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녀석은 야심만만한 남자였다.
정치권에서 거물로 성장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놈과 척을 지는 것보다는,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게 여러모로 나아 보였다.
마음을 정한 뒤,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티은행 금고에서 양도성 예금증서 20개를 꺼내서 내 앞으로 갖고와.
-무슨 일인데?
-알아서 좋을 거 없으니까 신경 꺼라.
-에휴······ 말을 말자.
통화를 끝낸 뒤 타워필리스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퍼졌다.
-띠리리링······.
폰 디스플레이 신은서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나는 요즘 그녀를 멀리하고 있었다.
은서가 나를 도외시한 채 대학교 선배와 주기적인 만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의가 없었다.
더 이상 스폰을 해줄 필요성이 없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띠리리링······.
폰의 배터리를 탈착시켰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벨 소리에 학을 뗀 탓이다.
다음날.
회사에서 업무를 끝마친 후,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르네상스 빌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펜트하우스 출입구에서 김명철이 나를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녀석은 나를 스스럼없이 형님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명우를 닮아서 그런지 넉살이 좋았다.
“명우는 어디에 있지?”
“사무실 안에 있을 겁니다.”
펜트하우스 내부로 시선을 돌리자 검찰 주요 인사들이 룸걸들을 떡 주무르듯 주물럭거리며 공짜 양주를 물처럼 들이키는 광경이 보였다.
“너는 이곳에서 일 봐라.”
“네. 형님.”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폐쇄회로 TV에 시선을 집중하는 명우의 모습이 보였다.
“왔냐?”
녀석은 그리 말하며 내 손에 서류 가방을 넘겨주었다.
“양도성 예금증서 20개다. 그런데 그 돈을 누구한테 줄려고 그러는 거야?”
“정민기.”
명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개자식한테 뭐하러 돈질을 하려는 거야?”
“너는 신경 쓰지 마라. 그럼 나중에 보자.”
르네상스 빌딩을 나서자마자 서초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식당으로 들어가자 태섭이 나를 반겼다.
“룸 안에 정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놈의 비위 자료를 수집한 목록입니다.”
녀석은 그리 말하며 노란 봉투를 내 손에 건넸다.
“먼저 가보세요.”
“네. 회장님.”
태섭을 돌려보낸 뒤 룸 안으로 들어갔다.
정민기는 나를 본체만체하며 자음자작을 즐기고 있었다.
녀석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테이블 위에 태섭이 건넨 노란 봉투를 툭 내던졌다.
“정민기 씨의 비위 사실을 조사한 자료니까, 맞는지 틀리는지 검토해 보십시오.”
놈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서류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신에게 사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그런 분이 대놓고 사람을 공갈협박 하시는 겁니까?”
그의 얍삽한 두 눈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내 의중을 진솔하게 전달했다.
“나에게 함부로 들이대면 곤란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정민기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이건 또 뭡니까?”
“안을 확인해 보십시오. 마음에 드실 겁니다.”
녀석이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지으며 서류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민기는 20억 원에 상당하는 무기명 양도증서를 홀린 듯이 들여다봤다.
탐욕에 물든 눈빛이었다.
소문대로 돈이라면 환장하는 작자였다.
“20억을 드릴 테니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 봅시다.”
그리 말하며 빈 잔에 정종을 듬뿍 따라서 민기에게 내밀었다.
당연히 녀석은 내 술잔을 거부하지 않았다.
***
르네상스 빌딩 4층에 신은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대박 엔터 대표실로 들어가자마자 명우에게 애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과 만나게 해주세요. 사장님.”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니가 직접 연락하라고.”
명우의 냉담한 반응에 은서의 아름다운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너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까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그러게 있을 때 잘했어야지. 말 안 듣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며 은서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회장님이 만남을 거부하시는 이유를 제발 알려 달라고요!”
그녀가 격하게 외치자 명우가 성난 얼굴로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니년이 학교 선배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알았냐! 너는 계약을 위반했어. 그러니까 앞으로 쥐죽은 듯이 몸을 사려!”
은서가 흠칫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저를 미행하신 건가요······?”
“태수는 자기 여자들한테 경호원을 붙인다고. 너는 그런 것도 모르고 함부로 나대다가 큰 코 다친 거지.”
명우는 싸늘한 시선을 내비치며 냉정한 어조를 이어갔다.
“조만간 대박엔터에서 내보낼 예정이니까 새로운 기획사나 알아보라고.”
결국 그녀는 울 듯한 얼굴로 사무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벽면을 장식한 대화면 TV에서 기분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외자은행 노동조합은 내일 오전 10시부터 총파업을 진행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노동조합 측은 해외자본에 은행을 매각하려는 경영진의 야비한 책동을 지금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략······.
곧바로 조용현 전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밤.
서울 모처에서 조용현과 만남을 가졌다.
외자은행 인수 문제가 답보상태에 빠져든 탓이었다.
“노동조합이 저리 난리를 치는데 인수가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조금 시끄럽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겁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회장님.”
“외자은행 인수를 언제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까?”
“솔직은 금년은 조금 힘들 거 같고, 아무리 봐도 2004년 중순은 지나야 결판이 날 거 같습니다.”
“시간이 지체되는 이유가 뭐죠?”
“정부에서 외자은행 매각을 신중히 판단하는 거 같습니다.”
“자기자본비율이 7프로 안팎인데, 뭘 그리 고심하는 겁니까?”
“해외자본에 은행을 매각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다른 수가 없었다.
조용현의 말대로 내년을 기약하는 게 최선이었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김동진 기술이사가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다.
“투자계획서와 부지 매입비용을 산출한 자룝니다.”
동진이 건넨 서류를 책상 위에 내던진 후 나직한 어조를 내뱉었다.
“구두로 보고를 해보세요.”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천안 지역 부지 매입비용으로 총 140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동진은 내 눈치를 슬쩍 살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40나노대 반도체 생산설비를 구축하려면 총 2조 1700억 원에 육박하는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총액 2조 3천억에 달하는 액수였다.
“투자계획서를 산자은행에 제출하세요. 오늘 당장.”
“넵. 회장님.“
< 속전속결 1 > 끝
ⓒ 방탄리무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