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 개망나니-96화 (21/200)

< 착한남자 1 >

가평 인근의 사격장에서 클레이 사격을 만끽할 무렵, 장내에 조용현과 장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들을 도외시한 채 하늘 높이 떠오른 둥그런 원반을 목표로 라이플의 방아쇠를 연거푸 잡아당겼다.

탕탕탕탕탕탕...!

산산조각으로 박살난 원반을 뒤로 한 채 라이플을 주한수에게 건네며 면전에 나타난 조용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부총리님."

"사격 솜씨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회장님. 하하...!"

조용현은 웃는 낯으로 화답하며 옆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손짓했다.

"배학수 산자은행장입니다. 인사 나누시죠."

산자은행장에게 손을 내밀며 내 소개를 했다.

"드림 케이블의 이태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그는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두손으로 공손히 마주잡았다.

알아서 기는 모양새였다.

배학수가 첫 눈에 마음에 들었다.

예의범절이 투철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장 인근의 일식당으로 넘어갔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조용현이 넌지시 운을 뗐다.

"이 회장님은 앞으로 큰 일을 하실 분입니다. 그러니 배 행장이 알아서 편의를 봐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그래도 회장님에게 그럴 듯한 제안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배학수는 그리 말하며 테이블 위에 서류철을 올려놓았다.

"카이닉스 전자의 재무회계 실사 자룝니다. 검토해 보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철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배 행장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서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카이닉스 전자는 금융권에 총 5조 4천억원에 육박하는 부채를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배 행장이 즉답했다.

"회장님께서 카이닉스 전자 임직원들의 고용승계를 5년 동안 보장하신다면 5조 4천억의 부채 중에서 4조원 가량을 탕감할 의향이 있습니다."

"정확한 인수가액을 말씀해 주십시오."

"카이닉스 전자의 채무 중에서 1조 4천억만 부담하시면 회장님에게 카이닉스 지분 전량을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겉으로 보면 혹할 만한 조건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카이닉스의 시장 가치는 아무리 많이 쳐도 5천억 미만이었다.

더구나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치킨게임이 일상화 된지 이미 오래였다.

카이닉스는 치킨 게임을 버텨낼 능력이 없었다.

운영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직원들을 대량 해고했지만, 작년에도 3천억이 넘는 적자를 본 상태였다.

"솔직히 실망스러운 제안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조용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산자은행이 좋은 제안을 해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매년 수천억대의 적자를 보는 카이닉스 전자를 인수하는건 매우 위험한 도박입니다."

정종을 한모금 들이킨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채무를 일부분만 탕감해주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매년 수천억 대의 적자를 각오하고 카이닉스 전자를 인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흐음..."

배학수의 입에서 침음성이 새어나왔다.

"내 요구는 간단합니다. 카이닉스 전자의 채무 전체를 무조건 탕감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임직원들의 고용보장을 현행대로 반드시 유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타워필리스로 향하는 차 안에서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철용을 아직도 캐스팅 하지 못했냐?

-당최 말을 들어쳐먹지를 않더라.

-그럼 김우철을 남주로 캐스팅 해.

-천상 그래야 할거 같다.

-그리고 여주는 김소민이랑 신은서, 김솔미 셋 중에서 알아서 컨택하고.

-지금 당장 움직여. 꾸물거리지 말고.

-오케이. 접수.

***

르네상스 빌딩 펜트하우스.

명우는 사무실 벽면을 빼곡히 채운 cctv를 매의 시선으로 관찰했다.

그는 특히 12번 룸에 이목을 고정했다.

그 방에는 김태섭과 우명석 검사장, 중수부의 고위 검사가 있었다.

그들은 고급 양주와 룸걸들을 만끽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명우는 그들을 한참 동안 주시한 후, 이복동생인 명철에게 콜을 넣었다.

-지금 당장 르네상스 빌딩으로 와라.

-밤 11시가 넘었다구. 잠 좀 자자. 형님아.

-할 일이 있으니까 잔말하지 말고 후딱 뛰어와.

-으이구... 말을 말자.

40분 뒤.

명우의 눈 앞에 명철이 나타났다.

"앞으로 니가 펜트하우스를 관리해. 형은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나도 배우들 관리를 해야 한다고."

명철이 볼멘 목소리를 쏟아내자 명우가 책상 서랍에서 백만원권 돈뭉치 다섯개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수고비다. 받아."

그제서야 명철이 환해진 얼굴로 돈뭉치를 냉큼 받아챙겼다.

"태수가 운영하는 곳이니까 정신 바짝 차려."

"염려말라구. 그러니 볼일이나 보러 가라고."

"오케이. 그런 너만 믿는다."

명우는 그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명우는 서초동 고급 빌라촌으로 차를 몰아갔다.

고급 빌라에 명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비번을 누른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우철은 갑자기 나타난 명우에게 짜증이 묻어나는 어투로 툭 쏘아붙였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남의 집에 불쑥 찾아오는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철이 볼멘 목소리를 내뱉자 명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일이 급해서 그런거니까 니가 이해해라."

"그래도 이런 식으로 사생활을 방해하는건 곤란하다구요."

우철은 예전과 사뭇 다른 태도로 명우를 상대하고 있었다.

나름 인기배우로 자리를 잡자 자기 목소리는 내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한눈에 파악한 명우의 입에서 날 선 언사가 쏟아졌다.

"누구 덕에 스타가 됐는데, 벌써 부터 배우부심을 드럽게 부리는구만."

명우는 그리 말하며 소파에 털석 주저앉았다.

직후 담배 연기를 피워올리며 면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우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6월 달에 TVM에서 방영 예정인 여름향기에 무조건 출연해."

TVM은 드림 케이블의 드라마 채널이었다.

"저도 이제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제발 그럴 듯한 영화 좀 잡아주세요. 사장님."

"그 문제는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그러니 내 말대로 여름향기에 출연해라."

우철은 성난 얼굴로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단호한 어조를 내뱉었다.

"싫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는 속담이 빈말이 아니구만. 후후..."

"태수가 너를 콕 찝어서, 여름향기에 출연시키라고 오더를 내린거야. 내 마음대로 결정한 사안이 아니라고."

우철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요?"

"그래. 그러니까 잔말하지 말고, 여름향기에 출연하라구. 그렇게만 해주면, 다음번에는 정말 쓸만한 영화에 니놈을 꽂아주마."

그제서야 우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한번 생각해 볼게요."

"결정되는 즉시 연락을 줘. 그럼 나중에 보자."

다음날.

명우는 이른 아침 부터 김소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시죠? 사장님.

-6월 달에 tvm에서 방영 예정인 여름향기에 여주로 출연할 생각없냐?

-솔직히 별로 내키지 않아요. 드라마 보단 영화를 하고 싶어요.

-너도 영화병에 걸린거냐?

-원래 배우들은 드라마 보단 영화를 하고 싶어하는 거에요.

-알았다. 그럼 이만 끊는다.

그는 곧바로 신은서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 역시 여름향기 출연에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결국 그는 김솔미를 여름향기의 여주로 낙점했다.

김소민과 신은서는 태수의 여자라 그가 함부로 할수 없는 탓이었다.

반면 김솔미는 명우가 사적으로 관리하는 여배우인 탓에 얼마든지 컨트롤이 가능했다.

***

2003년 3월 19일.

노무연의 참여정부가 출범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무렵, 정부중앙청사 19층 대회의실에서 검찰 개혁 등을 주제로 한 '검사와의 대화' 가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국민들은 사상 초유의 토론회에 저마다 이목을 집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무연 대통령은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이였던 강순희와 함께 검찰 개혁에 관해 평검사들의 의견을 들으려 했으나, 잘나신 검사님들은 오로지 인사권에 대해서만 언급하며 시종일관 노무연을 조롱했다.

참다 못한 노무연은 평검사들을 향해 '한번 해보자는 거지요!'라는 거친 언사를 내뱉으며 그들을 힐난했지만, 돌아오는건 검사들의 비릿한 조소일 뿐이었다.

노무연은 바보였다.

출세에 환장한, 파렴치한 책상물림들을 너무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박정후처럼 말안듣는 놈들에겐 무자비한 철퇴를 내려야 했겄만, 그는 너무 선하고 착한 인간이었다.

노무연은 검찰과 수구 기득권 언론에게 언제나 저자세로 일관했다.

타고난 성정이 너무 신사스러웠다.

내가 만약 대통령이었다면, 수구 기득권 언론을 통폐합 시키고, 검찰 법원에서 잔대가리만 굴리는 야비한 책상물림들을 삼청교육대에 입소시킨 뒤, 그들에게 피땀눈물나는 치열한 정신개조 훈련을 무자비하게 선사했을 것이다.

노무연은 너무 착해서 탈이었다.

와일드한 독재자를 갈구하는 한국인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한국인들은 겉으로는 입만 열면 민주화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박정후처럼 강력한 철혈의 독재자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강하게 채찍질하는 강력한 인물을 소망하고 있었다.

씁쓸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주한수 실장이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청와대에서 회장님을 초청했습니다."

"이유가 뭐야?"

"다음주 월요일에, 전국 경제인 간담회가 청와대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어중이 떠중이들이 미친듯이 몰려 들겠구만."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20대 그룹의 수장들이 거의 모두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입가에 담배를 베어물자 주 실장이 공손히 라이터불을 붙였다.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훅 내뿜자, 주 실장이 내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참여정부 최초의 경제인 간담횝니다. 청와대 행사에 참가하시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 같습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신정부가 최초로 개최하는 경제인 행사였다.

"청와대에, 간담회에 참가하겠다는 말을 전달해."

"잘 생각하셨습니다. 회장님."

주 실장은 그리 화답하며 나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

청와대.

청와대 비서진들이 나를 비롯한 경제인들을 그림처럼 아름다운 춘추관 건물로 안내했다.

춘추관에 들어가자 넓다란 홀을 온통 독차지한 딱딱한 의자가 보였다.

의자에는 제각각 이름표가 매달려 있었다.

맨 앞줄 의자에는 중소기업 단체장들의 이름표가 부착되어 있었고, 두번째 줄의 의자에는 재벌그룹 회장님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나는 중소기업 사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벌그룹 회장도 아닌 탓에 맨 뒷줄 의자를 배정받았다.

경제인들이 차례로 제 자리에 착석하자 그제서야 장내에 노무연 대통령이 나타났다.

그 역시 딱딱한 의자에 착석하자마자 손에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직후 우리를 향해 모두발언을 내뱉었다.

"전국에서 오신 상공회의소 회장단과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경제계 대표 여러분.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지난해 우리는 수출 4천억불을 달성해 세계 11위 수출국이 됐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나를 비롯한 경제계 인사들과 취재에 열을 올리는 기자, 카메라맨 등을 휘 둘러보았다.

박수를 쳐달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그의 의중을 알아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계적으로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뜨거운 박수갈채를 쏟아내자 노무연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전체수출의 80퍼센트를 담당하며, 최고의 성과를 이끌어주신데, 대해서 치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한번 우리 경제인들은 노무연을 목표로 손뼉을 힘차게 마주쳤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모두발언과 박수갈채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끝장토론이 이어졌다.

노무연 대통령이 경제인들에게 질문하거나, 아니면 우리 경제인들이 노무연에게 질문하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이렇다할 질문 공세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할말 많은 경제인들이 노무연에게 예리한 질문을 퍼부었다.

"자유로운 정리해고가 바탕이 되야 기업들의 투자여력이 되살아 날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대통령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노무연이 즉답했다.

"저 역시 정리해고에 대해서 그리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회삿돈만 축내는 직원이라면 당연히 해고를 해야 합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휘 둘러봤다.

직후, 다시 말을 이었다.

"단, 기업 오너의 사사로운 사적 이익을 위해서 정리해고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법의 울타리 안에서 강력하게 제재할 생각입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노무연의 전향적인 답변을 기대했던 기업 오너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실망한 표정이 떠올랐다.

토론회는 그후로도 무려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솔직히 매우 따분했다.

나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 착한남자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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