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킨 게임의 서막 1 >
박초원은 미칠 지경이었다.
드라마, 영화는 물론이고 광고마저 뚝 끊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태수가 중간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 탓일까? 또다시 대박 엔터를 찾았다.
김명우와 담판을 짓기 위함이었다.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광고, 드라마, 영화 섭외가 안 들어오는 이유가 뭐죠?”
명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이태수 그 인간이 중간에서 훼방을 놓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순간 명우가 성난 얼굴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입조심해라. 밑바닥에서 설설 기는 니년을 탑스타로 만들어준 게 누군데!”
그의 거친 언사에 초원의 낯빛이 핼쑥해졌다.
“태수한테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납작 엎드리라고! 그 친구 비위를 거스르면 니년 인생은 그날부로 끝장이니까!”
명우는 찬바람을 풀풀 날리며 사무실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소민과 오붓한 시간을 즐길 무렵, 명우의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냐?
-박초원이 난리를 치더라.
-왜?
-영화, 드라마, 광고 섭외가 안 온다고.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아무 말 안 했지. 그랬더니 네가 중간에서 다 짜르는 거 아니냐고 길길이 날뛰더만.
초원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다.
단단히 고생을 해야 정신을 차릴 년이었다.
-너한테 싹싹 빌라고 말했으니까 그런 줄 알아라.
-알았다. 이만 끊는다.
통화를 끝마치자 소민이 호기심 그득한 얼굴로 물었다.
“핸드폰에서 박초원 선배님 이름이 들리던데······?”
그녀는 젊어서 그런지 귀가 밝았다.
“맞아. 요즘 그년이 말썽을 심하게 부려서 골치가 아파.”
“왜요?”
“하도 싸가지가 없어서 그년한테 들어오는 광고, 드라마, 영화 섭외를 중간에서 차단했거든. 그래서 난리를 치는 모양이야.”
소민이 놀란 얼굴로 재차 물었다.
“초원 선배님이 그렇게 싸가지가 없나요?”
“응. 나랑 스폰 계약을 체결한 상태에서 다른 놈과 바람을 폈거든. 그래서 따끔하게 혼구녕을 내주는 중이다.”
그리 답하자 그녀의 얼굴에 삽시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러니까 너도 다른 놈과 절대 바람필 생각을 하지 마라. 나는 스폰 계약을 안 지키는 년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성미니까.”
소민이 겁먹은 얼굴로 다소곳이 대답했다.
“네. 회장님. 명심할게요.”
***
한국당 여의도 당사.
2002년 지자체장 후보로 선출된 한국당의 인사들이 출정식을 겸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통령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서울시장 예비 후보인 이명복의 일거수일투족에 매스컴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명복은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 당당한 걸음걸이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직후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는 소회를 솔직하게 피력했다.
-저는 낙후된 서울 강북 지역을 강남에 못지않은 뉴타운으로 개발할 계획입니다. 또한 청계천을 복원해서 서울 시민들에게 되돌려줄 생각입니다.
그의 모두발언이 떨어지자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서울 강북 지역에는 대규모 개발이 가능한 부지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복안이 있는 겁니까?
-청계천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예산이 필요한데 재원을 어디에서 마련할 생각입니까?
이명복은 기자들의 질문을 유창한 화법으로 받아넘겼다.
-연신내 인근의 부지를 활용한다면 10만 세대 내외의 아파트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청계천은 반드시 복원해야 합니다. 도심의 허파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재원이 많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돈이 아깝다고 개발에 미적거린다면 서울의 강북지역은 영원히 낙후된 채 뉴욕의 할렘가처럼 시민들에게 외면받는 지역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의 시원시원한 답변이 쏟아지자 장내에 운집한 한국당 당직자들과 지지자들의 입에서 뜨거운 연호와 박수갈채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이명복을 서울 시장으로!
-최고다. 이명복!
-서울 시민의 구세주 이명복!
-와······! 이명복 당신만 믿습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이명복은 출정식 행사를 끝마친 뒤 여의도 한정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명복은 앉아 있는 친형인 이상덕 의원에게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당에서 누가 나올 거 같아?”
“어차피 여당에서 누가 나오더라도 한국당 후보로 선출된 니놈이 백프로 승리할 거다. 그러니 염려 붙들어 매라고.”
“그래도 만사불여튼튼이잖아. 그러니 여당 후보들의 약점을 자세히 알아봐.”
“알았다. 그건 그렇고, 실탄은 어떻게 조달할 거냐?”
“천상 현도 그룹에 SOS를 쳐야지.”
“그놈들이 돈을 줄까?”
“내가 달라면 못 이기는 척 돈을 줄꺼야. 약점을 잘 알거든. 암튼 급한 대로 3백억 정도를 융통해 봐.”
명복은 그 말을 끝으로 한정식집을 빠져나왔다.
***
드림박스 강남점에 김명우가 나타났다.
그는 장준기 전무의 사무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명우는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장준기는 사무실에 나타난 명우에게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장준기 전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 대표님.”
“태수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명우는 태수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들먹였다.
자신의 신분이 보통이 아님을 장준기에게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명우는 소파에 자리를 잡은 채 비서가 내온 커피를 입가에 한 모금 들이키며 준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드라마와 영화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덕션을 설립하려면 최소 백억 대 이상의 자본금이 필요합니다. 시나리오 작가들과 베테랑 스텝들을 구비하려면 그 정도 자금은 필수라고 할 수 있죠.”
명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준기의 말을 경청했다.
“회장님은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영화 시장 전체를 장악할 복안을 지니고 계십니다.”
준기는 그리 말하며 입가에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직후 다시 말을 이었다.
“드라마와 영화를 연간 10편 이상 자체 제작할 계획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시나리오 작가들과 촬영 스텝들을 대규모로 영입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 회장에게 장 전무의 의중을 가감 없이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준기는 깊숙이 허리를 숙인 뒤 은근한 어조를 내뱉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가능하신가요?”
명우가 싫지 않은 얼굴로 화답했다.
“당연히 시간이 되고말고요. 하하하······!”
“그럼 제가 자주 가는 단골 술집으로 대표님을 모시겠습니다. 헤헤······.”
준기는 간사한 웃음을 흘려보내며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명우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친구 덕에 나발 부는 격이었다.
***
이른 아침부터 사적으로 사용하는 핸드폰에 불이 났다.
박초원의 전화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남자답게 받기로 결심했다.
폰에서 초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오빠에게 싹싹 빌어야 하는 건가요?
-오빠라는 말을 절대 사용하지 마라. 나는 회장님이고 너는 별 볼 일 없는 배우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으니까.
-좋아요. 원하시는 대로 회장님으로 호칭해 드릴게요.
-본론만 말해. 귀찮으니까.
-남자답지 못하게 왜, 저에게 들어온 영화, 광고, 드라마 섭외를 중간에서 컷하신 거죠?
-니년이 계약을 위반했잖아.
-저는 회장님과 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다고요!
-암튼 나와 사귀는 와중에 다른 놈팽이와 붙어먹은 게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니년은 죗값을 달게 받아들여.
-회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 제발 섭외를 허용해 주세요. 네. 제발······!
수화기에서 초원의 간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아. 그럼 앞으로 내가 컨택하는 드라마와 영화에만 출연해. 그러면 거액의 광고도 찍을 수 있을 거다.
폰에서 갑작스런 긴 침묵이 이어졌다.
몇 분 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예전처럼 회장님의 여자로 살아가고 싶어요.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 곁에는 너보다 더 이쁘고 고분고분한 그녀들이 두 명이나 있거든.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마쳤다.
구질구질한 년이었다.
엄한 놈과 바람을 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선심 쓰듯 내 여자가 되고 싶다고 헛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
오전 10시경,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17층에 있는 예능국으로 직행했다.
예능국 사무실에 들어가자 세끼 PD와 작가들만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문가에 앉아 있는 세끼 PD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재연 국장이 어디에 있죠?”
세끼 PD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출근 전입니다. 회장님.”
“지금 당장 회사로 오라고 전화를 넣으세요.”
“넵. 회장님.”
김재연은 군기가 빠졌다.
억대 연봉을 받는 작자가 오전 10시가 지나도록 회사에 코빼기조차 내비치지 않은 것이다.
회장실에서 커피를 음미하며 줄담배를 태울 무렵, 노크 소리와 남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똑똑똑······!
“김재연입니다. 회장님.”
“들어와.”
직후 김재연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창가를 서성이며 사무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녀석에게 매서운 일갈을 토해냈다.
“당신 연봉이 얼마야?”
재연이 쭈뼛한 얼굴로 대답했다.
“1억 2천입니다.”
“판공비는?”
“9천만 원입니다.”
“뒷돈은 얼마나 받지?”
녀석이 우물쭈물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엔터 업체에서 억대의 뒷돈을 챙기겠지. 내 말이 틀렸나?”
재연의 허리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당연히 녀석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돌과 가수들을 음방이나 예능에 출연시켜 주는 댓가로 엔터 업체에서 허구한 날 쌈짓돈을 챙기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제야 녀석이 알아먹은 얼굴로 사죄의 변을 쏟아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앞으로는 절대 떡값을 챙기지 않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어차피 지난 일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순간 녀석이 죽다 살아난 얼굴로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중요한 건 슈퍼스타 드림의 성공이야. 준비 상황을 보고해 봐.”
녀석이 즉답했다.
“이승천이 출연료 조로 편당 1천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윤종선은 7백만 원 내외의 출연료를 원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출연료를 챙겨줘.”
“넵. 회장님.”
“그게 다야?”
“당연히 아닙니다. 회장님.”
녀석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보고를 이어갔다.
“3월 초부터 서울과 경기도, 대전, 인천, 경남, 부산, 창원, 광주, 전주, 대구, 제주도, 미국 la와 뉴욕, 캐나다 토론토 등지를 순회하며 대규모 오디션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몇 달 동안 오디션을 보는 거지?”
“4달 동안 전국과 북미 대륙 오디션을 진행한 후 7월부터 서울에서 본선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예산은?”
“최소 87억에서 최대 110억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거야?”
“6개월 동안 진행되는 대장정이라 그 정도의 제작비는 최소 필요 경비에 준하는 겁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단기간에 펼쳐지는 일이라면 제작비가 많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슈퍼스타 드림은 무려 6개월 동안 이어지는 장편 오디션이었다.
100억 내외의 예산은 최소한의 경비에 준한다고 볼 수 있었다.
“알았으니까 예산 보고서를 작성해서 재무팀에 올려.”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재연이 허리를 공손히 숙인 채 회장실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곧바로 재무실장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드림 케이블의 공식 계좌에 돈이 얼마나 있지?”
“60억 남짓입니다.”
“드림 박스는?”
“2400억 정도의 자금이 있습니다.”
“그럼 드림박스 계좌에서 5백억 정도를 인출해서 케이블 계좌로 이체해.”
“말씀대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재무실장을 내보낸 뒤 장준기에게 전화를 넣었다.
-왜 보고를 안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정필름 투자 건에 대해서 자세히 보고해 봐.
-알아보니 럿데시네마의 자회사인 동방창투에서 손을 쓴 모양입니다.
-확실한 거야?
-네. 회장님.
-그놈들이 중간에 끼어든 이유가 뭐야?
-우리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그런 거 같습니다.
럿데시네마는 드림 박스의 생사대적이었다.
반드시 무너뜨려야 하는 영화판 라이벌이었다.
< 치킨 게임의 서막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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