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자은행 2 >
서초동 고급 빌라.
박초원의 아름다운 얼굴에 고심이 역력한 표정이 짙게 드리워졌다.
그녀는 참담한 심경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잘나가는 인기 여배우로서 화려한 삶을 살 거 같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품위 유지비에 들이는 돈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더구나 이태수가 마련해 준 서초동 고급 빌라에서도 몸을 빼야 하는 형편이었다.
스폰 계약이 종료된 탓이었다.
원래 그녀는 태수가 자신을 잡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초원의 커다란 오판이었다.
그는 한 여자에 연연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더구나 태수는 남자에게 순종적인 여자를 원했다.
그런 면에서 초원은 낙제점이었다.
그녀는 브라운관에서 인기를 얻자 태수에게 심하게 잘난 체하며 그의 성질을 건드렸다.
태수가 가장 싫어하는 언행을 날마다 되풀이한 것이다.
그런 탓인지 그는 스폰 계약이 종료되자마자 단 한 차례도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초원의 예상을 크게 빗나간 일이었다.
그녀는 초조한 심경이었다.
태수가 김소민이란 신인 여배우를 스폰 한다는 소문을 명우에게서 접한 탓이었다.
변화무쌍한 연예가에서 든든한 스폰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태수는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을 보장하는 인물이었다.
허나, 태수는 그녀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래서 초원은 미칠 지경이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태수만 한 스폰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핸드폰의 번호 버튼을 조심스럽게 차례로 눌렀다.
그러나 상대방은 끝내 초원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다급한 얼굴로 코트를 챙겨입자마자 집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성심빌딩에 초원이 나타났다.
그녀는 곧장 3층 대표실로 직행했다.
명우는 짬뽕 국물을 안주 삼아 나 홀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장내에 초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사에는 뭐 하러 온 거야?”
“대표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초원은 그리 말하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명우는 앉아 있는 그녀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나도 한 잔 마셔라.”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뭔데?”
“회장님을 뵙게 해주세요.”
“네가 전화를 하면 되잖아.”
“연락이 안 돼요. 그래서 대표님에게 부탁드리는 거예요.”
명우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갔다.
“그러게 있을 때 잘했어야지. 그놈은 한번 눈 밖에 난 여자는 다시 쳐다보는 성격이 아니야. 그러니까 이만 포기해.”
그의 매정한 언사에 초원의 얼굴 표정이 핼쑥해졌다.
“그러니까 얌전히 배우 생활에 집중해. 정 돈이 급하면 새로운 스폰을 찾든가.”
명우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드라마 대본을 차례로 훑어 내려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내 눈길을 사로잡는 제목이 시야에 포착됐다.
두툼한 대본의 겉장에는 ‘인어 아기씨‘라는 가제가 적혀 있었다.
곧바로 인어 아기씨란 대본을 홀린 듯이 읽어 내려갔다.
인어 아기씨는 막장 중의 막장 스토리로 중무장한 작품이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이복자매가 처절한 사랑싸움을 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당연히 남주는 재벌가 후계자였고, 여주는 친부한테 버림받은 캐릭터였다.
여주는 이복 언니의 남자를 가로챌 뿐만 아니라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회사마저 파산시키는 야누스적인 매력으로 중무장했다.
한국의 여성 시청자들이 열광할 만한 온갖 막장 소스가 버무려진 작품이었다.
본능적으로 인어 아기씨의 성공을 확신했다.
더구나 화수는 무려 100화에 육박할 정도로 장편이었다.
일일 드라마로 론칭하기에 적합한 작품이었다.
문제는 작가의 고료였다.
나름 인지도가 있는 작가라 편당 천만 원 이상을 보장해야 할 거 같았다.
100 곱하기 1천만 원은 10억이었다.
고료로 최소 10억 정도를 지불해야 하는 작품이었다.
인터폰을 누르자 이미경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회장님.
-김용대 국장을 회장실로 불러들이세요.
-네. 회장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10분 뒤, 김용대가 나타났다.
그에게 인어 아기씨의 대본을 툭 내던졌다.
그러자 용대가 반색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본이 마음에 드십니까?”
“아주 좋아요. 그러니까 오성미 작가와 계약을 추진하세요.”
“지금 당장 오 작가에게 연락을 넣겠습니다.”
김용대가 나가자마자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쓸 만한 대본이 있으니까 방송사로 들어와라.
-장르가 뭔데?
-제대로 된 막장 드라마.
-또 막장 드라마를 제작할 생각이냐?
-통할 때까지 만들 거니까 잔말 말고 회사로 튀어와.
-으이구······ 말을 말자. 이 자식아.
1시간 후.
명우가 회장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흰소리를 길게 늘어놓았다.
“너는 제대로 된 드라마를 언제 만들 생각이냐? 허구한 날 막장 드라마만 제작하지 말고, 양질의 드라마를 만들어야지.”
“그건 형이 알아서 하니까 대본이나 읽어봐라.”
그리 말하며 두툼한 대본을 녀석에게 툭 내던졌다.
대본을 읽어내려가는 명우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대본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대본에서 눈을 뗀 녀석이 얼굴 가득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와······! 네 말대로 제대로 된 막장인데. 이 정도면 안방에서 충분히 통할 거 같다.”
“생각이 변했냐?”
“조금. 쓸 만해. 아니, 아주 좋다. 진심으로. 하하······!”
“지금 작가랑 계약 예기 중이니까 드라마 여주에 적합한 캐릭터를 발굴해 봐.”
“조건을 자세히 말해 봐라.”
“일일 드라마니까 비주얼보다는 무조건 연기력이 받쳐주는 여배우가 필요해.”
“우리 애들 중에 장서연이란 여배우가 있는데, 연기를 아주 잘하거든.”
“나이가 몇 살이냐?”
“금년에 만으로 28살.”
“한국 나이로 서른이란 얘기냐?”
명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조금 많은데.”
“그렇지만 우리 애들 중에서는 장서연이 연기를 제일 잘한다고.”
“일단 오디션을 한번 보자.”
“어디서?”
“내일 오후 2시 무렵에, 회사로 데리고 와.”
“알았다. 그건 그렇고, 이제 박초원은 잊은 거냐?”
“내 앞에서 그년 얘기는 꺼내지 마라. 소갈머리가 글러 먹은 년이니까.”
“맺힌 게 많은 모양이네.”
“당연하지. 개년이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데 내가 미쳤냐! 그런 년을 스폰하게.”
“하긴, 네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후후······.”
“너도 그년에 대해서 신경 꺼. 잘해 줄 필요가 없으니까.”
“접수했다. 그럼 내일 보자.”
명우는 그리 답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우철에 대해서 보고해 봐.”
“금년 7월에 방영되는 여름 연가에 주요 조연으로 출연을 확정 지었어.”
“여름 연가 남주랑 여주가 누군데?”
“남주는 배영수고 여주는 손여진이라고 하더라.”
두 명 모두 잘나가는 탑스타였다.
“우철의 캐릭터가 뭐지?”
“남주와 연적관계.”
“당연히 재벌 3세겠지?”
“잘 아네. 낄낄낄······.”
한국 드라마는 이래서 문제였다.
여주를 사랑하는 남주 캐릭터가 하나같이 재벌 3세인 것이다.
현실성이 제로였다.
허나, 한국의 안방 시청자들은 재벌 3세 남주와 조연에 열광했다.
돈 많은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세태가 고스란히 반영된 까닭이었다.
***
시내 모처의 카페.
김용대는 오성미 작가와 진지한 협의를 나누고 있었다.
“회장님이 오 작가의 대본을 마음에 들어 하세요. 그러니 우리 드림 케이블과 드라마 계약을 체결합시다.”
허나, 오성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오늘 당장 확답을 드리지 못할 거 같네요.”
“이유가 뭐죠?”
용대가 안달 난 얼굴로 성미를 쳐다봤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는 드림 케이블 외에도 여러 군데 방송사에 대본을 제출했어요.”
“지상파에도 대본을 전달하신 겁니까?”
“그래요. 그곳의 결과가 나온 후에 확답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용대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지상파와 드라마 계약을 체결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인 탓이다.
“만약 공중파에서 오 작가와 계약을 체결할 의향을 보이면 어쩌실 겁니까?”
“미안하지만 그쪽과 계약을 체결해야겠죠. 지상파와 케이블은 차원이 다르잖아요.”
성미의 입에서 적나라한 언사가 흘러나왔다.
그런 탓인지 용대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럼 우리 드림 케이블에 대본을 뭐 하러 제출하신 겁니까?”
“일종의 보험이죠. 힘들게 쓴 대본을 낭비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용대의 심중에 이태수의 성난 얼굴이 짙게 드리워졌다.
‘재수 없으면 이번 일을 빌미로 회사에서 짤릴지도 몰라.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김용대!’
그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단단히 채찍질하며 성미에게 간절한 읍소했다.
“제발 저를 봐서 우리 방송국과 계약을 체결해 주십시오. 원하시면 공중파보다 최소 2배 이상의 고료를 약속할 용의가 있습니다.”
순간 그녀의 동공이 물결치듯 출렁였다.
성미 역시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다.
허나, 그녀는 공중파와 계약을 하고 싶었다.
결국 성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거절의 변을 피력했다.
“생각 좀 해보고 연락을 드릴게요. 그러니 저를 너무 보채지 마세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카페에서 도망치듯 모을 숨겼다.
용대의 만면 가득 허탈한 표정이 떠올랐다.
더불어 이태수의 진노한 얼굴이 심중에 짙게 드리워졌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의 창가를 서성이며 줄담배를 태울 무렵, 명우와 반반하게 생긴 여성이 내 앞에 나타났다.
“장서연입니다. 회장님.”
그녀가 다소곳이 허리를 조아렸다.
수수하게 생긴 스타일이었다.
화려한 미모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 했다.
“비주얼도 이 정도면 쓸 만하지 않냐?”
명우가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녀석은 좀 빠져주는 게 도와주는 거다.
“내가 알아서 오디션을 볼 테니까 너는 이만 회사로 돌아가라.”
그러자 녀석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표정이 한가득 그려졌다.
“나도 같이 있으면 안 될까?”
“네가 있으면 방해만 된다고. 그러니 어여 네 볼일 보러 나가라.”
그제야 명우가 알아먹은 얼굴로 장내에서 잽싸게 몸을 감췄다.
공손히 서 있는 장서연에게 본론을 내뱉었다.
“당신이 연기할 배역은 복수를 위해서 이복 여동생과 친부를 알거지로 만드는 캐릭터예요. 그러니까 프리하게 지금 이곳에서 자유연기를 해보세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독이 바짝 오른 암호랑이로 삽시간에 급변했다.
명우 말대로 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확한 발음과 시원한 발성을 과시하며 악녀 연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날 서린 눈빛과 격한 독설을 쉴 새 없이 토해내는 그녀의 연기력은 십 점 만점에 십 점이었다.
첫눈에 장서연이 마음에 들었다.
비주얼은 평범했지만 연기력이 대단한 탓이었다.
장서연을 내보낸 뒤 김용대를 불러들였다.
용대가 쭈뼛한 태도로 내 앞에 나타났다.
꼴을 보아하니 뭔가 일이 꼬인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입에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헛소리가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오성미가 지상파에도 대본을 제출한 탓에 계약이 힘들다 이 말입니까?”
용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네. 회장님.”
“당신 연봉이 얼마죠?”
“1억 9천입니다.”
“판공비도 억대니까 모두 합할 경우 3억 안팎이겠군요?”
녀석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게다가 부하직원들과 업계 관계자들에게 시시때때로 금품과 향응을 접대받는 걸 포함하면 우리 잘나신 김용대 국장님은 연간 5억 원 이상의 돈을 날로 잡수시겠군요.”
가시 돋친 언사를 쏟아내자 녀석이 고개를 완강하게 저으며 항변했다.
“절대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회장님.”
“좋아요. 증거가 없으니 당신의 말을 믿어드리죠.”
그제야 녀석이 한숨 돌린 얼굴로 나를 은근히 올려다봤다.
이 작자는 나에게 뭘 기대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억대의 연봉과 판공비를 챙기는 인간이 일 처리 하나 내 마음에 들게 해내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 탓일까? 내 입에서 절로 날 서린 언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렇게 돈값을 못 하시는 거죠? 내가 호구로 보이십니까?”
용대가 곤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성미와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해곱니다. 명심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용대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
주말을 이용해 나 홀로 뉴욕을 내방했다.
칼라일 투자그룹의 체이스 회장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HBS 은행의 TS 인베스트먼트 계좌에는 20억 달러에 육박하는 여유자금이 있었다.
그 돈을 모조리 칼라일이 운용하는 외자은행 인수합병 사모펀드에 태울 생각이었다.
큰 투자수익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나라의 국익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다.
< 외자은행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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