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 개망나니-72화 (161/200)

< 벤치마킹 1 >

김재연의 설명이 계속됐다.

“아메리칸 아이돌을 벤치마킹한 오디션 프로를 론칭한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죠?”

“가수가 되고 싶어서 환장한 친구들이 길거리에 널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합니다. 틀림없이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김재연은 확신에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의 말대로 한국인들은 음주가무에 환장하는 민족성을 타고났다.

오디션 프로를 론칭한다면 일정한 수준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엿보였다.

결국 김재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리세요. 아메리칸 아이돌을 제대로 벤치마킹하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 ABC 방송국에서 판권을 사와야 합니다.”

“예상가격을 말해 보세요.”

“최소 30만 불 이상의 포맷 비용이 필요할 겁니다.”

“돈은 걱정하지 말고 ABC 방송국에 딜을 넣어 보세요.”

김재연이 감개가 무량한 얼굴로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

김명우는 시내 모처에서 유한성 부국장과 만남을 가졌다.

유한성의 입에서 단도직입적인 언사가 흘러나왔다.

“방송사 대표인 박기춘 2억 원, 드라마국장인 장태현에게 최소 1억 5천 정도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명우가 앓는 듯한 소리를 토해냈다.

“단가를 낮출 수는 없나요?”

“죄송하지만 그 이하의 액수로는 남주 캐스팅이 불가합니다. 나름 업계의 표준 금액이라고 할 수 있죠.”

명우는 방송사 고위 간부들이 칼만 안 든 날강도와 다름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사기업을 능가하는 고액의 뇌물이 횡행하는 탓이었다.

허나, 그는 김우철을 반드시 스타 배우로 키우고 싶었다.

그러자면 그들의 요구에 응해야 했다.

“제가 직접 그분들에게 돈을 전달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유한성이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모두 낯을 가리는 분들이라 돈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에게 돈을 주시죠.”

명우는 유한성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중간에서 돈을 빼먹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죄송하지만 두 분을 모두 만나서 제가 직접 돈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한성의 입에서 볼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명우는 여전히 완강한 태도를 고수했다.

“거듭 미안하지만 제가 직접 돈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거참······ 말귀가 어두운 분이시네. 쯧쯧······.”

한성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조만간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명우는 그리 화답하며 한성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재벌가 후계자 출신답지 않게 고개를 숙이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했다.

과거의 화려했던 추억을 오래전에 저 멀리 내던진 덕분이었다.

***

마이크로 소프트의 신개념 운영체제인 윈도우 XP가 전격적으로 출시됐다.

빼어난 그래픽과 빠릿빠릿한 성능으로 중무장한 윈도우 XP는 출시 한 달 만에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그런 탓으로 MS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가파르게 치솟았다.

덩달아 내 주식가치 역시 날이 갈수록 급증했다.

도플갱어의 예언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맞아떨어졌다.

***

서울 모처.

한국당의 이해창 대표가 고심이 역력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심복에게 말문을 열었다.

“권대훈이 대체 누구야?”

“병무청 상사 출신의 병역 브로커라고 하더군요.”

“그놈이 무슨 짓을 하길래 이리 호들갑을 떠는 건가?”

“큰 아드님의 병역문제에 부정이 개입했다는 증거를 가졌다고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있습니다.”

순간 이해창이 대노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인 유리 재떨이를 문가를 향해 거칠게 내던졌다.

쨍그랑······!

“그 개자식을 지금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이미 여당 측에서 그놈을 엄중히 보호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이해창이 분노한 얼굴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들이닥친 형국에 거대한 악재가 돌출했기 때문이다.

“당의 모든 인력을 총동원해서라도 그 개자식의 입을 반드시 막아!”

“말씀대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대표님.”

***

칼라일 사모펀드의 체이스 회장은 한국의 외자은행에 잔뜩 눈독을 들였다.

황금알을 낳을 수 있는 거위로 판단한 까닭이었다.

얼마 후, 그는 한국 정부의 경제를 암중에서 진두지휘하는 조용현 전 부총리를 미국 뉴욕으로 초청했다.

맨해튼 고급 레스토랑.

체이스 회장과 조용현은 프랑스 정식을 음미한 뒤 진중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체이스의 입에서 뜻밖의 언사가 흘러나왔다.

“외자은행의 자기자본 비율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주십시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미스터 조.”

조용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외자은행은 몇 안 되는 견실한 은행입니다. 당연히 자기자본 비율 역시 시중은행 중에서도 상위권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 요구를 수용해 주신다면 거액의 리베이트를 미스터 조에게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체이스가 이리 나오자 조용현의 동공이 거세게 뒤흔들렸다.

그는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전형적인 부패관료였다.

“배팅 액수를 말씀해 주십시오.”

“외자은행의 자기자본 비율을 부실은행 수준으로 낮춰 주신다면 미화로 3천만 달러를 미스터 조에게 제공할 의향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십니까?”

조용현은 일평생 다시 오지 않을 거대한 기회를 맞이했음을 직감했다.

그런 탓일까? 그는 체이스의 제안을 단박에 수락했다.

“좋습니다. 제가 한번 힘을 써보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미스터 조. 우하하하······!”

그들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힘차게 악수를 나누었다.

체이스는 레스토랑을 빠져나오자마자 수석 비서인 요한슨에게 엄명을 내렸다.

“외자은행의 인수 예상액을 산출해.”

“넵. 보스.”

***

회사에서 퇴근 준비를 서두를 무렵 김용대 국장이 나타났다.

“회장님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이 뭐죠?”

“드림 케이블이 제작하는 드라마의 남주와 여주를 공개 오디션으로 모집하고 싶습니다.”

“남주는 됐고, 여주만 오디션으로 모집하세요.”

“염두에 두신 남주가 있습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김용대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당연히 여주 오디션은 내가 직접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니 김 국장은 그런 줄 아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지하 3층에 위치한 오디션장으로 들어가자 복도에 길게 늘어선 여배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들 대다수는 20대 초중반이었다.

간혹 10대 후반의 앳된 소녀도 눈에 띄었다.

그녀들을 뒤로 한 채 오디션장으로 들어가자 김용대 국장이 나를 맞이했다.

기다란 테이블 뒤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철제 의자에 착석하자 김용대가 내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오디션을 진행합시다.”

명을 내리자 용대가 장내에 공손히 서 있는 드라마국 PD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오디션을 시작해!”

“넵. 국장님.”

몇 분 뒤, 4명의 여배우들이 오디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은 준비해온 연기를 각자 5분씩 선보인 후 장내에서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대다수 평범한 외모라 물어볼 가치조차 전무했다.

오디션은 길게 이어졌다.

허나, 내 마음에 드는 비주얼을 지닌 여자는 당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따분한 시간이 길게 지속 될 무렵 오디션장에 귀여운 얼굴과 쭉쭉빵빵한 몸매를 과시하는 아리따운 여자가 홀연히 등장했다.

그녀의 블라우스에 덩그러니 매달린 이름표에 시선을 집중하자 ‘신은서‘라는 이름이 보였다.

이름마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곧바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이가 몇 살이죠?”

그녀가 즉답했다.

“20살이에요.”

“금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나요?”

“네.”

그녀가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그때, 김용대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준비해온 연기를 해보세요.”

곧바로 신은서의 연기가 시작됐다.

그녀는 5분 동안 개인 연기를 선보였다.

특별히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평범한 연기실력이었다.

김용대의 얼굴에 탐탁지 않은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용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귓속말을 해왔다.

“비주얼도 너무 어린 티가 나고, 발성도 부족한 편입니다. 여주로서 그다지 적합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제지했다.

그러자 용대가 뻘쭘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머지 참가자들도 개인 연기를 5분씩 해보세요.”

내 명령이 떨어지자 다른 지원자들도 차례로 개인 연기를 선보였다.

오디션을 끝마친 후 김용대에게 내 의중을 전달했다.

“신은서가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까 그녀를 내 앞으로 데리고 오세요.”

용대가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사적으로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척이면 착 아닙니까? 그러니까 알아서 잘하세요. 그러라고 당신에게 고액 연봉을 주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하다는 말은 됐으니까, 지금 당장 신은서 소속사 측에 딜을 넣으세요.”

“넵. 회장님.”

용대는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바람처럼 몸을 숨겼다.

***

파란 엑터즈는 배우를 전문으로 하는 영세기획사였다.

그런 탓인지 파란 엑터즈의 박영호 대표는 드림 케이블 김용대 국장의 요구를 감히 경시할 수 없었다.

박영호는 신은서에게 모든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 길이 최선이었다.

그는 회사 사무실로 신은서를 호출했다.

박영호는 나타난 은서에게 자초지종을 소상히 밝혔다.

“드림 케이블의 이태수 회장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거든. 그래서 말인데······.”

영호는 말끝을 흐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낌새가 묘하게 돌아가자 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회장님이 저에게 원하는 게 있나요?”

그녀는 어린 나이였지만 눈치가 빨랐다.

영호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적나라한 언사를 내뱉었다.

“너를 원한다고 하시더라.”

은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반드시 여배우로 성공하고 싶었다.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저를 여주로 캐스팅하는 건가요?”

영호가 확답했다.

“너를 스타로 키워주겠다고 하시더라. 그러니까 눈 딱 감고 회장님을 만나보는 게 어떠냐? 어차피 이 바닥에서 뜨려면 성 상납은 기본인 거 너도 잘 알잖아.”

그의 말대로 연예계에서 여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모든 걸 전부 내던져야 한다.

은서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장님 말씀대로 할게요.”

그러자 영호가 반색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생각했다. 원래 이 바닥은 전부 그런 거니까 성 상납에 대해서 너무 마음에 두지 마라.”

“그럴 생각이에요. 그럼 나중에 봬요. 사장님.”

은서는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조신하게 사라졌다.

***

비서진과 경호원을 대동한 채 시내 호텔을 내방했다.

수행원들을 뒤로 한 채 스위트룸에 들어가자 정장 차림의 신은서가 나를 반겼다.

그녀는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소파에 자리를 잡은 뒤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 곁으로 와라.”

그러자 은서가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몸에서 싱그러운 향기가 진하게 풍겨왔다.

청초한 냄새였다.

은서에게 나직한 어조를 내뱉었다.

“너를 스타로 만들어주마. 그러니까 알아서 잘해라.”

“예. 회장님.”

그녀는 고분고분하게 답변한 뒤 내 품에 포근히 안겨 왔다.

은서를 품에 안자 그녀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새삼 대단함을 느꼈다.

소민이 눈부신 아름다움 그 자체라면 은서는 천진난만한 귀요미가 있었다.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 깜찍한 매력 덩어리였다.

***

서울 모처.

대한민국의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고위 경제관료들이 한자리에 운집한 채 조용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외자은행의 자기자본 비율을 부실 은행 수준으로 낮춰.”

돈에 환장한 경제관료들이 하나같이 두 눈에 격한 탐욕을 끌어올렸다.

“이번 일만 제대로 처리하면 당신들 각자에게 최소 수십억 이상의 돈이 떨어질 거다. 그러니 잔말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일을 진행해.”

그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지자 경제관료들이 일사불란하게 복명했다.

“넵. 부총리님.”

< 벤치마킹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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