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 - 5 >
33화. 1998-5
한남동.
채종구 회장은 아들 사랑이 대단했다.
그의 아들은 3대 독자였다.
채종구는 아들에게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힌 이태수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아들 사랑에 눈이 먼 탓이었다.
채 회장은 해결사를 면전에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이태수란 놈을 잡아 와!"
"네에······?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아들놈에게 주먹을 휘두른 양아치 새끼를 잡아 오라고!"
그제서야 사태파악이 된 해결사가 부동자세로 복명했다.
"지금 당장 이태수란 개놈을 잡아들이겠습니다."
"그 개새끼를 내가 직접 손볼 생각이니까 남양주 별장으로 끌고 와!"
"넵. 회장님."
***
며칠 후.
해결사는 이태수의 종적을 발견하는데 끝내 실패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당최 오리무중이었다.
결국 그는 채 회장에게 그런 사실을 솔직하게 보고했다.
***
늦은 밤.
채종구는 강남 모처로 현직 지검장인 강영섭을 불러들였다.
채 회장의 입에서 침중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내 아들놈에게 주먹질을 한 양아치를 처리해 주십시오."
강영섭은 채 회장에게 받아먹은 돈이 있는 관계로 그의 부탁을 거절 할 수 없었다.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놈에게 콩밥을 먹여달라고요! 아시겠습니까?"
채 회장이 언성을 높이자 강영섭의 입가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원하시는 대로 놈을 처리하겠습니다."
그제야 채 회장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채 회장은 술이 가득 들어찬 술잔을 강영섭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소재 파악이 안 되는 놈이니까, 일단 소재부터 파악해 보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회장님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영섭은 그리 화답하며 채 회장이 건넨 술잔을 공손히 받아마셨다.
***
미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공항 검색대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내 얼굴 쪽으로 경찰 신분증을 내보이며 비웃듯 말을 길게 이었다.
"이태수 씨를 특수폭행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 할 수 있으며 변호사도 선임할 권리가 있고, 기타 등등······"
그들은 제멋대로 내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운 채 경찰 봉고차에 나를 짐짝처럼 밀어 넣었다.
그들은 나를 검찰로 압송했다.
취조실에서 급한 대로 검찰 수사관에게 내 사정을 부탁했다.
"핸드폰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허나, 검찰 수사관은 완고한 자세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검사님한테 부탁해 보십시오."
그때, 취조실에 금테 안경을 얼굴에 착용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러기를 얼마 후 얄팍한 서류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기 할 말에 묵묵히 집중했다.
"이태수 씨는 모월 모일 모시에 룸살롱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채도훈 씨를 폭행한 혐의로 이곳에 왔습니다."
재벌 나부랭이가 손을 쓴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한국을 뜨는 건데.
귀찮은 꼴을 당했다.
"그건 채도훈의 일방적인 진술에 불과해요. 그놈은 뽕에 취한 채 술집 종업원과 아가씨들에게 칼부림을 했습니다. 나는 일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놈을 제지한 죄 밖에 없습니다."
"정당방위를 주장하시는 겁니까?"
"당연한 걸 뭐 하러 묻습니까?"
"그렇지만 이상하군요. 술집 종업원들과 아가씨들이 하나같이, 이태수 씨가 먼저 채도훈 씨를 폭행했다고 진술했거든요. 그 이유가 뭘까요?"
검사는 그리 말하며 내 쪽으로 서류철을 밀었다.
서류에 시선을 집중하자 술집 아가씨와 종업원들의 진술서가 보였다.
모두 내가 무작정 채도훈을 폭행했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었다.
채도훈의 아버지가 손을 쓴 모양이었다.
더 이상의 진술은 불필요했다.
곧바로 검사에게 내 의중을 전달했다.
"전화 한 통 씁시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검사의 입 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가며 나를 비웃듯 쳐다봤다.
"이유가 뭐죠?"
"내가 허락하지 않으니까."
검사가 갑자기 말을 놨다.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싸가지가 너무 없었다.
이럴 때는 재벌 친구를 팔아먹는 게 최고다.
"명성그룹 후계자인 김명우도 그날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놈을 이곳으로 불러 주십시오."
그제서야 검사가 뜨끔한 얼굴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자기 핸드폰을 나에게 내밀었다.
"딱 3분만 시간을 드릴 테니까 그 안에 통화를 끝내세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이 지금 검사님한테 취조를 받고 있으니까, 니 회사 법무실장을 이곳으로 보내.
-이유가 뭔데?
-채 뭐시기라는 개자식의 폭행 혐의.
-그 새끼 애비가 손을 쓴 모양이네. 알았다. 법무실장을 보낼 테니까 아무 말 하지 말고 묵비권을 행사해.
-오케이.
통화를 끝낸 뒤 폰을 건네자 검사가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김명우 기조실장님과 아시는 사입니까?"
검사는 내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명우의 직책을 잘 알고 있었다.
뭔가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명우를 사적으로 아십니까?"
"실은 제 고등학교 선배님입니다."
검사는 그리 말하며 나름 사근사근한 태도를 드러내 보였다.
방금전과 백팔십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제가 결례를 범한 거 같네요. 미안합니다."
검사는 그리 말하며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명우의 이름값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확실히 재벌가 로열패밀리는 끗발이 있었다.
1시간 뒤, 검찰에서 무죄 방면됐다.
정당방위를 인정받은 탓이었다.
명우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
그날 밤.
명우의 고등학교 후배인 김태섭 수석 검사를 룸살롱으로 초대했다.
우리는 질펀한 술판을 즐긴 뒤 여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검사님 뒤를 봐줄 테니까 내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그리 말하며 시티은행에서 발행한 10만 달러 수표를 그에게 내밀었다.
김태섭은 주저하는 얼굴로 내 수표를 받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시티은행에서 발행한 수표니까 안심하고 받으세요. 미국은행이라 뒤가 털릴 염려가 없으니까."
그제야 김태섭이 안심한 얼굴로 수표를 넙죽 받아서 지갑에 집어넣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하기는 아직 이르니까 내 말을 먼저 들어보세요."
태섭이 두 눈을 바짝 빛내며 나를 쳐다봤다.
"명진그룹의 채도훈이는 뽕쟁이에요. 그러니까 수사관들을 급파해서 그놈의 모발과 소변, 체액을 검사하세요."
그러자 태섭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재벌 일가를 건드리는 게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비호세력도 많고."
"아무리 그래도 증거가 확실하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태섭이 말끝을 흐렸다.
돈을 더 달라는 의미였다.
"이번 일만 제대로 처리해 주시면 50만 달러를 더 얹어 드리겠습니다."
녀석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 개자식을 엄히 다스리겠습니다."
"그럼 검사님만 믿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빈 술잔에 발레타인을 콸콸 따라 부은 뒤 태섭에게 내밀었다.
***
서울 모처.
도훈은 성치 않은 몸으로 약쟁이 친구들과 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정맥에 뽕이 주입된 주사기를 사이좋게 박아넣은 뒤 난잡한 정사에 몰두했다.
그때, 장내에 광수대 형사들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당신들을 마약 관리법 위반으로 체포합니다. 당신들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도 있으며······"
한남동.
채종구 회장은 길길이 날뛰었다.
삼대독자인 외동아들이 뽕을 투약하다 현장에서 체포된 탓이었다.
그는 정치권과 검경 고위층에 연달아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하나같이 시원치 않았다.
증거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채 회장의 면전에 그룹의 법무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찰의 동정을 보고해 봐."
"구속영장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최하 5년 이상의 구형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나?"
"전관예우 변호사를 고용해서 형기를 단축시키는 게 최선입니다."
채 회장은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회사의 자금 사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6개월 안으로 형기를 단축시키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한가?"
"최소 30억 내외의 자금이 필요할 겁니다."
"돈은 신경 쓰지 말고 전관을 잡아봐."
"넵. 회장님."
채 회장은 법무실장을 내보낸 뒤 김현종 전무를 면전에 불러들였다.
"사내유보금이 어느 정도지?"
"200억 남짓한 수준입니다."
"그중에서 30억 정도를 인출해."
"주채권 은행에서 사내유보금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손을 댓다간, 큰 사단이 일어날 겁니다."
"그럼 비자금을 쓰라는 말인가?"
"천상 그 수밖에 없습니다."
명진그룹은 수조 원 대의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룹이 풍전등화의 형국이었다.
허나, 채 회장은 남몰래 수천억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상태였다.
"알았으니까 이만 나가봐."
김 전무가 장내에서 사라지자마자 채 회장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파라다이스 인베스트먼트 명의로 시티은행의 차명계좌로 30만 달러 상당의 외화를 이체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
동네 헬스장에서 근력운동에 매진할 무렵 김태섭 검사가 내 앞에 나타났다.
"채 회장이 전관 변호사를 고용했습니다."
"주 재판관이 누구죠?"
"심우현 부장판사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랑 저녁 자리를 만들어 보세요."
그러자 태섭이 화답했다.
"명하신 대로 연락을 넣어보겠습니다."
다음날.
강남의 일식당으로 들어간 뒤 매니저를 호출했다.
"심우현 씨가 룸에 있나요?"
"네. 고객님. 저를 따라오시죠."
매니저는 뒷편에 위치한 룸으로 나를 안내했다.
룸에 들어가자 50대 중후반의 남자가 나를 맞이했다.
거두절미하고 그에게 본론을 내뱉었다.
"검찰에서 구형한 대로 5년 형을 먹여 주십시오. 그리 해주신다면 50만 달러를 판사님에게 제공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10만 달러 짜리 수표 5장을 심 판사에게 건넸다.
그는 내 수표를 거부하지 않았다.
"이런 귀한 달러 수표를 주시다니, 감히 거부할 수 없겠군요. 우하하······!"
그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었다.
3주일 후.
재판장으로 들어서자 푸른 수의를 걸친 채도훈과 그를 변호하는 전관 법조인이 재판관들과 증인들을 상대로 열띤 언사를 내뱉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허나, 그들의 뜨거운 변론은 주심 재판관인 심우현의 말 한마디에 허무하게 스러졌다.
-피고 채도훈은 개선의 정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사법질서를 저해하는 행위마저 자행하였다. 특히 그는 마약을 밀수한 것은 물론이고 지인들에게도 마약을 강권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본 재판관은 피고 채도훈에게 검찰에서 구형한 형량보다 한 단계 더 높은 8년 형을 선고하는 바이다. 땅땅땅······!
채도훈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녀석이 이성을 상실한 얼굴로 재판관들과 검사들을 향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쏟아냈다.
"너희 씨팔 년놈들의 눈깔을 모조리 뽑아 버리고, 아가리를 못으로 박아 버릴 테다······!"
순간 법원 경찰이 정신줄을 놓아 버린 도훈을 향해 묵직한 방망이를 쉴 새 없이 내리쳤다.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장내에 돼지 멱따는 비명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그만······용서······..아아악······잘못······..크아아악······..
통쾌한 순간이었다.
***
채 회장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택의 정원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어디서 부터 일이 잘못됐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채 회장의 면전에 법무실장이 나타났다.
"알아봤나?"
"이태수란 놈이 심 판사를 구워삶은 모양입니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채 회장이 분노한 얼굴로 버럭 고성을 내질렀다.
"그 개자식을 내 앞으로 끌고 와!"
"죄송하지만 그런 일은 해결사를 시키시죠. 저는 회장님의 법률자문을 책임질 뿐입니다."
법무실장은 그리 말하며 장내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채 회장이 기운 빠진 얼굴로 제자리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회사도 망할 지경인데 아들놈마저 교도소에 들어가다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 1998 - 5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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