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 - 4 >
32화. 1998-4
동진그룹 종로 본사 기획조정실.
채도훈 기조실장의 면전에 김현종 전무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실장님."
"은행 대출 연장 건을 말해 보세요."
"국면은행 측에서 대출 연장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국면은행장이 김 전무님 선배라면서요?"
그러자 김 전무가 곤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은행건은 그렇다고 치고, 당신 때문에 중동 지역에서 대규모 미수금이 발생한 건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김 전무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몸으로 때우겠습니다. 실장님."
도훈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좋은 자세에요.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죠. 그런 의미에서 딱 20대만 맞읍시다."
김 전무는 어금니를 앙다문 채 곧바로 엎드려뻗쳐를 실시했다.
도훈은 한켠에 놓여진 골프백에서 야구 배트를 꺼내 들었다.
직후 김 전무의 엉덩이를 목표로 배트를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스산한 파육음과 고통을 참는 신음성이 장내에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퍽퍽퍽퍽퍽퍽퍽퍽······!!
-크흐헉······!
남자는 고통에 찬 얼굴로 사무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사무실 밖으로 그를 짐짝처럼 끌고 나갔다.
그날 밤.
도훈은 단골 룸살롱에서 김명우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의 옆에는 근육질의 남자가 있었다.
다음날.
도훈은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니 옆에 있던 놈이 누구냐?
폰에서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내 물주.
-물주?
-그래. 임마.
-돈이 그렇게 많은 놈이냐?
-로열패밀리 따위를 우습게 발라 버리는 수준이지.
-정말 그 정도란 말이냐?
-조 단위 자금을 주물럭거리는 친구야.
도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놈과 만남을 주선해 봐라.
-왜?
-그건 나중에 말해 줄 테니까, 반얀트 클럽으로 오늘 밤에 그놈을 데리고 와라. 형이 거하게 쏠 테니까.
-오케이. 있다 보자.
***
겸사겸사 명우의 회사로 놀러 갔다.
녀석의 수행비서가 나를 기조실장실로 안내했다.
문가에는 여비서와 책상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져 있었다.
여비서는 척 보기에도 미모가 쓸만했다.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글래머였다.
여비서에게 목례를 취한 뒤 문을 열자 녀석이 나를 반겼다.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을 무렵 여비서가 달달한 커피 두 잔을 갖고 왔다.
"고마워요. 미모가 좋으시네요."
내 칭찬에 그녀가 섹시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과찬이세요. 사장님. 호호······"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드러내자 명우가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내비치며 여비서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여비서가 나가자 녀석의 입에서 볼멘 목소리가 토해졌다.
"내가 오래전에 침 발라났으니까 헛물 켜지 마라."
"여비서가 니꺼냐?"
"이미 속궁합도 다 봤다니까. 후후······"
"명색이 기조실장이라는 자식이 여비서나 따먹을 생각을 하니까, 회사 꼴이 엉망이지."
"남이사. 신경 쓰지 말고 커피나 처마셔라."
"말을 말자. 자식아."
넓찍한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며 창밖에 펼쳐진 빌딩 숲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 명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식이, 남의 사무실을 제집 안방처럼 생각하는구만. 정신 사납게시리."
"니 수준에 너무 과한 사무실 같다. 평수도 50평이 넘고 인테리어도 너무 고급스럽단 말이지."
"이래뵈도 형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성그룹의 후계자라고. 이 정도는 기본이지."
"에휴, 모자란 자식아. 재벌 후계자 타이틀이 그리 좋냐?"
"당연하지. 그 맛에 사는 건데. 후후······"
"여비서랑 살림이라도 차릴 생각이냐?"
"앞서 나가지 마라. 나 좋다는 여직원들이 쌔고 쌨으니까."
"반반한 회사 아가씨들을 모조리 따먹을 생각이구만."
"그래서 부렵냐?"
"조금."
"낄낄······"
"너는 임마. 웃음소리가 존나 재수 없어. 그거 고쳐라. 병이니까."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신경꺼라. 형의 개성이니까."
"얼어 죽을 소리하고 자빠졌네."
녀석에게 핀잔을 날리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내 입가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한대 쭉 빨고 가라."
"갈 데도 없는데, 오늘 하루 종일 이곳에서 놀아보자."
그리 말하며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피워냈다.
우리는 사이좋게 흡연을 즐기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늘 밤에 반얀트 클럽에서 술이나 빨자."
"반얀트 클럽?"
"상류층들의 사교모임."
"거기 가서 뭐하게? 노땅들만 잔뜩 올 거 같은데?"
"재벌가 로열패밀리도 많이 오니까 겸사겸사 안면이나 트자고."
"쭉정이 재벌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니까 헛소리는 그만해."
"자식. 수중에 돈이 억수로 많으니까 재벌집 아들내미도 우습게 보는구만."
녀석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내걸렸다.
그날 밤.
반얀트 클럽에 들어가자 명우가 나를 반겼다.
녀석은 오픈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테이블에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명우가 그를 나에게 소개했다.
"동진그룹 후계자 채도훈이다. 나이도 비슷하니까 편하게 인사해라."
망나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채도훈에게 악수를 청하며 내 이름을 밝혔다.
"이태수다. 잘 지내보자."
그러자 녀석이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비웃듯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악수는 됐고, 술이나 하자."
초면부터 재수 없는 놈이다.
특히 나를 비웃듯 쳐다보는 눈깔이 마음에 안 들었다.
주먹을 부르는 상판대기였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명우가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라서 우리에게 돌렸다.
술이 몇 차례 돌자 채도훈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거액의 사설 펀드를 운용한다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놈이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동진그룹에 투자할 생각은 없냐?"
초장부터 사업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술맛이 뚝 떨어졌다.
"돈 얘기는 하지 말자. 술 마시려고 왔으니까."
도훈이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내비치며 비릿한 언사를 내뱉었다.
"별 볼 일 없는 졸부 주제에 드럽게 잘난체하네. 후후······"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주먹을 부르는 자식이었다.
"저런 또라이를 뭐 하러 소개한 거야."
"미안. 너를 하도 만나고 싶다고 하길래······."
명우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다음날.
오늘도 해가 떨어지자마자 룸살롱을 내방했다.
명우와 진탕 놀기 위함이었다.
vip 룸에 들어가자 명우와 채도훈이 아가씨들을 품에 낀 채 질펀한 술판을 벌이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절로 눈쌀이 찌푸려졌다.
명우 자식이 도훈을 끌어들인 탓이었다.
명우가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화해하는 차원에서 형이 자리를 마련했으니까 남자답게 풀어라."
고개를 끄덕이며 상석에 자리를 잡자 도훈이 양주잔에 허연 가루를 뿌린 뒤 입안으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뽕이었다.
소문대로 막 나가는 놈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병뚜껑이 봉해진 발렌타인을 통째로 들이켰다.
물뽕이 있을까 저어한 탓이었다.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녀석이 갑자기 자기 발목을 어루만지며 스산한 언사를 내뱉었다.
"시발새끼야. 나름 생각해서 물뽕을 권한 건데 내 호의를 이런 식으로 무시해!"
놈은 그 말과 동시에 발목에서 끄집어낸 잭나이프를 허공에 요란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룸안의 아가씨들이 놀란 비명을 내지르며 룸에서 재빨리 도망쳤다.
꺄아악······.!
에그머니나······!
꺄악······!
난데없는 일이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놈의 동공을 자세히 살피자 흰자에 실핏줄이 가득했다.
약을 엄청 많이 한 모양새였다.
그때, 명우가 내 팔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가자는 눈빛을 보냈다.
허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설치는 개자식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수년간 갈고닦은 복싱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찬스였다.
명우를 룸 밖으로 내보낸 뒤 놈의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그러자 놈의 입에서 성난 고함이 터지며 나를 목표로 잭나이프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죽여 버릴 테다! 개새끼야!"
녀석의 모션이 커지자 상반신에 커다란 빈틈이 드러났다.
놈의 칼질을 풋워크로 가볍게 피함과 동시에 강력한 주먹을 녀석의 면상에 폭풍처럼 박아넣었다.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크아아아아악······!!!
녀석은 요란한 비명을 길게 내지른 채 맨바닥을 엉금엉금 굴러다녔다.
놈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콧등이 푹 가라앉았으며 강냉이도 우수수 쓸려나갔다.
약쳐먹고 함부로 설친 댓가다.
그러나 아직 많이 부족했다.
약쟁이는 따끔하게 혼쭐이 나야 한다.
매가 약이었다.
녀석의 몸뚱이를 목표로 강력한 사커킥을 폭풍처럼 내질렀다.
그러자 돼지 멱따는 비명이 룸안에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아악······.그만······.아아아악······.
인사불성으로 전락한 약쟁이를 뒤로 한 채 룸밖으로 나가자 명우가 감탄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와! 주먹 실력 끝내주는데······!"
"복싱을 좀 했다. 그러니까 이만 나가자."
우리는 인근의 식당에서 해장국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훈이 그 새끼 아버지가 가만히 안 있을 거다. 그러니까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까지는 호텔에서 얌전히 잠수타라."
"내가 왜?"
"그러다가 동진 그룹의 해결사들한테 해꼬지를 당한다니까."
"재벌 무서워서 살겠냐?"
"원래 다 그런 거야. 그러니까 얌전히 호텔에 있으라고. 니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알았다. 임마."
결국 명구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해결사들이 움직이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홍대 인근의 서교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국으로 출국할 때까지 그곳에서 체류할 생각이었다.
며칠 후.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한 뒤 홍대 클럽을 방문했다.
아르마니 수트와 파텍필립 명품 시계로, 쫙 빼입은 관계로 클럽 출입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자신했다.
허나, 그런 내 자신감은 얼마 안 가 산산이 박살 났다.
클럽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기도가 제지한 탓이었다.
"죄송하지만 우리 클럽은 30세 이상의 남성분들은 출입이 불가능하십니다. 그러니 다른 곳을 알아보시죠."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었다.
클럽에 출입하기에는 내 나이가 많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기도 녀석에게 돈을 줄까도 생각해 봤지만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결국 다른 클럽으로 발길을 돌렸다.
허나, 홍대 클럽은 물관리에 혈안이 된 탓인지 하나같이 나를 외면했다.
나이가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존심이 팍 상하는 순간이었다.
곧바로 강남 클럽으로 넘어갔다.
강남 클럽은 나이 보다는 손님들의 차림새로 물관리를 했다.
당연히 나는 그들에게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아르마니 수트와 파텍필립 시계는 전가의 보도였다.
강남 클럽은 특히 더했다.
오로지 홍대 클럽만 먹히지 않았다.
오픈 테이블에 착석한 뒤 양주를 물처럼 들이키며 스테이지에서 광란의 춤사위를 즐기는 헐벗은 그녀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 무렵, 명우가 내 앞에 나타났다.
"혼자서 청승맞게 뭐 하는 짓이냐? 아가씨라도 부르지."
"오늘은 별로 땡기지가 않아."
"여자라면 환장하는 놈이 갑자기 왜 그래? 뭔 일 있냐?"
명우는 눈치가 빨랐다.
"홍대 클럽에서 나이가 많다고 뻰치먹었다."
녀석이 낄낄대며 비웃듯 입을 열었다.
"자식아. 원래 홍대클럽은 나이 순인 거 몰랐냐?"
"몰랐다. 그러니까 그러지."
"강남이나 이태원에서 놀라고. 우리나 이에는 홍대 클럽이 안 맞으니까."
녀석의 말대로 홍대클럽은 30대 중후반의 남자들이 놀기에는 각이 안 나왔다.
"그건 그렇고, 동진그룹 채 회장이 너를 수소문하는 모양이더라."
"왜?"
"뻔하지. 너를 잡아서 작살을 낼려고 그러는 거지."
"미친 영감이 지랄하고 자빠졌네. 후우······."
< 1998 - 4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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