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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 개망나니-11화 (100/200)

< 시작 11 >

4학년 졸업반으로 올라가자 대기업들의 입사 설명회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학교를 졸업하면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투자할 싯점이 아니었다.

천상 97년이 지나야 투자할 길이 열렸다.

도플갱어의 신탁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가 예언한 대로 일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번듯한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거나, 아싸리 백수로 펑펑 쳐노는 세가지 갈림길에 놓였다.

일단 학교에서 열리는 대기업들의 입사설명회를 참관하기로 결심했다.

영문학 강의가 파하자마자 삼송그룹의 입사설명회가 열리는 대강당으로 부리나케 내달렸다.

강당 안에는 수백여 명의 학우들이 운집한 채 삼송그룹 관계자의 열변을 세이경청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우리 삼송그룹은 전기, 전자, 금융, 건설 등을 아우르는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입니다. 우리 그룹에 입사하시면 여러분들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겁니다.

-특히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를 석권한 우리 삼송전자는 글로벌 대기업으로 비약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그는 자부심 그득한 얼굴로 삼송그룹의 자화자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허나, 나는 삼송그룹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직원들을 혹사한다는 악명이 자자한 탓이었다.

차리리 삼송 보다는 현도그룹이 더 마음에 들었다.

입사설명회에서 슬그머니 몸을 뺄 찰나 이쁘장한 김수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맨 앞자리에 앉은 채 삼송 관계자의 열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삼송그룹 입사에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연대 졸업생은 마음만 먹으면 삼송그룹에 거의 모두 들어갈수 있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문대인 탓이었다.

그러나 여자 입장에서 삼송그룹은 그리 추천할 만한 곳이 되지 못했다.

남자도 힘들어하는 판국에 여자라고 온전할리 만무였다.

대강당 앞에서 담배를 꾸역꾸역 태울 무렵 김수정이 출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담배 꽁초를 땅바닥에 내던진 후 그녀에게 무작정 다가갔다.

수정은 나를 보자 약간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는체를 해왔다.

"오빠가 여긴 웬일이니?"

우리는 선후배 동기들과 술자리를 자주한 탓에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그냥. 술이나 빨러 갈래?"

내 제안에 그녀가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좋아. 안그래도 동동주에 파전이 땡겼는데. 호호...!"

"그럼 학교 앞 동동주 집에서 한잔 빨자."

우리는 곧바로 학교 앞에 위치한 동동주 집으로 넘어갔다.

동동주와 파전으로 배를 채운 뒤 그녀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

"나한테 시집올래?"

그러자 그녀가 입안에 가득 들어찬 동동주를 내 쪽으로 훅 뿜어내며 당치도 않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절대 하지마!"

그녀는 내가 별로 마음에 없는 눈치였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씁쓸한 고소가 입가에 절로 떠올랐다.

그때, 수정의 쌀쌀맞은 어조가 들려왔다.

"오빠랑 술 못마시겠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녀는 그말을 끝으로 술집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

1종 보통 운전면허증을 취득하자마자 대우자동차에서 출시한 로얄프린스를 구입했다.

벤츠를 구입하고 싶었지만 학생 신분에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니면 세간의 주목을 받는 탓에 나름 쓸만하다고 소문난 로얄 프린스로 눈을 돌렸다.

무사고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 후에 일산 자유로 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다음날.

학교 주차장에 로얄 프린스를 파킹 한 뒤 경영학 강의실로 들어갔다.

오늘의 주제는 해외투자였다.

-정부는 1988년 부터 일반인들의 해외투자를 허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개선할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첫번째로 일반인들에게 허용된 해외투자 금액이 터무니 없이 작은게 현실이다. 10만달러 이상을 해외에 투자하려면 갖가지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말로는 해외투자를 자유롭게 허용한 것 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많은 장애요인들이 도사리고 있다.

교수님의 말대로 해외투자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었다.

달러가 귀한 우리나라 사정에 개나소나 해외투자에 나섰다간 국가 재정이 개털이 되기 쉽상이었다.

-제대로 해외투자에 나서려면 그럴듯한 기업체를 설립하는게 최선이다.

교수님은 그 말을 끝으로 강의를 종료했다.

곧바로 구내식당으로 직행했다.

오늘의 메뉴는 얼큰한 육개장이었다.

육개장을 걸신들린 아귀 처럼 두그릇이나 비운 뒤 식당 뒤편의 휴게실에서 식후 연초에 열중할 무렵 김정문이 내 앞에 나타났다.

녀석은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길게 베어문 채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쓸만한 포커판이 열리는데 형도 낄래?"

"내가 거길 왜가."

"그냥 형도 껴서 한판 쳐라. 돈도 많으면서 왜 이리 쩨쩨하게 굴어."

얼마전에 동기들을 데리고 집들이를 한 이후로 내가 부잣집 아들내미라는 소문이 영문학과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녀석도 그날, 내 집에 온 멤버 중의 한명이었다.

"돈 없으니까 헛소리 하지말고 어여 가라."

"그러지 말고 같이가자. 존나게 이쁜 여자애를 소개시켜 줄게."

조금 구미가 동했다. 이쁜 여자는 전가의 보도였다.

"누군데?"

"포커판에 가면 자연히 알게될거야. 그럼 있다 5시에 학교 앞에 있는 올림픽 당구장으로 오라고."

녀석은 그리 말하며 저 멀리 사라져갔다.

5시 무렵, 올림픽 당구장으로 들어가자 한켠에서 내기 당구를 즐기던 정문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 앞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나가자."

"약속장소가 여기라며?"

"당연히 아니지. 그냥 아무말 하지말고 나만 따라오라구."

녀석은 그리 말하며 홍대 인근의 오피스텔로 나를 이끌었다.

오피스텔에 들어가자 매캐한 담배 연기가 코끝을 기분좋게 간질였다.

안을 살피자 3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보였다.

내 관심은 정장룩 차림의 그녀에게 모아졌다.

그녀는 남자들과 양주를 즐기며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말아올리고 있었다.

그때,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금테안경이 문정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

그러자 문정이 나를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영문학과 동기형."

금테가 경계심이 깃든 시선을 내 쪽으로 보내왔다.

곧바로 그에게 내 소개를 했다.

"이태수라고 합니다. 겸사겸사 왔습니다."

그제서야 금테가 경계심을 풀었다.

"태수씨도 한판 칠려고 오신건가요?"

"뭐 그렇죠. 하하..."

그리 화답하자 금테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테이블 위에 녹색 천을 깔았다.

잠시 뒤, 본격적인 포커판이 열렸다.

기본 배팅금액은 만원이었다.

대학생들이 치기에는 과도한 액수였지만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지갑에서 십만원권 수표 열장을 꺼내서 금테안경에게 건넸다.

"현금이 없어서 그런데 좀 바꿔주실래요."

그러자 정장룩 차림의 그녀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핸드백에서 만원권 뭉치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정체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녀에 대한 관심을 뒤로 한 채 포커에 열중했다.

허나, 녀석들은 하나같이 포커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내 패를 보고치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내가 높은 패를 쥐고 있으면 어김없이 다이를 선언했고, 낮거나 어중간한 패를 들고 있으면 자신만만한 얼굴로 레이스를 주도했다.

결국 1시간 만에 백만원을 홀라당 말아먹었다.

문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피스텔을 벗어나자마자 문정에게 격한 언사를 내뱉었다.

"포커 선수들 같은데, 왜 그런 판으로 나를 끌어들인거냐?"

"미안. 형이랑 같이 치면 끗발이 뜰거 같아서 그런거야. 다른 이유는 없다고. 믿어주라."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여자는 대체 누구냐?"

녀석이 즉답했다.

"꽁지."

"꽁지가 뭐야?"

"하우스에서 돈빌려주는 사람."

"그럼 거기가 하우스냐?"

문정이 고래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지. 거긴 그냥 오피스텔이고."

"여자가 꽁지라며."

"그 여자가 일하는 하우스는 강남에 있어."

"거기가 어딘데?"

"왜? 관심 있어?"

"얼굴이랑 몸매가 좋아보이더라."

"위험한 여자야. 하우스에서 꽁지를 할 정도면 뒤에 조폭이 있다고 봐야지."

"금테안경이랑 무슨 사이지?"

"당연히 그 인간의 이거지."

녀석은 그리 말하며 세끼 손가락을 야하게 흔들었다.

강남 하우스에 급 관심이 생겼다.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다.

"그 여자가 일하는 하우스로 안내해봐."

그러자 문정이 놀란 얼굴로 나를 뜯어말렸다.

"하우스는 함부로 드나드는게 아니라구. 집안 재산이 거덜난다니까."

"그건 형이 알아서 할테니까 하우스로 안내해봐."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다. 그럼 나중에 보자구."

녀석은 그말을 끝으로 내 눈앞에서 잽싸게 몸을 감췄다.

그녀의 요염한 자태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자극적인 미모였다.

허나, 그녀는 나와 인연이 없는 여자였다.

결국 그녀의 아리따운 미모를 뒤로 한 채 압구정 아파트로 차를 몰아갔다.

집으로 들어가자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와 가재도구가 내 눈을 어지럽혔다.

남들이 보면 돼지우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집안이 너저분했다.

청소가 귀찮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정부가 절실했다.

곧바로 밖으로 나가서 벼룩시장을 들고왔다.

벼룩시장의 구인란을 살피자 '가정부 쓸분 할분'이란 직업소개소의 광고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은 늦은 밤 시간이라 전화를 걸기에 적합한 시간대가 아니었다.

내일 오전에 직업소개소로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다음날.

오전 10시경에 일어나자마자 직업소개소에 전화를 걸었다.

-가정부 아줌마를 고용하고 싶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원하시는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이는 30대나 40대가 적당할거 같고, 요리도 잘하고 집안 청소와 빨래도 성실하게 해주시는 아줌마를 원합니다.

-입주 가정부를 원하시나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아줌마들이 입주로 들어올까요?

-그러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7시 정도에 퇴근이 가능한 아주머니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네. 알아서 구해주세요.

-대신 월급이 좀 쎕니다. 아무리 못해도 한달에 백만원은 챙겨주셔야 합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며칠 후, 내 앞에 40대 초반의 아줌마가 나타났다.

그녀가 공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직업소개소에서 연락을 받고 왔어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주세요. 그게 편하거든요."

"내일 부터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까지 집안 청소와 빨래, 음식 등을 책임져 주세요."

"네. 사장님."

아줌마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달에 백만원씩 챙겨드릴 테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지갑에서 십만원권 수표 열장을 꺼내서 아줌마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고마워요. 사장님."

"선불로 드린거니까 마음에 두지 마세요."

그말을 끝으로 아줌마를 내보냈다.

다음날.

아침 7시 무렵 아줌마가 내 집에 나타났다.

그러기를 얼마후 온 집안에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진동했다.

욕실에서 대충 세안과 양치를 끝낸 뒤 주방으로 들어가자 먹음직한 된장두부찌개와 계란후라이, 무말랭이, 김, 깻입 등의 밑반찬이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정성스레 차려낸 아침식사를 봄날에 게눈 감추듯 후딱 해치운 뒤 아줌마에게 10만원권 수표 석장을 내밀었다.

"이 돈으로 한우 소갈비랑 먹을만한 식재료를 구입해서 저녁식사에 올려주세요."

그녀가 공손히 화답했다.

"네. 사장님."

아줌마가 마음에 들었다.

성격도 좋을 뿐더러 음식 솜씨 마저 내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 시작 1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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