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2 >
주말을 이용해 간만에 영화관을 내방했다.
내 이상형인 정연희가 주연으로 출연한 '앵무새 온몸으로 울었다'라는 영화가 개봉했기 때문이었다.
극장 안에는 수많은 남성들이 스크린에 이목을 집중한 채 정연희의 환상적인 미모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녀의 몽환적이면서도 섹시한 눈빛에 삽시간에 빨려들어갔다.
그녀는 대한민국 남성들의 로망이었다.
단군 5천년사에 길이 빛나는 절세가인이었다.
옆나라 일본에서 조차 정연희를 일컬어, 자국 여배우 백명을 합한다해도 그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찬탄할 지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내에 오는 유명한 외국 남성들 대다수는 정연희와의 만남을 갈구하고 있었다.
홍콩의 유명 영화배우인 정룡 또한 그녀의 광팬이었다.
그는 한국에 올때마다 정연희를 만나게 해달라고 관계자들에게 애걸복걸할 정도였다.
그 덕분인지 정룡과 그녀가 모처에서 자주 데이트를 즐긴다는 소문이 시중에 은밀하게 나돌 지경이었다.
물론 나는 그같은 유언비어를 전혀 믿지않았다.
그녀는 나만의 아프로디테였다.
시중의 소문 따위는 내 알바 아니었다.
내 일평생 소원은 정연희와 말 한마디라도 나눠보는 거였다.
그녀는 양귀비, 서시, 그레이스 켈리, 올리비아 핫세를 능가하는 전세계 최고 미녀였기 때문이다.
***
아파트 현장에서 잡부일에 열중할 무렵 나이지긋한 박씨 아저씨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태수야. 타일 좀 발라볼 생각없냐?"
그는 타일 미장조의 오야지였다.
당연히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타일 미장은 일당이 잡부에 비해 최소 3배 이상 높았기 때문이다.
"저야 좋죠. 뽑아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역시 우리 태수는 사람이 됐단 말이지. 하하...!"
그는 사람좋은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부터 우리 팀에서 일해. 일당은 알아서 잘 쳐줄게."
"감사합니다. 아저씨."
"인사치례는 됐으니까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하면 될거다. 그럼 내일 보자."
"네. 살펴가십시오."
넙죽 허리를 숙이자 그가 흡족한 얼굴로 저 멀리 사라져갔다.
그날 이후, 타일 미장조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미장 기술을 나름대로 습득한 탓으로 얼마 지나지않아 10만원이 넘는 일당을 받아챙기는 미장 기술자로 새로이 태어났다.
모두 박씨 아저씨 덕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
요즘 장안의 화제는 최재송과 채수라가 주연으로 출연한 여명의 눈동자란 드라마였다.
나 역시 여명의 눈동자의, 애청자 중의 한사람인 탓에 날마다 고시원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여명의 눈동자에 이목을 집중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여명의 눈동자는 애국심과 로맨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고 명작이었다.
여명의 눈동자를 시청할 때마다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 정도로 여명의 눈동자에 푹 빠졌다.
드라마 시청을 끝마친 뒤 1층에 있는 주방으로 내려가자 사시를 준비중인 형님이 라면으로 배를 채우는 광경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따끔한 충고를 해왔다.
"임마. 나이도 어린 놈이 허구한날 방구석에서 드라마만 쳐보는게 한심하지도 않냐?"
그는 서울대를 졸업한 초엘리트였다.
그런 이유로 뚜렷한 반박을 할수 없었다.
그 형은 자타가 공인하는 인재였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검정고시 학원에서 중졸과 고졸 과정을 끝마쳐라. 그후에 대학교에 들어가."
나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여유가 되면 형말대로 할게요."
그제서야 그가 화가 풀린 얼굴로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마라. 부랄 두쪽 밖에 없는 놈은 공부가 최고라고."
"네. 알고 있습니다. 형님."
"그럼 나중에 보자."
그형은 그말을 끝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이른 아침 부터 미장 오야지인 박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이번 주말에는 일을 못할거 같습니다.
-이유가 뭔데?
이럴 때는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불필요한 거짓말을 해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실은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할 생각입니다.
-대학교라도 들어갈 생각이냐?
-그것 보다는 중학교랑 고등학교 졸업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어서 그런거죠.
사정을 절절하게 얘기하자 폰에서 박씨 아저씨의 사람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번 주말은 학원에서 일봐라. 현장은 신경쓰지말고.
-고맙습니다. 아저씨.
-다 돕고사는거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공치사는 하지마라.
박씨 아저씨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신설동 인근의 검정고시 학원으로 직행했다.
그날 부터, 주경야독을 벗삼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갔다.
***
1984년의 새해가 밝아왔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대학가와 시민 사회단체, 야당 등이 연일 거국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전국 각지에서 펼친 탓이었다.
전두한 군사정부는 안전기획부와 보안사를 총동원해 대학생들과 사회단체, 야당 인사들을 남산의 대공 분실로 무차별적으로 연행했다.
그런 이유로 시중에서는 남산에서 하루밤 새에 수백, 수천명이 고문으로 죽어나간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허나, 나는 민주화 운동을 무관심으로 일관한 채 돈을 버는 족족 분당의 토지를 매입하는데 주력했다.
그런 노력 탓에 분당지역의 토지를 거의 50 만평 가까이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당연히 내 수중에는 거의 돈이 없었다.
미장일로 번 돈 거의 전부를 분당에 묻어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후회가 없었다.
미래의 도플갱어를 철석같이 믿은 탓이었다.
***
미장일을 끝마친 뒤 영화관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나만의 아프로디테인 정연희의 신작 영화가 단성사에서 절찬리에 상영중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관에는 정연희를 흠모하는 수많은 남성팬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다소간의 여성들도 보였지만 그녀들 태반은 정연희를 노골적으로 질시하며 남자친구들에게 쉴새없이 볼멘소리를 토해냈다.
허나, 남성팬들은 그녀들의 치근덕거림을 모르쇠로 일관한 채 스크린에 모든 이목을 집중할 뿐이었다.
니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지상 최강의 아름다움으로 중무장한 미의 여신이었다.
동서양의 수많은 미녀들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미모였다.
그날 이후, 정연희를 향한 열망이 극에 달할 지경이 되었다.
도저히 참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녀를 단 한번 만이라도 눈 앞에서 만나기 위해 선데이 서울이란 잡지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정윤희씨에게 팬레터를 보내려고 하는데, 주소를 알수없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폰에서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다.
-죄송하지만 일반인들에게 함부로 주소를 알려드릴수 없습니다. 그러니 담당 매니저 쪽에 전화를 해보시죠.
-그럼 그쪽 전화번호라도 알려 주십시오.
잡지사에서 얻어낸 전화번호로 연락을 넣자 수화기에서 굵은 목소리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정연희씨의 열성팬입니다. 팬레터라도 보내고 싶어서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러시면 정동에 있는 사무실로 팬레터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나름대로 고가의 선물을 준비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직접 만나서 선물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선물인데 그러시죠?
-다이아 목걸이를 선물할 생각입니다.
그러자 폰에서 갑작스런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예의 선굵은 남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러시다면, 내일 모레 오후 1시경에 미도파 백화점 2층 커피샾으로 나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대신 절대 연희한테 딴 짓을 하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오시면 매니저를 찾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전화를 끊자마자 시내 은행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정연희에게 선물한 다이아 목걸이를 급구하기 위함이었다.
은행의 잔고를 확인하자 2백만원 남짓한 돈이 전부였다.
어림짐작으로 다이아 목걸이를 간신히 구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를 만날수만 있다면 2백이 아니라 2천만원이라도 사용할수 있었다.
은행에서 돈을 찾자마자 곧바로 종로 귀금속 거리로 직행했다.
귀금속 전문점에 들어가자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들이 요요로운 민낯을 드러낸 채 내 손길을 애타게 갈구하고 있었다.
내 시선은 아름답게 빛나는 다이아가 촘촘히 박혀있는 목걸이로 향했다.
다이아 목걸이를 손짓하자 사장 아저씨가 내 앞으로 목걸이를 가져왔다.
조심스럽게 다이아 목걸이를 세심히 살핀 뒤 사장에게 운을 뗐다.
"어느 정도의 가격인가요?"
그가 내 위아래를 매의 시선으로 흝으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허름한 차름새가 성에 안차는 눈치였다
"아무리 못해도 230 만원은 주셔야 하겠습니다."
곧바로 그에게 흥정을 걸었다.
"제가 가진 돈이 200 만원 밖에 없어서 그런데, 30만원 정도만 깍아주실수 없을 까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지금 당장 현금으로 값을 치루겠습니다."
그러자 사장이 고민스런 얼굴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 뒤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현금이 있나요?"
"네.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테이블 위에 돈가방을 올려놓으며 안을 살짝 벌려주자 사장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수다. 200만원만 내고 다이아 목걸이를 가져가쇼."
"고맙습니다. 사장님."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고급스런 보석함에 다이아 목걸이를 데코한 뒤 신림동 고시촌으로 부리나케 되돌아왔다.
이틀 후.
미도파 백화점의 커피샾으로 들어간 뒤 매니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연희씨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샾 뒤편에 위치한 룸으로 나를 안내했다.
룸안으로 들어가자 찬란한 미모를 과시하는 그녀가 그림같은 자태로 의자에 앉아 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연희 곁에는 굴강한 생김새의 중년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자에게 목례를 취한 뒤 그녀에게 내가 찾아온 용건을 똑부러지게 밝혔다.
"정연희씨를 오래전 부터 흠모한 팬 중의 한명입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뭐라 말할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심경입니다."
그러자 연희가 다소곳한 자태로 고혹적인 눈웃음을 내비치며 자필 사인이 기입된 자신의 화보집을 나에게 건넸다.
"조사장님에게 말씀은 들었어요. 저에게 주실 팬레터와 선물을 준비하셨다면서요?"
그녀가 기대만발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쇼핑백을 쳐다봤다.
고급스런 보석함을 건네자 연희가 환한 미소를 내비치며 보석함을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그녀는 내가 선물한 다이아 목걸이를 백옥같이 고운 목덜미에 멘 채 나를 향해 연신 감사의 변을 내뱉었다.
"정말 너무 고마운 선물이에요. 감사해요. 태수씨."
"아닙니다. 그저 제가 좋아서 선물한 거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나름 겸양지덕을 내비치자 그녀가 거듭 화사한 미소를 드러내며 나를 향해 조신하게 목례를 취해보였다.
나는 그날, 정연희와 저녁을 함께하며 내 인생 처음으로 꿈만 같은 시간을 보냈다.
2백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순간이었다.
< 시작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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