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98화 (198/200)

#197

휠체어에 앉은 노인과, 그 앞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풍경.

누군가 멀리서 이 모습을 본다면,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라던지, 묘한 대비감 같은 것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사자인 윤태형은 그런 철학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스쳐 지나가는 추억들을 조심스레 곱씹을 뿐이다. 가장 오래된 추억은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와 놀던 기억이다.

그 소년은 자라 아버지가 되었고, 두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손자인 태준이를 처음 안았을 때의 기억으로 변했다.

‘옛날을 그리워하다니.’

과거를 동경하는 인생과 과거를 동정하는 인생을 비교하자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낫다.

윤태형은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언제나 어제보다 지금이 나았고, 미래는 더 나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더는 그런 자신감이 없다.

꺄르륵!

수많은 아이들의 각양각색의 웃음소리, 그 사이에서 할아버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동그란 안경을 쓴 소녀가 헤헤 웃으며 달려들었다.

* * *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우리나라에서 소설 제일 잘 쓰는 사람이라면서요?”

소녀가 동그란 안경을 반짝반짝 빛냈다.

윤태형은 당황했다. 이맘때의 소녀와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거니와… 그 정보까지 완전히 틀려 있었다.

“나는 작가가 아니란다.”

“아닌가? 아녜요? 현수 오빠가 분명 그렇게 말하던데. 할아버지보다 소설로 돈 많이 번 사람이 없다고. 오빠가 거짓말을 한 거예요?”

아하. 그제야 윤태형은 소녀의 무지막지한 오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아차렸다.

“거짓말은 아니구나. 책으로 돈을 번 건 맞아. 나는 작가가 아니라 책을 만드는 사람이거든.”

“아하, 그렇구나아.”

뭔가 실망할 줄 알았는데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요, 책잘알은 맞죠?”

“책잘알?”

“책 잘 아는 사람이요. 요즘 말인데 모르셨구나. 하긴, 그럴 수 있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들었다면 기분이 퍽 상했을 테지만, 그게 어린아이라 그런가, 그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예전에 과일가게 사장님이 그랬거든요. 과일 키우는 법은 잘 몰라도 뭐가 좋은 과일인지는 잘 안다고. 맞죠, 할아버지?”

윤태형이 고개를 끄덕거리기가 무섭게, 소녀는 약간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종이 몇 장을 불쑥 내밀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 내려간 소설이었는데, <아빠가 뭐예요?> 라는 제목 옆에는 나복희라는 세 글자가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직접 쓴 거니?”

“네. 헤헤.”

복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녀가 내민 종이는 여기저기가 번질거렸고, 몇 군데는 거의 찢어질 듯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다.

컴퓨터로 소설을 쓰는 시대가 된 지 아주 오래 지났기 때문이다. A4용지나 500자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작업 방식은… 요즘은 노년 작가들조차 잘 쓰지 않는다. 기껏해야 필사할 때나 쓰는 방법일진대.

“혹시 여기에 노트북이나 컴퓨터는 없니? 이렇게 쓰면 힘들었을 텐데.”

“에이, 여기 보육원이잖아요. 보육원에 그런 비싼 게 어디 있어요?”

“많이 불편하겠구나.”

“불편하다기보단 부럽죠.”

“있는 애들이?”

“맞아요.”

복희가 입술을 빼쭉거렸다.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도 있고, 휴대폰도 있고, 가끔은 게임기도 들고 오거든요. 나도 그런 것 좀 갖고 싶은데.”

말하던 복희는 깜짝 놀랐다는 듯 주위를 힐끗거리더니, 그대로 검지를 들어 쉿, 하는 시늉을 했다.

“이 말은 다른 데서 하면 안 돼요. 저희 도와주는 분들이 싫어하신다고 그랬거든요.”

“…응?”

“그… 뭐라 해야 하지? 이상하게 그분들은 저희가 명품을 갖고 싶다거나, 게임기 같은 걸 갖고 싶어 하면 별로 좋게 안 보세요. 예전에는 그것 때문에 후원을 취소한 사람도 있대요.”

“허어.”

아이들의 ‘생존’은 바라지만, 아이들의 ‘생활’은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라.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저희도 뭘 갖고 싶을 수는 있는 거잖아요? 우리도 욕심이라는 게 있고,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렇구나,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야.”

그렇게 말하는 순간, 윤태형은 문득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다. 뭐랄까, 속이 쿡쿡 아파오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될 듯한…….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잉-!

그 바람에 윤태형이 쥐고 있던 종이들이 휘리릭 날아갔다.

“아앗!”

깜짝 놀란 복희와 아이들이 열심히 종이들을 집었지만… 몇 개가 웅덩이로 빠지고 말았다.

“복희 누나, 이거 물에 젖었어.”

“아냐, 괜찮아. 말리면 돼!”

“이미 번지는데?”

“으아앗! 진짜네! 연필로 썼는데 왜 이래?”

“종이가 녹는 것 같아!”

“맞다! 이거 재생지였지!”

복희가 비명을 질렀다. 글씨가 실시간으로 번져나갔다.

“오, 옮겨 적을 데 없나? 빨리!”

“누나! 나 아까 방에서 노트북 하나 봤어!”

“노트북? 그거 일단 가져 와!”

쪼르르 달려간 아이 하나가, 낡은 노트북을 들고 나타났다.

“이거 누구 노트북이야? 현수 오빠 건가?”

“현수 형아 건 이것보다 훨씬 멋있는 거야!”

“그럼 누구 거야?”

“따질 시간 없다! 글이 녹는다고!”

소녀는 그대로 노트북을 펼쳐들고, 종이가 녹기 전에 안에 든 내용을 재빠르게 옮기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닥-!

소녀는 알까. 눈을 번들거리며 소설에 열중하는 그 모습이,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어떤 어른의 모습을 꼭 닮아 있다는 것을.

* * *

“회장님!”

박재진은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희망보육원을 찾아왔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 들었습니다. 하필 제가 중국에 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아픈 데는요? 정밀검진은요? 안 받으셨죠?”

박재진이 순식간에 질문들을 쏟아냈다.

“지금이라도 다시 입원하시는 게….”

“좀 진정하게. 심호흡도 하고.”

오히려 윤태형이 박재진을 진정시키는 모양새였다. 그 말을 들은 박재진은 얌전히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심호흡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은 안 되는군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지원이에게 들었습니다. 아니, 이것도 좀 이상하죠? 저는 C&N의 부회장인데, C&N 부회장이 C&N 회장님이 있는 곳을 스패로우 팩토리 회장한테 들어야 하다니?”

“….”

“아무튼 정말로, 정말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회사도 지금 아주 난리가 아니라고요! 회장님이 빨리 복귀하셔야 합니다.”

“아까는 병원 가라며?”

“물론 병원도 가야 하지만… 아, 이거 진짜 모르겠네. 병원이 먼저지, 복귀가 먼저지? 회장님 뜻을 따르겠습니다. 회장님, 어느 쪽이 더 시급하신 것 같습니까? 말씀만 해 주세요.”

“병원과 회사라….”

고민하던 윤태형이 씩 웃었다.

편안해 보이는 미소였다.

“나는 둘 다 가지 않으려 하네.”

“뭐라고요?”

박재진의 두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윤태형은 그런 박재진을 향해, 이미 결심했다는 듯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상도>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 위대한 상인은 자신이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이라고.”

“그게 무슨….”

“임상옥이는 솔개가 닭을 채가는 걸 보고 자신의 운이 다했음을 깨달았다고 하지. 그에 비하면 나는 한참 멀었어. 자식을 둘이나 잃고서야 깨달았으니.”

박재진의 표정은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윤태형이 허허 웃었다.

“내가 회장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뭐겠는가?”

“카리스마죠.”

“만약 진짜 그게 이유라고 생각한다면 말야, 박재진 자네는 멍청한 친구야.”

박재진이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지금까지 쌓아 온 인맥이죠. 인맥이란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거고요.”

“요즘은 내 기억력이 별로라네. 다른 사람들의 약점이 뭐였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는군.”

“다 적어 두시지 않았습니까? 그 애지중지하시는 낡은 노트북에 말이죠.”

“낡은 노트북이라… 혹시 저거 말인가?”

윤태형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 뒤쪽을 가리켰다.

타다다다닥! 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그곳에는… 한 소녀가 신나게 노트북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 노트북의 모델을 본 박재진의 눈이 커졌다.

“너, 너! 그거! 야! 꼬마야!”

“그만두게.”

윤태형이 제지했다.

“저 아이는 소설을 쓰고 있다네.”

“소설이요?”

“그래, 편집자 제1 수칙이 뭐지?”

박재진이 허어, 하고 허탈하게 말했다.

“…소설 쓰는 소설가는 건들지 않는다, 아닙니까? 회장님이 처음으로 가르치신 거였죠.”

“여전히 기억하고 있구만.”

윤태형이 마치 부처님처럼 웃었다.

“그래서, 진짜 안 가신다고요?”

“그럴 거야.”

“하…… 모르겠네.”

박재진은 한숨을 푹 쉬더니, 윤태형의 옆에 주저앉아 담배를 하나 물었다.

윤태형이 그 담배를 빼앗았다.

“인마, 애들이 보잖냐.”

“그러네요, 제기랄.”

“애들이 듣잖냐.”

“에휴. 그러다 C&N 뺏겨도 모릅니다?”

“우리가 만든 건데, 우리가 뺏긴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나?”

“안 뺏길 겁니다, 안 뺏길 거예요.”

지금까지 C&N을 이끌어온 두 거인의 어깨 너머로, 꺄르륵-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복작복작하고도…… 천천히 울려 퍼졌다.

* * *

“협조 감사드립니다. 이 쪽으로 오세요.”

“아, 예.”

형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검사실을 두리번거렸다. 겉보기에는 그냥 사무실이랑 다를 게 없는데, 검사실이라 그러니 뭔가 무서운 느낌이다.

“오른쪽 의자 말고, 왼쪽 걸로 앉으세요.”

“무슨 차이가 있나요?”

“오른쪽은 제 고객님이 앉는 데거든요.”

검사에게 고객이라고 하면……

“범죄자들이요?”

“오른쪽 의자는 과장 조금 보태서 박물관에 보내도 되는 의잡니다. 저기에 앉은 연쇄살인범만 네 명에, 그냥 살인범은 열한 명이죠. 뭐,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으시다면야…….”

“아뇨, 됐습니다.”

형우는 진저리를 치며 오른쪽 의자를 슬쩍 밀었다. 검사가 허허 웃었다.

“아무튼,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요.”

형우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윤태준 사건과 관련하여 표절 조작과 병원에서의 일을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시민이 직접 계획살인범을 잡는다라…. 들어 본 적은 있는데 진짜로 겪는 건 처음이네요.”

“아, 그 연쇄살인범 말씀하시는 거죠? 포주 일 하던 조폭한테 잡혔다는… 하도 충격적인 사건이라 영화로도 나왔었잖아요. <추적자>요.”

“맞아요. 역시 작가라 그러신가, 영화에도 조예가 깊으시네요. 아무튼, 아마 이번에 용감한 시민상도 나오실 거예요.”

용감한 시민상이라. 아마 큰 명예가 될 것 같다.

“그나저나 재판은 언제쯤 열릴까요?”

“이 정도로 큰일이니… 아마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열릴 겁니다. 형우 작가님도 참여해 주셨으면 하는데… 혹시 가능할까요?”

형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그건데… 그 전에 검사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아, 예. 말씀하세요!”

“그… 재판이 끝난 후에 윤태준을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혹시 가능하겠어요?”

“그 정도야 뭐, 가능합니다.”

검사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적인 겁니까, 사적인 겁니까?”

“어… 그게 무슨 차이죠?”

“공적인 문제면 취조실에서 만날 테고, 사적인 문제면 면회실에서 만나겠죠.”

아하. 공사의 구분이라는 게 범죄랑 관련되어 있나 없나의 차이였구만.

“면회실이면 됩니다.”

“아… 하. 알겠습니다.”

검사의 얼굴에 잠깐 아쉬운 기색이 드러났다.

실적 쌓을 기회라고 생각했나 보다.

* * *

친족살해모의, 은폐 시도, 주가 조작, 누명, 무고.

민법 형법 가릴 것 없이 여기저기 걸릴 게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방법은 있어.’

법정에 서기 전, 윤정아는 이를 악물었다.

자기는 감옥에 가도 괜찮지만… 아들만큼은 어떻게든 빼낼 생각이었다. 그 방법이란 간단하다.

모든 죄를 자신이 했다고 인정하면 된다. 아들은 그저 멍청하게 따랐을 뿐이라고 처리된다면… 태준이는 기껏해야 몇 년이면 감옥에서 나올 테다.

솔직히 말해 가끔 다짐이 흔들렸지만… 다행히 어제 꿈을 꿨다. 남편이 나오는 꿈이었다.

-정아 씨 남편이 그 이번에 젊은 작가상 타셨다는 분이시죠?

-맨부커상에도 이름이 올라갔다고 하더라고요.

-흐흐, 그렇게 소설만 아는 사람이니 심심하지 않겠어요?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안 그렇더라고요. 며칠 전에는 요리도 직접 해 주더라고요. 나 참, 아주머니들 있으니까 괜찮다고 했는데.

-게다가 소설이라는 게 상상력이 있어야 쓰는 건데, 남편이 그렇게 재미없지는 않아요.

-게다가, 얼마나 가정적인데요. 매일 태준이 안고 다니면서 우리 애기, 우리 애기, 한다니까요.

좋은 사람이었다.

태준이가 실수로 컴퓨터의 선을 뽑아서 쓰던 소설을 전부 날려버려도 하하 웃기만 하던 사람.

자신이 실수로 엎지른 뜨거운 물을 대신 맞아 줬을 때는 너무 놀랐었다.

-에이, 당신이 다치는 것보단 내가 다치는 게 낫지. 남편이 아내 지키는 게 뭐 특이한 일이라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자신에게 남편은 말했다.

-게다가 화상도 뭔가 꽃 모양이라서 예쁘네. 예전부터 이런 문신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걱정 말라는 듯이 어깨를 껴안던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 만약 자신의 삶 중 한 부분만을 남겨야 한다면, 분명 저 부분이겠지.

하지만.

이런 소중한 추억만을 주고… 남편은 죽어버렸다.

그럴 거면 추억이나 주지 말지.

후회하고 아파할 시간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태준이가 있었으니까.

-태준아, 뭐 해?

-나 아빠 노트북 갖고 놀아. 아빠가 매일 이렇게 했어.

그 앙증맞은 손으로 두드리던 노트북 소리가, 남편을 잃은 윤정아의 희망이었다.

-태준아, 난 너만 있으면 돼. 너도 그렇지?

-응. 나도 엄마만 있으면 돼. 나 꼭 아빠처럼 대단한 사람이 돼서 엄마 지켜 줄게.

-그래, 태준아. 장하지. 장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변한 건 없다.

윤정아는 그렇게, 재판장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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