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96화 (196/200)

#195

“태준아, 거기 있니?”

윤정아는 집으로 오자마자 아들을 찾았다. 아들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귀를 가져다 대니 안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들, 문 좀 열어 봐.”

윤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나쁜 선택이라도 한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난 윤정아는 그대로 방문 열쇠를 찾아 여기저기를 뒤집고 다녔다.

“열쇠를 어디에 뒀더라, 열쇠를….”

그렇게 허둥대며 찬장을 뒤지던 도중, 윤정아는 실수로 뭔가를 밀어 넘어트렸다.

와장창!

윤정아가 떨어트린 것은 과거 남편이 살아 있을 적, 어린 태준이와 찍었던 몇 안 되는 가족사진이었다. 재빨리 확인해 보니, 가족들의 얼굴 부번에 쩍 하고 금이 가 있었다. 너무나도 불길한 형상이었다.

“안 돼, 안 돼.”

불안감에 휩싸인 윤정아는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유리 조각을 집어 올렸다. 손을 베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얏.”

화끈한 통증과 함께 손가락 끝이 쩍 벌어졌다. 안에서 피가 콸콸 흘렀다. 그 순간 윤정아가 고통과 함께 느끼고 만 것은… 지독한 현실감각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쓰러진 아버지, 문 안에 틀어박힌 아들, 산산조각난 가족 앨범… 그 모든 것을 차례로 떠올리며, 윤정아는 이를 악물었다.

‘패닉은 안 돼, 패닉은 안 돼.’

호랑이 굴에 들어왔으니 정신을 차려야 한다. 윤정아는 피가 흐르는 부위를 꾸욱- 하고 눌렀다. 거기서부터 시작한 선득함 덕택에 윤정아는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똑- 똑.

모래시계 속 고운 모래가 흐르듯, 그 피가 손바닥을 가득 적실 때쯤 윤정아는 열지 않은 지 오래된 찬장에서 집의 방문 열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철컥.

아날로그 열쇠가 맞물리는 소리.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손이 벌벌 떨렸다. 이 문 뒤에 있는 것은 선택의 기로일 테다.

알타이야.

문득, 어릴 때 봤던 그리스 신화의 알타이야가 떠오른다. 자신의 손으로 위대한 아들을 단죄하여야 했던 비운의 여인 말이다.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더니.’

또다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려 하는가. 윤정아는 이를 악물었다.

제 삼촌인 윤정식을 싫어한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정식 또한 태준이를 싫어했으니까. 피장파장이다. 하지만 약에 취해 아버지를 공격한 건 이야기가 다르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끼이익-

윤정아는 아들의 방 문을 열었다. 불 꺼진 방구석에 태준이 있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서, 겁먹은 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을 보며, 윤정아가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들을 정리했다.

‘태준아. 넌 오늘 정말로 바보 같은 짓을 했어. 네가 한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고, 넌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그렇게 말하면 충분할 테다. 윤정아는 아들의 눈을 바라봤다.

“태준아. 넌….”

“엄마.”

“……아무 잘못 없단다.”

윤정아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코 자자.”

윤정아는 이제 거의 서른이 되어 가는 아들을, 마치 다섯 살짜리를 대하듯이 끌어안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되뇌면서 말이다.

* * *

“야, 와이어 10cm 정도만 더 띄우자.”

“아까는 20cm 옆으로 옮기라더니, 이제 10cm 올리라고요?”

“그러면 그림이 잘 나올 것 같아서 그래.”

“잠시만요, 무술감독이랑 제작팀 불러서 이야기 좀 해 볼게요.”

“그래, 조명! 미리 준비하고 있어!”

강주범 감독이 소리를 질렀다. 덩치 크고 우락부락한 강 감독이 저리 소리를 질러대니 무서울 만도 한데, 스텝들은 익숙하다는 듯 장비를 새로 설치하고, 와이어의 길이를 조정했다.

“이번 추석에는 뭐 보내주시려나. 을씨년스러운 무덤 옆에서 촛불 하나 들고 촬영했을 때는 굴비 세트 보내줬었는데.”

“저번 이틀 동안 비 맞으면서 밤샘 촬영한 후에는 녹용이랑 장뇌삼이었어.”

“지금은 하루 종일 와이어만 만지고 있으니, 무덤보다는 어렵고 비 맞는 것보다는 쉽네. 대충 한우 세트 정도 예상해 봄.”

“아마 그 정도일 듯?”

일은 빡세게, 보상은 더 빡세게!

그것이 강주범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그 철학은 이런 힘든 상황일수록 빛을 발했다.

처음에는 지옥에서 온 장군 같은 모습에 주눅이 들었던 스텝들도, 그 대가를 받으면 곧 강주범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야, 조명아. 너희 막내 오늘 꼭 필요하냐?”

“없으면 힘들죠.”

“의상팀 셋째가 조명 좀 만질 줄 아는데. 걔로 채워 넣으면? 오늘 의상팀은 할 일 없거든.”

“그럼 좋죠. 그런데 왜요?”

“이 자식이. 니네 막내 결혼기념일도 모르냐?”

“그게 벌써 오늘인가? 야! 막내야! 짐 싸서 가라! 일 하느라 집안 등안시하면 인마, 나처럼 이혼남 되는 거야!”

“옙! 감사합니다!”

조명감독이 소리를 지르자, 막내가 경례 제스쳐를 취한 뒤 그대로 후다닥 달려갔다.

“잠깐만, 조명 막내야!”

강주범이 나가던 녀석을 불러세웠다.

“너 사는 곳이 한국대입구 근처라 했지?”

“와아, 감독님은 애들 사는 곳까지 아십니까?”

“그걸 아니까 선물을 보내지. 아무튼 막내야. 그 근처에 빌라 모여있는 데 있지? 사거리 오른쪽에 말야.”

“예, 예. 대학생들 많이 사는 곳이요.”

“맞아, 거기! 오늘 다섯 시간 먼저 보내줄 테니, 심부름 하나만 해 줄 수 있겠냐?”

“당연하죠! 말씀만 하세요?”

“별 건 아니고, 이거 참새치 작가님한테 부탁받은 건데, 좀 가져다드려라.”

강주범이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벌린 틈으로 안쪽을 본 조명 막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런 거 막 가져다줘도 돼요? 비싼 거잖아요?”

“누구 부탁인데 거절하냐? 그 사람 없었으면 촬영 시작도 못 했다.”

“그건 그렇지만…… 이런 걸 어디에 쓰려고?”

“글쎄다.”

강주범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탕이라도 잔뜩 받으려나 보지.”

* * *

-여보, 내가 없어도 우리 태준이를 잘 부탁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말 마.

-작가가 평균수명이 유달리 짧다더니 그게 내 이야기인 줄은 몰랐네. 그러니까 똑바로 대답해 줘. 대답도 못 듣고 가기는 싫어.

-알았어. 그럼 맹세할게. 태준이는 알아서 잘 키울 거야. 당신처럼 완벽한 사람이 되겠지.

-그래, 부탁할게. 정아야.

윤정아가 자동차 페달을 밟았다.

집으로 올 때와는 다르게, 한없이 부드럽고도 숙련된 운전 솜씨였다.

“아버지가 있는 병원이 충청도에 있는 □□병원 맞죠?”

“그렇습니다, 사장님. 기자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서울 바깥쪽으로 모셨습니다.”

정 상무는 언제나 센스가 좋다. 이번 일이 잘 끝나면 보상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정 전무는 어떨까. 잘 어올린다고 생각한다.

그대로 톨게이트를 통과해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낮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잘 없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맞을까?”

핸들을 꾸욱 쥐며, 윤정아가 중얼거렸다.

“이건 분명 미친 짓이야. 십중팔구는 실패할 테고, 성공하더라도 지옥이겠지.”

그걸 알고 있음에도,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쿠앤틴 타란티노는 자신의 영화 <바X터즈 – 거친 녀석들>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진짜로 무서운 자들은 미친 자들이 아니라, 제정신으로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이라고.

윤정아는 그 괴팍한 노감독의 말을 이제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목적지까지 10km 남았습니다.”

내비게이션이 건조하게 말했다.

병원까지 오는 길은 쾌적했다.

미리 준비해 뒀던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자연스럽게 병실까지 걸어 들어갔다.

병원이란 의외로 몰래 들어가기 쉬운 공간이다. 약간의 당당함만 있다면 그 누구도 쉽게 의심하지 않는다더니. 컨설턴트의 말대로였다.

‘후우.’

아버지의 방은 당연하게도 1인실이다.

부자라서 1인실을 사용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침입하기가 쉽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잠입은 은밀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은밀한 건 은밀하지 않아요. 자연스러운 게 은밀한 거죠.

어제 윤정아는 약간 음습한 골목을 지났다. 컨설턴트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죠.

윤정아의 사정을 들은 컨설턴트는 그렇게 말했다.

-연쇄살인범들 중에는 병원 관계자가 많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잘 안 걸리거든요. 병원에서 사람 죽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미국에 한 간호사는 거의 100명을 죽이는 동안 의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해요. 그녀가 의심을 받았던 건, 깽값을 목적으로 위장 입원한 한 환자가 죽었기 때문이죠.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 일이 아니라면 걸리지도 않는다는 거고.

그렇게 말하며, 컨설턴트는 차가운 냉동고에서 주사기 하나를 꺼냈다.

-이게 바로 그녀의 수법입니다.

꿀꺽.

윤정아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누워서 숨을 쌕쌕거리고 있었다.

-몸에 직접 찌르지는 말고, 은근슬쩍 링거 같은 데 꽂아 넣으세요. 그러면 다음 날 부고란에는 ‘자연사’라고 적혀 있을 겁니다. 게다가 나이도 많은 사람이라면서요?

자연사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꿈틀거리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윤정아는 생각했다. 어차피 당신은 살 만큼 살았노라고.

인간의 3대 욕망은 흔히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이 모든 것을 다 누린 사람이다. 그러니… 이대로 가도 후회는 없으리라.

‘죄송해요, 아버지.’

윤정아는 주사기를 집어 들어 링거에 꽂았다.

손끝에 힘을 주어 쭈욱 밀어 넣었다.

‘하지만 절 이렇게 가르친 건 아버지잖아요.’

아버지는 말했다. 집중한다는 것은 그 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윤정아에게 가장 중요한 건 태준이었다.

제 아비를 꼭 닮은 아들.

주변에서 태준이를 멍청하다고 해도, 윤정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애들은 원래 다 약간은 멍청해 보인다. 뉴턴도, 셰익스피어도, 자신조차도 그랬을 거다.

그걸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게 부모라는 존재가 아니던가. 아버지가 자신을 만들었듯, 자신 또한 아들을 완성시킬 뿐이다.

죽은 남편을 꼭 닮은 태준이는.

자신의 도움을 통해… 남편과 똑같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날 것이다.

꾸욱, 꾸욱.

더 이상 피스톤이 눌리지 않았다.

어느새 내용물을 다 집어넣은 모양이다.

이불 속 아버지가 크게 들썩거렸다. 약이 잘 들어갔다는 신호다.

‘이제 됐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고 깔끔했다.

이제 아버지는 자연사 처리될 테고, 아들의 일은 완전히 묻히리라. 그렇게 문을 여는 순간.

“일은 다 끝나셨나요?”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문을 막고 서 있었다.

결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왠지, 이 아이가 여기에 있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윤정아가 앞을 노려봤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있지?”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여기는 내 아버지의 병실이니까.”

“당신 동생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정아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휘청거리는 윤정아를 내려다보는 형우의 시선이 더없이 차가웠다.

‘어디부터 본 거지?’

윤정아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마 약을 넣는 건 못 본 것 같다. 그걸 봤으면 진작에 말리거나 사람을 불렀겠지. 그러면 기껏해야 동생의 말을 듣고 병실을 확인해 본 정도일 테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컨설턴트가 그랬지. 가장 평범한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거라고.’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평범한’반응은 ㅇ떤 걸까? 명석한 윤정아는 그 답을 순식간에 찾아냈다.

“간호사! 의사! 아무나 와 보시죠?”

윤정아가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밑에서 의사들이 후다다닥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병원은 대체 환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외부인이 1인실에 이렇게 마구잡이로 들어오다뇨?”

그대로 기세를 탄 윤정아는 형우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남의, 그것도 라이벌 회사의 회장의 병실에 이렇게 무단으로 들어와? 만약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가는… 스패로우 팩토리와 이 병원 둘 다 가만 안 두겠어.”

슬쩍 아버지에게 위해가 생긴다면 그건 네 탓이다. 라는 뉘앙스로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알리바이도 만들었다.

형우가 씩 웃었다.

“연기는 그만하셔도 돼요. 다 끝났으니까.”

“다 끝났다고? 뭐가?”

“사장님께 드린 말씀 아닙니다.”

그 순간. 뒤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윤정아는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엄청난 소름을 느꼈다.

이 방은 분명 1인실인데… 뒤에서 느껴지는 이 인기척은 대체 뭐란 말인가?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 윤정아의 눈에, 두 발로 꼿꼿이 선 아버지, 윤태형 회장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 아버지?”

“…늙은 사람에게 못 시키는 게 없구나.”

윤태형은 천천히 얼굴 쪽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쥐자, 얼굴이 구겨지듯 잡혔다.

“얼마나 답답하던지.”

부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윤태형의 얼굴이 찢어졌다.

“흐, 흐아아아악!”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윤정아는 비명을 질렀다. 두 팔로 바닥을 기다가 머리를 몇 번이나 부딪혔다. 형우가 윤정아의 어깨를 덥썩 잡았다.

“진정하고 잘 봐요.”

“…뭐?”

“진짜 얼굴이 아니예요. 특수분장이죠.”

며칠 전, 강주범에게 급하게 부탁해서 받아온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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