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95화 (195/200)

#194

“정 상무? 방금 뭐라고…?”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사장님. 스패로우 팩토리의 기자회견을 보자마자 자택으로 달려갔지만… 죄송합니다. 회장님보다 조금 느렸습니다.”

“그, 그런데 도착해 보니 아버지가 쓰러져 있었다… 그 말이죠 지금? 그 방에는 태준이 말고 아무도 없었고?”

“예. 본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마도 약에 취해서 저지른 일인 것 같습니다. 일단 병원 측에는 단순 실족으로 말해 놓기는 했습니다만… 아, 병원 위치는 메시지로 보냈습니다.”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윤정아는 그대로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가까스로 손에 힘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아있어서 그랬을 테다.

“…태준이는요?”

“아마 집에 그대로 계실 겁니다.”

“그냥 뒀다고요? 정신적으로 충격받은 아이를?”

“회장님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후, 됐어요. 엘리베이터라서 전화 끊을게요.”

“예, 알겠습니…….”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윤정아는 전화를 끊었다.

벽이 투명한 엘리베이터는 아래가 훤히 비쳤다.

아버지가 특별주문한 제품이었는데, 내려갈 때면 늘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위치를 만들어 주는 건 회사다. 그러니 회사에서 나간다는 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사장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운 나쁘게도 이사 몇 명을 만났다.

“어디 가십니까?”

“급한 일이 생겨서요.”

“어…… 잠시 후에 회의가 있지 않습니까?”

사장 앞에서 세모눈을 뜨고 따박따박 대드는 이사진들을 보며, 윤정아는 분노했다.

‘2년 전에는 눈도 못 마주치던 인간들이!’

하지만 화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도착해 아들의 상황을 봐야 했다. 윤정아는 전무 하나를 붙들었다.

“송 전무. 송 전무가 오늘 회의 책임지고 진행해요.”

“제가 말입니까?”

“누가 뭐라고 하면 제 이름 대라고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내달린 윤정아는 그대로 차 문을 벌컥 열었다.

백미러로 당황하는 임원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딴 거에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윤정아는 바로 블루투스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았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므로….

“이런 썅!”

벌써 네 번째다. 차라리 전화가 꺼져 있다면 모를까. 켜져 있는데 받지 않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자신도 모르게 안 좋은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윤정아였다.

“이 개 같은 신호등!”

머피의 법칙일까, 신호도 평소보다 잘 걸렸다.

“빨리 바뀌어라, 빨리, 빨리빨리….”

-부아아아아아앙!

신호가 바뀌자마자 윤정아는 페달을 힘껏 밟았다. 앞이 스쿨존이니 속도를 줄이라며 네비게이션이 띵띵거렸지만 무시했다. 내 아이가 위험한 마당에 다른 아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벌금? 벌점? 받으면 그만이다.

“어머어머, 저거 뭐야?”

“세상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차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좋지 않은 소리라는 건 입 모양만 봐도 알겠다.

그럼에도 윤정아는 표지판을 절반쯤 무시하고 달렸다. 윤정아의 상식에서 법이란 건 지켜야 할 것이 아니었다. 단지 어기면 리스크가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충분한 이득이 있다면 법 또한 충분히 어길 가치가 있다.

끼이익!

윤정아의 차량이 대문 앞에 멈췄다.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였다.

그러니 자질구레한 교통법을 어긴 것에 후회는 없었다. 저울질에 선악 따위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니 더 좋은 질문을 하자. 요컨대, 어느 쪽이 더 이득이 되는지, 어느 쪽이 나에게 보다 소중한지 같은 것 말이다.

* * *

[충격! 참새치 작가의 표절 의혹, 사실은 C&N의 조작이다?]

[전 프로파일러에게 듣는 위조 수법. ‘재정립’이란 어떤 기술인가?]

[스패로우 팩토리, 이런 식의 도발에 가만 있지 않을 것. 고소 준비 중이라고 밝혀.]

[문학평론가 천병옥, 30년 가까이 문단에 있었지만 ‘만들어진 표절’은 처음 본다. 분노보다 오히려 어이없음이 앞서.]

[당근 펜의 출처는 어디인가? 스패로우 팩토리 ‘불법적으로 획득한 것은 아니다. 현재 경찰 수사에 있으니, 후에 말씀드리겠다.’ 언급 파장.]

[[긴급속보] 윤태형 회장 입원. 경위는 조사 중.]

[쓰나미도 잘 타면 서핑이 가능할까? 역경을 이겨낸 참새치 작가, 하루 사이 매출 700%로 뛰어.]

-나 표절 기사 보고 참새치 책 쌓아놓고 기름 뿌리고 불 지른다음 거기서 슬라이딩했는데 아;

ㄴ조커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꺼어어어억ㅋㅋㅋㅋ

-나는 불은 안 질렀고 찢기만 해서 다시 테이프로 붙이는 중이다;

ㄴㅋㅋㅋㅋㅋ그 노력이면 그냥 사라.

ㄴ퍼즐맞추기 난이도 무한ㅋㅋㅋ

-진지하게 C&N에 소송 걸면 참새치 책 다시 돌려주냐?

ㄴ돌려주겠냐?

-C&N 소설이 요즘 왜 재미없는지 알겠음. 소설보다 현실이 더 스펙타클한 기업임.

ㄴ책이 내가 된다ㅋㅋㅋㅋㅋㅋㅋ

ㄴ이야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야기 그 자체가 되어버림 ㅋㅋ

-회장 지금 입원했다던데 이유 뭘까?

ㄴ보나마나 조만간 휠체어타고 나타나서 불쌍한척 ㅈㄴ할 듯.

ㄴ근데 이 정도면 진짜 빡쳐서 뒷목 잡고 쓰러졌을 수도 있음

ㄴ솔직히 가능성 있다.

현대물리학에서의 에너지란 신기한 면이 있다.

고전물리학에서의 에너지가 +100에서 시작해서 0을 거쳐 –100이 되는 어떤 것이었다면, 현대물리학의 에너지는 –100이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자기 +100으로 변해버릴 때가 있다고 한다.

물리학도가 아니니만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런 현상 자체는 굳이 물리학이 아니어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여론이란 게 그래.”

면회실 창문 너머로, 윤정식이 말을 건넸다.

“여론의 방향은 언제든지 휙휙 바뀌어 버리거든. 그 힘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말야. 스패로우 팩토리의 일도 마찬가지지.”

어제까지 끓어 넘치는 증오였던 것이, 오늘에서는 넘치도록 과분한 사랑이 됐다.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하기엔 그 편차가 컸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면 이런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을 것 같아요. 무언가가 이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니… 너무 차이가 커서 조금 어지러울 정도인걸요.”

형우의 말을 들은 윤정식이 피식 웃었다. 그 탓에 유리창에 입김이 서렸다.

“남들이 하는 소리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야, 뭘 하든 어지러워서 오래 못 가지.”

“남들 이야기가 아니에요.”

형우가 고개를 들어 윤정식을 마주 봤다.

“당신 이야기죠.”

“뭐?”

윤정식이 한참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파하핫-!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불과 며칠 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대부분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회사를 스스로 깨부순 거나 마찬가지지. 아주 멍청한 짓이었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엄청나게 홀가분한 느낌이군. 예전에는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말야.”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스스로 멍청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을 때. 요컨대, 글을 쓰자고 결심했을 때 같은 거 말이죠.”

“그건…… 참으로 맞는 말이군.”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든 작가들이 공감하는 바가 있다면, 글쓰기는 정말로 멍청한 짓이라는 거다. 오죽하면 한 작가는 ‘작가라는 쓸모없는 직업의 존재야말로 신의 부재증명이다.’라고 했겠는가? 그렇게 ‘작가들의 농담’을 주고받은 둘은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내가 이렇게 웃어서는 안 되는데, C&N은 어떻게 됐지?”

형우가 미심쩍게 바라보자, 윤정식이 말을 보탰다.

“여긴 TV가 없거든.”

“아…… 윤태형 회장이 입원한 것도 모르시겠네요.”

“입원이라고? 아버지가?”

윤정식은 깜짝 놀라 일어서다가, 그만 의자를 엎어버릴 뻔했다.

“자세히 말해 봐.”

“자세히는 저도 몰라요. 다만 뒷목을 잡고 쓰러진 게 아닐까…….”

“불가능해.”

윤정식이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건 함량 미달인 드라마 작가들이 억지로 이야기 잡아 늘일 때나 쓰는 억지같은 거라고. 총 맞은 사람이 뒤로 밀려나는 거랑 마찬가지지. 현실의 사람은 그렇지 않아. 게다가 그 사람이 아버지라면…… 역시 불가능해.”

윤정식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다른 말을 해 봐. 사람이 쓰러질 일이 뭐 있지?”

“지병이요? 뇌졸중이라거나…….”

“없어.”

윤정식이 단호하게 말했다.

“강원도에 아버지를 모셨을 때…….”

“납치감금했을 때 말이죠?”

“괜한 건 넘어가. 아무튼, 그때 주기마다 건강검진을 했는데, 지병 따위는 없었어. 오히려 나이에 비해 조금 더 건강했지. 다른 걸 말해 봐.”

“다른 거라…….”

다행히 작가가 직업인 형우로서는, 상상력 말고는 남는 게 없었다.

“깜짝 놀라서 뛰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을 수도 있죠.”

“대체 어떻게 발을 헛디뎌야 사람이 입원을 해?”

“다리가 부러졌을지도요.”

“그딴 걸로 아버지가 회사 대신 병원에 간다고? 차라리 참새가 고양이를 잡는다는 말이 더 현실성 있겠군.”

“그거 가능하긴 한데, 제가 봤거든요.”

“……약이라도 하나?”

그 말을 내뱉은 직후, 윤정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혹시 이건가?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윤태준일지도 몰라.”

“윤태준이 왜요?”

“그 자식, 수상한 허브를 하거든.”

윤정식이 설명했다.

“거기에 취해서 있다가 실수로 아버지를 때린 거야. 그거라면 말이 되는군.”

“……설마요.”

“불가능한 걸 전부 제외하면, 남은 게 아무리 허무맹랑해도 그게 정답이다.”

셜록홈즈의 명대사다.

“그렇다면 위험해.”

“윤태준이요? 하긴, 만약 당신이 하는 말이 다 맞다면 윤태준은 후계자 자리는 물 건너갔겠네요. 약에 취해 사람 팬 놈을 후계자로 앉힐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래, 그래서 위험하다는 거야. 박재진은 아직도 중국에 있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로…….”

“빌어먹을.”

윤정식이 면회실 유리창에 딱 달라붙었다.

“……부탁이 있다.”

“부탁이요?”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그러겠어?’라며 반쯤 장난처럼 듣고 있던 형우조차도, 그 진지한 목소리 앞에서는 덩달아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들어 보고요. 뭔데요?”

“……아버지가 위험해.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

“말도 안 돼요. 아무리 윤태준이 나쁜 녀석이라고 해도, 어떻게 자기 혈육을 공격하겠어요?”

“그래, 그건 악의만으로는 하기 힘든 짓이지. 그런데… 사랑이 섞인다면 어떨까?”

“사랑이요?”

“그래. 사랑. 그건 진짜 지독한 거거든.”

윤태준은 이제 사랑의 힘을 믿는다.

이진아와의 사랑 덕에 윤태준은 악독한 사업가에서, 인간적인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으니까.

사랑이란 건,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인간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 슬픈 아이러니가 있다면…… 이 세상에는 무조건 좋은 것도, 무조건 나쁜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랑 또한 예외는 아니다.

“……사람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뜻이지. 내 누나가 좋은 예야. 넌 믿기 힘들겠지만, 어릴 때의 누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거든.”

누나가 변하기 시작한 건 대단한 작가였던 누나의 남편, 그러니까 매형이 죽은 다음부터였다.

“그때부터 누나는 태준이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기 시작했어. 자기 아들이 위대한 작가가 될 거라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지.”

“그러니까, 당신 말은…….”

“맞아.”

윤정식이 쐐기를 박았다.

“위험한 건 멍청한 조카 녀석이 아니야. 누나지. 아들을 지키려고 동생을 감옥에 집어넣은 사람인데, 더한 짓이라고 못 하겠어?”

거기까지 듣고 나니, 형우 또한 윤정식의 걱정이 꽤 현실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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