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초심자의 행운, 비기너즈 럭.
스포츠 경기나 게임 등을 처음 해 보는 초보자가 숙련자를 능가하는 파워를 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반쯤은 우연이나 도시 전설 취급받는 개념이지만, 예전에 미국의 한 대학교에서 이 ‘비기너즈 럭’을 통계학적으로 해명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비기너즈 럭이 어느 정도 실존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연구진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심리와 변칙이다.
초보자는 뭔가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기에 안정된 상태에서 일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 심리적 요인이고, 정석을 모르기에 뜬금없는 수를 두어 상대를 혼란에 빠트리게 된다는 것이 변칙적 요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오묘하게 조합되면…….
“가끔 기막힌 게 나온다는 거지.”
형우가 슥슥삭삭 써대는 각본들을 보며, 현수는 탄성을 터트렸다.
‘배경은 적절하고, 대사는 상황을 정확히 함축하고 있어.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캐릭터의 동선 부분이야.’
다른 건 몰라도, 캐릭터의 동선 부분은 주목할 만했다. 그 부분이야말로 소설과 각본의 근본적인 차이를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주인공과 악당이 서로 마주 보고 40번의 검격을 주고받는 상황.’이 있다고 해 보자.
소설에서는 ‘A는 B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40회의 검이 맞부딪혔다.’라고 쓰면 끝이다.
하지만 각본에서 그런 묘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독자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소설과는 달리, 영화는 명확한 시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공간. 그것이야말로 소설과 극본의 가장 큰 차이고, 각본가를 꿈꾸는 소설가들이 쉽게 놓치는 부분이지만… 형우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듯이 능숙하게 <권객>의 시나리오를 집필해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자기 소설이니까, 자기 캐릭터가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는 거 아냐?’
하지만 이는 사실 틀린 말이다. 소설가라 한들, 모든 인물의 동선까지 생각하며 글을 적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푸코의 진자>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작가 옴베르트 에코가 ‘나는 소설을 쓸 때 인물의 동선과 시간까지 배분하여 이야기를 짠다네. 자네는 그렇지 않은가?’라고 묻자, 그의 동료 소설가가 ‘난 그러지는 않는데. 그 정도면 편집증 아닌가?’라고 답한 유명한 일화도 있다.
자신의 작품을 현실처럼 인식하고 완전히 몰입하는 재능. 형우에게는 그 재능이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권객>을 쓰며 단 한 장면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끊임없이 상상하고, 디테일을 생각했다.
자신의 소설에 관한 것이라면 주인공이 아침에 뭘 먹었는지까지 알 수 있다.
각본은 각본가보다 못할지도 모르나… 그것이 제 소설의 각본이라면, 아예 펼칠 수 있는 능력의 정도가 다르다는 거다.
‘이건 뭐… 재능이라기보단 집착이네.’
무서운 집중력과 집착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자신의 소설로 극본을 쓰는 게 그리도 쉬운 일이었다면, 세상에는 ‘원작자’라는 단어조차 필요 없었을 테다.
“…흐음.”
형우가 내민 #7을 바라보던 현수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어렸다.
“잘 모르겠네.”
“잘 모르겠다니, 무슨 뜻이야?”
“그게 말야.”
초심자의 행운은 오래 가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디테일에 집착하는 소설가라도 자신이 쓴 소설의 모든 장면을 구현해내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이 부분은 영 재미가 없네.”
<#7.> 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에서, 현수는 처음으로 혹평을 했다.
“뭔가 감성이 잘 안 맞는 느낌이야.”
“그래?”
키보드에서 손을 뗀 형우는 그대로 휴대폰을 쥐었다.
“그러면 그거 잘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 보지 뭐. 아, 여보세요? 천우희 작가님?”
그 모습을 보며 조현수는 생각했다.
어쩌면 작가로서 형우의 가장 큰 재능은 집중력과 집착이 아니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폭넓은 인맥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 *
처음 글을 쓸 때부터 로맨스만 썼다.
처음에 로맨스를 쓴 이유라면 있다. 자신의 소설관을 바꿔 준 첫 번째 소설이 로맨스였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에도 왜 로맨스만 쓰냐고 묻는다면… ‘그걸 잘하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사람마다 팔 수 있는 우물의 넓이는 저마다 다른 법이니까. 천우희는 넓은 우물 대신 깊은 우물을 파기로 했다.
수천 가지의 맛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우물을 말이다.
“…그래서.”
천우희가 어이없다는 듯이 형우와 각본을 번갈아 쳐다봤다.
“나보고 각본 쓰는 걸 도와 달라고? 그것도 네 소설을?”
“헤헤, 부탁 좀 할게요.”
형우가 헤시시 웃으며 부탁했다.
“천우희 작가님은 저보다 더 잘 쓰잖아요!”
“으, 으응?”
쟤가 저런 말로 은근히 칭찬해 오면… 솔직히 거절하기가 좀 힘들다.
“흠흠, 그래. 어디가 문젠데?”
“7번째 씬 부분인데… 액션 부분이라면 어떻게 공간감을 살릴 수 있지만 로맨스는 역시 잘 모르겠더라고요.”
“너도 로맨스는 이제 꽤 쓰잖아?”
“길게 쓰는 거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데, 한 장면에 빡! 하고 담는 건 여전히 힘들더라고요.”
“하긴.”
영상매체라는 건 한 방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특히 로맨스는 더더욱 그렇다.
“<클래식>에서 우산 없이 내달리는 장면이나….”
비유가 별로다. 이왕이면 소설 원작 영화에 비유하면 좋겠는데 뭐가 있을까….
“맞다, <여우의 유혹>!”
최고의 비유를 찾아냈다.
“<여우의 유혹>에서 강종원이 우산을 들어 올리는 장면! 영화 내용은 잘 몰라도 그 장면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기억나잖아?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 맞지?”
“이야, 역시 로맨스 전문가 어디 안 갔네요. 근데 저는 그런 장면을 잘 못 만들겠어서요.”
“그치, 너는 로맨스를 좀 구구절절하게 쓰는 편이니까. 봐봐, #7부분. 여기서는 그냥 대사 다 지우고, 하늘에서 매화 하나 떨어지는 걸로 하자.”
“매화요?”
“그래. 그 매화잎을 보다가 눈을 마주치는 거야. 달밤에 떨어지는 매화 쳐다보는 사람 마음이야 뻔한 거 아니겠어? 뭔가가 그리운 거지.”
그대로 대사 한 줄을 적고, 그대로 읽었다.
“아아, 매화가 어깨에 붙으셨군요.”
가지고 온 주황색 당근 모양 펜의 버튼을 눌렀다.
-아아, 매화가 어깨에 붙으셨군요.
새어 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천우희가 표정을 찡그렸다.
“‘붙으셨군요.’ 보다는 ‘붙고 말았군요’가 나으려나? 아아, 매화가 어깨에 붙고 말았군요.”
-아아, 매화가 어깨에 붙고 말았군요.
“훨씬 낫네.”
그대로 박박 긋고 문장을 수정했다.
“방금 뭐한 거예요?”
형우가 관심을 보였다.
“그거 녹음 기능 있는 펜이에요?”
“응. 맞아.”
예전에 <누토피아>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감명 깊게 보고 샀던 당근 모양 녹음기 펜 굿즈였다.
“난 대사를 쓴 다음에는 녹음해서 들어 보거든. 퇴고할 때 도움이 많이 돼.”
“저도 라임은 나름 신경 쓰면서 쓰는 편인데, 녹음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그래? 그러면 너 쓸래?”
“정말요?”
형우가 입을 벌리며 좋아했다. 어차피 집에는 몇 개가 더 있으니 하나쯤 준다 해도 아까울 건 별로 없었다. 형우가 달라붙었다.
“고마워요, 천우희 작가님!”
부지불식간에 두 손이 잡히자,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야, 야….”
“예?”
“좀 떨어져…. 집중이 안 되잖아.”
“아, 죄송합니다.”
그대로 형우가 반걸음 정도 떨어졌다.
…막상 떨어지니 뭔가 아쉽다.
‘그냥 모른 척할 걸 그랬나?’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정말로 집중이 하나도 안 돼서 이상한 걸 써내고 말았을 거다.
‘자존심이 있지. 구린 걸 쓸 수는 없잖아?’
게다가 형우가 직접 부탁한 사안이다.
이걸 빌미로 나중에 어디 분위기 좋은 데서 밥이라도 한 끼 사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오른손에 쥔 펜을 두어 바퀴 돌렸다.
* * *
천우희 외에도,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동작은 숙련된 시험자가 하면 4초 만에도 충분히 다 펼칠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요. 얍!”
연수가 두 번의 발차기와 한 바퀴 반의 회전을 유연하게 연결하게 했다. 형우가 비명을 질렀다.
“야, 야, 스탠드!”
“어멋, 꺅!”
연수의 발에 맞은 4만 8천 원짜리 스탠드가 벽에 부딪혀 폭발했다.
“죄송해요! 요즘 운동을 안 하고 집에서 글만 썼더니….”
“아니야, 액션씬 시간 배분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됐어. 그리고….”
그리고 각본에 한 장면을 추가했다.
“마침 개그씬도 하나 필요했거든.”
전대 무림 고수가 발길질을 하다가 신발이 날아가 식탁을 뒤집어엎는 장면이었다.
“무림의 배경을 송나라 때로 한다면 이 묘사가 맞지만, 그 이전으로 한다면 등자를 사용하는 건 조금 애매한 감이 있네요. 소설을 쓸 때야 적당히 넘어가도 지장 없는 부분이었겠지만, 영상화가 되면 아무래도 복식이나 건축 양식 같은 게 소설 속에 드러날 테니까요. 이참에 시대상을 확실히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역사와 사회에 박학다식한 안재욱의 조언도 뼈가 되고 살이 되어 줬다.
“이게 또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남방계랑 북방계의 차이가 있거든요. 남방계는 옷을 넣어 입고 북방계는 빼서 입는데, 이게 또 21세기 중국의 한푸 논란이랑 같이 되면….”
“아하.”
“제가 이제 예전에 LA에 갔었을 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건 좋았지만, 너무 많이 돼서 영양과다로 죽어버릴 뻔했다.
“선생님, 제가 도와줄 건 없나요?”
“네가 도와줄 것도 당연히 있지.”
형우가 대사 몇 개를 내밀었다.
“이 대사들 중 멋진 거 몇 개만 골라봐.”
“어, 두 번째 대사랑 네 번째 대사 끝내주는데요? 막 심장이 벌렁거려요.”
“그래?”
형우는 그대로 두 번째와 네 번째 대사들을 박박 지웠다. 정수가 입을 쩍 벌렸다.
“지, 지금 뭐 하신 거예요?”
“이 부분을 읽는데 묘하게 닭살이 돋고 중2병 같은데……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더라고.”
그런 의미에서 태생 중2병이라고 할 수 있는 정수는 최고의 중2 탐지견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거다.
“저 뭔가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데요?”
“아니야, 정수야. 자신감을 가지렴.”
“……그쵸? 이건 좋은 일이죠?”
“당연하지. 중2병이 나쁜 건 아니지만, <권객>이랑은 잘 안 어울리잖니? 초콜릿은 맛있지만 민트랑 같이 먹으면 별로인 거랑 마찬가지야.”
“민초는 맛있는데요?”
“내 집에서 썩 나가!”
민초파를 집에 들이다니, 큰 실수를 해 버렸다.
그 외에도.
“스토리보드는 이 정도만 그리면 되냐?”
“의재야, 고맙다.”
“스승님,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이번에 유어프로틴에서 새로 나온 민트초코맛 프로틴인데….”
“정주현! 너도 내 집에서 썩 나가!”
“아마 이 시대의 법이라고 하면 법가法家의 가르침을 베이스로 한 것일 텐데… 아, 그래도 신체법은 없었어요. 그건 진작에 폐지됐거든요.”
“고맙습니다, 민효 씨. 아, 이번에 연재하시는 는 잘 되시죠?”
“덕분에요.”
알고 있는 온갖 사람들의 도움을 다 받은 덕에 형우는 짧은 시간 만에 각본을 완성할 수 있었다.
“현수야, 어때?”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 물론 영화라는 게 각본만 봐서는 모르는 거긴 하지만….”
“일단 그 정도면 됐어!”
형우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현수야, 너도 고생했다!”
“그, 그래. 그래서 말인데 형우야, 이번 보육원에도 예산이 좀….”
“일 끝나면 한번 찾아갈게!”
형우는 3주라는 짧은 시간 만에 총 #161에 이르는 기나긴 영화 각본을 완성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 * *
“맙소사.”
형우의 이야기를 다 들은 영화감독 강주범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니까, 이걸 쓴 게 당신이라고요?”
“예. 정확히는 좀 공동 집필이긴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될까요?”
“그건 아니지만….”
드라마나 영화 등을 공동 집필하는 것은 이제 뭐 딱히 말할 필요도 없는 시대의 트랜드다.
한국의 작가들도 보조작가 서넛은 두는 것이 보통이고, 미국 같은 경우에는 시리즈 하나에 작가를 스무 명씩 두고 제작한다고 하니까.
“…잠깐만, 읽어 볼게요.”
강주범이 지금까지 읽은 각본들은 천 개도 훌쩍 넘는다. 만약 별로라면… 아무리 원작자라 그래도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을 테다. 아니, 원작자라 더더욱 그런 거다.
강주범은 영화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원작자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심한 이들은 종종 각본가나 감독에게조차 시비를 걸어오곤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면 십중팔구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소설에서는 30합으로 묘사되는 전투신이 왜 이렇게 짧냐느니, 혹은 여주인공의 외모가 별로라느니 하는 것들.
그럴 때마다 제작비는 조상님이 벌어 오냐? 라는 말과, 러닝타임은 한 600분으로 잡을 거야?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강주범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거라면… 차라리 영화를 접는다.’
별것 아닌 각본으로 영화를 만드느니 안 만드는 게 낫다. 홍콩 영화계 최고의 완벽주의자라고 불리는 주성치에게 사사한 그이니만큼, 영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던 것이다.
‘…역시, 미숙해.’
파라라락-
종이를 넘기던 강주범의 미간이 좁혀졌다.
초보자 특유의 날림 냄새가 났고, 나름 노력했지만 숨길 수 없는 오류도 몇 군데 보였다.
‘하지만, 스토리와 연출은… 특출나.’
그 부분이 중요했다.
미숙한 부분이야 자신이 감독으로서 채워주면 된다. ‘완벽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특출난 지점이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형우의 이 <권객> 시나리오 각본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특출난 데가 있었던 것이다.
“몇 군데 수정은 필요하겠지만…….”
강주범이 흡족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바로 시작해도 되겠는걸요.”
“정말요? 잘 부탁드립니다!”
형우가 활짝 웃었다.
* * *
그리고 그 시각.
성북구의 한 자택에서는, 노트북 두드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금 더 고어古語같은 느낌으로 쓰는 게 나으려나.”
남자의 움푹 파인 볼을 따라, 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벌써 아침이네.”
남자는 그대로 수염을 밀고, 양복을 입은 뒤, 출근길에 나섰다.
그의 목에서, ‘C&N 편집부 소속 윤태준’이라고 적힌 사원증이 흔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