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며칠 전, C&N의 꼭대기 층.
“그래, 각본가를 날려버렸다고?”
보고를 받는 윤태형 회장의 표정은 오묘했다. 머릿속에서 약간의 줄다리기가 진행되고 있는 탓이다.
기업의 이미지에 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 어떻게든 스패로우 팩토리에게 타격을 주어라- 라는 것이 윤태형이 내줬던 과제일 텐데.
각본가를 날려버려 판권을 종이짝으로 만드는 건 확실하게 그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세이프인가.’
아슬아슬하지만, 아직은 별말이 없으니 그렇게 넘어가기로 했다.
아니, 오히려 이 정도면 생각보다 잘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사고만 쳤다기에 긴장했는데, 의외로 수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비범한 아이였으면 좋겠군. 늘 말하지만, 비범한 한 명은 평범한 사람 만 명을 먹여 살리는 법이니까.”
“맞아요, 아버지.”
싱긋 웃으며 맞장구치는 윤정아를 보며, 윤태형은 자신의 지팡이를 쓰다듬었다.
“미국에 있을 때 마약에 손을 댔다지?”
“지금은 완전히 끊었죠.”
윤정아가 추가했다.
“TV에 김형우 녀석이 나오는 걸 보고, 바로 끊어버렸답니다. 대신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대요.”
“그 일이 아니었다면 기회조차 없었을 거다.”
마약을 시작하지 않는 것은 평범한 인생이고, 마약에 중독되어 비루하게 사는 것은 평균 이하의 인생이다.
허나, 자신의 의지로 약을 끊어내고 운동을 시작한 것과 스스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은… 충분히 ‘비범하다’ 할 수 있는 일화가 아닌가.
“비범함이란 고난이 있어야만 빛이 나는 법이지. 마치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듯이 말야. 물론 많은 수는 그 치밀하고도 날카로운 과정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질지도 모르지만… 그런 걸 견뎌낸 자만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윤태형은 빌딩의 아래쪽을 바라봤다. 윤정식조차도 오르지 못한 C&N의 최상층, 회장실에서 내려보는 풍경이란… 지나가는 샐러리맨들이 개미처럼 보이고 마는 것이다.
“왕조 때는 핏줄밖에 없는 멍청이들이 정상에 섰고, 내가 아주 어렸던 시절에는 아부 잘 떠는 여우들이 정상에 섰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로지 능력 있는 자들만 위에 설 수가 있는 게야.”
윤태형은 강한 어조로, 자신의 신조를 말했다.
“정상에 서서, 바닥을 걸어가는 저 ‘평범한’ 이들을 이끌고 구제하고 구원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힘 있는 자가 해야 하는 일이란다.”
“인간이 늑대를 길들여 개로 만든 것처럼요?”
“그래, 그런 거지.”
윤태형은 딸의 비유가 꽤 마음에 들었다. 예전부터 반항기가 있었던 정식이와 달리, 장녀인 정아는 그나마 자신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그건 윤태형이 윤태준을 유달리 예뻐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태준이는 분명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저와 제 남편의 아이인걸요. 게다가 애 아빠를 똑 닮기도 했고요.”
“나도 네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구나.”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윤태형이 말했다.
* * *
그 시각, 형우의 모닝은 판교를 빠져나가 서울의 집 앞에 도착했다.
“후우! 답답해 죽겠네!”
스패로우 팩토리의 공동대표라는 거창한 직함을 달고 있는 통에, 외부 시선이 신경 쓰여서 회사에 갈 일이 있으면 늘 양복을 차려입었지만… 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복도 좋지만, 역시 최고는 이거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장부터 열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색으로 정렬된 일곱 벌의 트레이닝복이 주르르 나열되어 있었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파란색으로 입을까?”
이윽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형우가 책상 앞에 앉았다. 지위가 바뀌고 가진 돈의 액수도 달라졌지만, 형우의 삶 자체는 그다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서 루틴대로 글을 쓰고, 저녁에 시간이 되면 잠드는 삶을 반복했다. 가끔은 평소와 똑같이 사는데도 점점 늘어나는 잔고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띵동!
“택배 왔습니다!”
“타이밍 죽이네.”
시킨 물건이 제시간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문을 열어 보니, 수십 권의 책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초보부터 시작하는 시나리오 집필법>, <영화 시나리오의 기초>, <좋은 시나리오를 쓰는 법>, <영화학개론> 등등…. 시중에 판매 중인 모든 작법서란 작법서는 이곳에 다 모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친절한 봉자 씨>, <밥은 먹고 다니냐?>, <어이가 없네?>, <4885> 같은 명작 영화들의 대본집 또한 가득했다.
심지어는 영화감독들이 쓴 수필이나 인터뷰 모음집 같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죄다 긁어모았다. 이 수많은 자료를 모은 이유는 단 하나.
이번에 각본가가 날아간 <권객> 영화의 각본을 스스로 써보기 위해서였다.
“참치야, 이게 맞냐?”
형우가 어깨에 앉은 참치를 톡톡 치며 물었다. 참치가 삐욱? 하고 울면서 고개를 갸웃 꺾었다.
“이제 와서 모르는 척이야? 네가 사라며?”
어제저녁, 형우는 팬 싸인회를 위해 교보재문고를 찾았다. 성황리에 팬 사인회를 마치고 책이나 둘러볼까 하는 순간에, 갑자기 참치가 휘리릭 하고 날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삐육거리며 날아간 참치가 턱 걸터앉은 곳이 바로 시나리오 작법서 코너였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어서, 형우는 드라마 속 기업가처럼 말했다.
‘여기서부터 저기 끝까지, 있는 거 다 담아 주세요.’
물론 드라마 속 갑부는 이런 말을 서점이 아니라 백화점에서 하지만… 원체 옷이나 시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형우였으니까. 서점에서라도 대리만족했다고 치자.
“언제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
“뺘아악!”
참치가 부럽다는 듯이 형우를 바라봤다. 으흠, 언젠가 견과류 매장이라도 한번 들려서 한 줄 싹 쓸어오든지 해야겠다.
“그러니까 하나 골라 봐. 뭐가 좋을까?”
“뺘악!”
참치가 이거! 라고 말하는 듯이, 책 한 권을 자그마한 부리로 콕콕 찍었다.
* * *
각본가가 날아가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형우는 기묘한 데자뷰를 느꼈다. 생각해 보면, 2년 전에 웹툰화를 방해받았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아닌가.
판권은 묶여 있고, 시간은 촉박한 상황. 하지만 그때와 확연하게 다른 것도 있었다.
‘내가 그림은 못 그려서 웹툰 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글이라면 나도 어디 가서 안 지거든?’
그래서 괜히 영화사를 믿기보다는, 직접 각본을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참치까지 그런 자신의 의견을 밀어주는 듯했으니, 이제 쉽게 써버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엑.”
시작과 동시에 막혀버렸다.
“생각보다 어려운데……?”
예전에 현수와 보육원을 돕기 위해서 시나리오를 한번 써본 적이 있는 형우였지만… 어린이 연극과 영화 시나리오는 스케일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수영장에서 수영하다가 갑자기 바다에서 수영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나마 자신이 원작자라 내용이 머릿속에 있으니 이 정도라도 쓴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못 해봤을 일이었다.
“……잘 쓴 건지 못 쓴 건지도 모르겠네.”
소설을 쓸 때는 ‘오늘 건 진짜 괜찮게 썼다.’, ‘이번 건 좀 심심하지만, 빌드업을 위해선 필요해.’ 같은 감상들이 저절로 떠올랐지만…… 지금은 전혀 모르겠다.
“도움 될 사람 있나?”
형우는 자신의 휴대폰 목록을 쭈욱 살폈다. 각본이라, 각본에 도움이 될 만한 녀석이 누가 있을까 고민하던 차.
“잠깐.”
과거의 대화 한 자락이 형우의 머릿속을 스쳤다.
-나도 각본을 써 봤는데 말야, 아무리 읽어도 영 마음에 안 들더라.
-직접 쓰는 건 힘들더라고. 평론이라면 하겠는데….
직접 쓰는 건 힘들다, 부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다음. ‘평론이라면 하겠는데.’라는 부분이다. 형우는 그대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래, 현수야! 지금 바빠?”
“아니, 안 바쁜데. 왜?”
“그럼 나 좀 도와줘!”
형우가 소리를 질렀다.
* * *
“커피는 뭐로 줄까?”
“막심으로 줘.”
현수는 형우의 말을 듣자마자 딱히 이러쿵저러쿵 묻지도 않고 그대로 작업실까지 달려왔다. 커피를 건네주며 형우가 말했다.
“고맙다, 넌 진짜 좋은 친구야.”
“뭘, 다 받은 만큼 갚는 거지.”
“내가 뭘 했다고.”
“희망 보육원에 꼬박꼬박 돈 넣어주고 있잖아.”
사실, 지금 형우는 돈이 꽤 많았다. 아마 대한민국 작가들 중에서 열 손가락은 아니어도… 오십 손가락 안에는 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근데 작가라는 게 돈 쓸 일이 많진 않더라고.”
“사람 나름이지. 네가 욕심이 없는 거야. 너만큼 버는 사람 중에 너처럼 사는 사람 없을걸.”
“얘가 실례되게 왜 이래. 나도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산다니까?”
현수가 그 말을 들으며 엷게 웃었다.
지난 2년 사이, 형우는 엄청나게 잘 나갔다. 그러면 좀 콧대가 높아질 만도 한데, 녀석은 학교 다닐 때랑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은 눈곱만큼만 기부해도 내가 좋은 사람이네, 하고 티 내고 싶어서 안달인데. 형우는 그 많은 돈을 기부하고서도 칭찬받는 걸 부끄러워했다. 마치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이.
“아무튼, 이거야.”
“잠시만 기다려 줘. 빨리 읽을게.”
형우는 현수에게 시나리오를 내민 후, 다시 사 놓은 책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읽는 것은 작법서가 아니다. 한 각본가가 쓴 <빌어먹을 시나리오>라는 수필 산문집이었다.
‘작법서만큼이나 도움이 돼.’
<빌어먹을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자신을 전직 소설가라고 소개했다.
소설에 재능이 없었지만 그래도 글을 쓰고 싶어서 흘러든 곳이 영화계였다고 한다. 이 수필집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뤘다.
[소설과 시나리오는 정말이지 아주 조금 달랐다. 그게 문제였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형우는 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완전히 다른 분야였으면 헷갈리지 않았을 텐데!]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더럽게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막무가내로 뛰어들기보다 진작에 공부라도 많이 했을 텐데.]
지금의 자신과 너무 비슷한 처지라 엄청나게 공감이 갔다. 곧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다 읽었다.”
“벌써?”
현수가 형우를 향해 극본을 펄럭거렸다. 그 표정이 뭔가 오묘했다.
“형우야.”
현수의 말에 형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이 나와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한 순간.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나.”
“편하게 말해줘도 돼.”
“그럼 일단 봐봐.”
현수가 시나리오를 펼쳐 들었다. 여기저기 쳐놓은 붉은색 밑줄 표시를 보면, 분명 대충대충 읽고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영상과 소설의 제일 큰 차이가 뭐냐 묻는다면, 그건 이미지거든.”
형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묘사나 설명을 잔뜩 쓸 수 있는 소설과는 달리, 영화라는 녀석은 대사와 행동에 올인하여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하니까.
“나쁜 점을 알려달라고 했지?”
현수의 검지 두 개를 교차해 X표를 만들었다.
“영 글러 먹었다는 뜻이야?”
“아니.”
현수가 정정했다.
“나쁜 점이 없어.”
현수의 말을 듣는 형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상한 부분이 없다는 건… 그만큼 잘 썼다는 뜻인가? 멍하니 서 있는 형우의 귓가로, 계속해서 현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부분은 정석에서 어긋났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좋은 부분들이 있어. 특히 이 부분은 그런 부분이 극대화됐는데….”
극찬이 맞았다.
방금까지 읽던 수필집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 위에 쓰여 있는 글귀가 문득 형우의 두 눈 가득히 들어왔다.
[하지만, 실제로 써 본 첫 시나리오는 의외로 극찬을 받았다. 시나리오를 잘 모르고 쓴 시나리오라는 그 특이성이 묘하게 발휘되어 작품에 특색을 부여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현상을 부르길 흔히….]
초심자의 행운.
비기너즈 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