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89화 (189/200)

#188

살얼음판.

지난 2년간 스패로우 팩토리와 C&N의 관계를 요약하자면,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없을 것 같다. 개인적 감정 이야기가 아니라 기업 생태에 대한 이야기다. 동일 업종 기업이란 같은 파이를 갈라먹는 일이니, C&N 입장에서도 신흥 강자인 스패로우 팩토리가 예뻐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C&N은 스패로우 팩토리를 견제하지 못했다. 이미 안 좋은 전례가 있는 이상, 괜히 또 비슷한 일을 했다가 보도라도 나면 곤란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전과자가 하면 더 나빠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

“그 덕에 저희는 미친 듯이 성장할 수 있었죠.”

혜선이 일축했다. 라이벌 회사의 방해가 없다는 단순한 이유는 아니었다.

-에이 씨! 이번 프로젝트도 공쳤어. 중간에 태클 들어왔더라.

-몰래 하라니까! 태클 넣은 데가 어딘데?

-어디겠어, C&N이지.

-또 C&N이야? 아, 맞다. 그나저나 소문 들었어?

-소문? 무슨 소문.

-천하의 C&N이 말야…. 스패로우 팩토리는 못 건드린다던데?

C&N이 스패로우 팩토리를 건들지 못한다는 소문이 업계에 퍼진 후로부터, 스패로우 팩토리는 순식간에 출판계의 슈퍼스타가 되어 버렸다.

-진짜? 그럼 이번 프로젝트 스패로우 팩토리에 협업 신청해 볼까?

-저쪽에서 오케이 해 줬어!

-뭐 붙인 건 없고?

-아니, 그냥 통상 수수료로 간다던데? 서지원 대표가 통이 크다더니 진짜인 모양이야.

기업이 다른 기업을 방해하는 일은, 기업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지상과제다. ‘아, 새로 차린 회사의 회장님이군요. 저희 열심히 선의의 경쟁을 해 봅시다!’ 따위의 훈훈한 덕담을 주고받는 경우는 세상에 잘 없다. 보통은 그 반대다.

기존 기업은 신흥 기업을 견제하고, 신흥 기업은 기존 기업을 물어뜯는다. 그것이야말로 ‘건강한’ 자본주의다.

법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니라면 접대부터 회유까지 뭐든지 허용되는 무한경쟁. 이런 경쟁행위는 회사의 기반이 강할수록 더 유리해지며, 이 바닥에서 가장 강한 기업이라면 당연히 C&N이다.

그러니 C&N에 이를 갈고 있는 회사들이 천지삐까리인 것 또한 필연적인 일일 테다.

그러던 와중, C&N이 건드리지 못하는 기업이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어떨까? 심지어 그 CEO가 기업계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아주아주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연합이 형성되었다는 거죠.”

피 대신 온갖 계약서와 프로젝트로 이루어진… 일명 반 C&N 연합. 당연히 그 수장은 스패로우 팩토리였다.

“우후후훗….”

지원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이게 다 제 연기력 덕분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기업에게 도움을 주는 수수료를 통상비용으로 하는 건 죽을 만큼 힘들었다. 아까워서가 아니라, 혜선 때문이었다.

-그 두 배, 아니 세 배를 불러도 올 사람은 분명 왔을 텐데요.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지원은 혜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돈보다는 양심적인 이미지가 더 비싼 값에 팔릴 거예요.

-…그거 도박이잖아요.

-가끔은 도박도 해 봐야죠!

다행히도 이번에는 지원이 맞았다.

양심적인 기업가로 소문이 나자, 굳이 오지 않아도 되는 사람조차, 무슨 프로젝트만 있다면 일단 스패로우 팩토리에 머리부터 들이밀고 봤으니 말이다.

“……후우, 지금까지 진짜 좋았는데. 우리보다 더 큰 회사들이 와서 도와달라고 할 때마다 진짜 짜릿짜릿했다고요. 근데 그것도 슬슬 끝물인가 보네요.”

“얼음이 깨지겠죠?”

그렇게 물어온 것은, 가장 늦게 도착한 형우였다.

“윤태준이 돌아왔잖아요.”

“뭐, 아마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되겠죠.”

지원이 설명했다.

“굳이 윤태준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 친구가 오지 않았어도 C&N은 너무 오래 참았거든요. 저번에 박재진 부회장님이랑 술 마셨는데, 와 진짜 얼마나 째려보던지.”

“뭐라고 하시던가요?”

“제자로서는 칭찬해 주고 싶은데, 라이벌 회사 회장으로 보면 죽여버리고 싶대요.”

“극찬이로군요.”

비록 술자리에서 하하 호호 말했다지만. 이런 말을 진짜 농담으로 넘긴다면 그 사람은 바보다.

“선전포고라고 보는 게 맞겠죠. 가만히 맞아 주는 건 또 취미가 아니라, 나름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데.”

“영화죠?”

형우의 말에, 지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조퀴즈>에서도 말했다시피, 형우는 <전설의 보안관>과 <아이언 타이거>, 그리고 <권객>의 2차 저작권을 여러 군데에 팔았다. 영화 배급사도 그중 하나였다.

“마침 C&N도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제작하더라고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서 경쟁을 붙여 볼 생각이에요.”

“자신 있어요?”

“에이, 형우 작가님 작품 원작인데. 당연히 자신 있죠. 그러는 형우 님은 자신 있어요?”

“편집자님이 호언장담하는데 당연히 자신 있어야 하는 거 아녜요?”

“역시!”

지원이 시시싯 하고 웃었다. 지난 3년간 꾸준히 쌓여 온 신뢰 관계는 이제 거의 눈빛만 봐도 상대 생각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C&N에서 방해가 들어오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런 식으로 멍청하게 굴지는 않을 거예요. C&N도 지난 사건에서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똑바로 회복하지 못하도록 저희가 계속 쿡쿡 찌르기도 했고요.”

게다가 그런 건 윤태형의 스타일이 아니다. 윤태형은 고집스럽고 뭐든지 하는 사람이었지만, 지탄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아마 정면 대결을 신청할 거예요. 저희랑 똑같은 마인드로, 영화 대 영화로 눌러버리겠다는 생각이겠죠. 아마…….”

그 순간, 쿠당탕!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서민홍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이사라는 직함을 단지 꽤 됐지만, 여전히 제 발로 뛰는 모습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게 들어와요?”

“영화 쪽에 문제가 생겼답니다!”

“문제요? 무슨 문제?”

서민홍이 비명을 지르듯 대답했다.

“영화 각본가가 날랐답니다!”

* * *

“오랜만이구나, 태준아.”

윤태형 회장은, 7년 만에 보는 자신의 손자를 바라봤다.

“이제 공씨가 아니라 윤씨라지? 윤태준.”

“예, 할아버지.”

“…어울리는구나.”

윤태형이 허허 웃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자신의 자식조차 믿지 못하는 윤태형이지만, 손자인 윤태준만큼은 그 의심의 영역 밖에 있었다. 마지막 남은 가족의 정이었다.

“그래, 미국에서 수학했다지?”

“네. 처음에는 좀 당황했지만… 끝내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았습니다.”

“그래, 장하구나.”

윤태형이 씩 웃었다. 윤태준은 그런 할아버지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할아버지.”

“그래.”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

“기회?”

윤태형의 눈썹이 팔자로 휘었다.

“무슨 기회 말이냐?”

“지금까지 제가 무능했었고,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쉽게 바뀌지는 않지.”

“바뀌고 싶습니다.”

윤태준이 강경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스패로우 팩토리 건을 저한테 맡겨 주세요. 제가 밟아버리겠습니다.”

“네가? 할 수 있겠니?”

“예.”

대답하는 손자의 눈이 유달리 형형해서, 윤태형은 허허하고 웃고 말았다.

“네게도 윤씨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구나.”

윤씨의 피란, 단호함과 잔인함이다. 이끄는 자들에게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덕목들이다.

제 아버지를 잡아 가두고, 제 동생을 감옥에 보낸다. 가족사로 보면 비극이지만…… 결국 그런 결정들 덕분에 지금 C&N이 존속하고 있는 것이니.

“…좋구나. 한번 해 보거라. 네 능력을 증명해 봐. 모든 수를 써도 좋다. 기습을 해도 되고, 할 수 있는 걸 다 동원해도 돼. 업계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욕을 먹어도 된다. 그건 칭찬이나 마찬가지니까. 다만.”

윤태형이 강하게 충고했다.

“대중들에게 욕먹을 짓은 절대로 하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윤태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 * *

영상화.

웹소설의 성공가도에는 나름의 루트가 있다고들 한다. 일단 웹소설이 웹툰이 됐다면, 그 소설은 이미 반쯤 성공한 소설이다. 오디오북이나 종이책으로 출판된다면 그 또한 호재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역시 영상화다.

영화나 드라마라는 것이 뉴튜브나 택톡에 치여 예전만 못하다고는 한들, 그래도 여전히 대한민국 미디어 콘텐츠의 최고봉은 영화와 드라마다.

“빌어먹을!”

영화감독 강주범이 소리를 질렀다.

“작가가 없어졌다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 그게….”

스텝들이 몸을 벌벌 떨었다.

강주범의 별명은 호랑이 감독이었다.

홍콩의 영화 거장이자, 지독할 정도의 완벽주의자로 유명했던 주성치의 아래서 허드렛일을 하며 영화를 배운 사람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분위기 좋았는데….”

스텝이 한숨을 푹 쉬었다.

육 개월 전, 스패로우 팩토리는 <권객>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한마디 덕분에 영화계가 한순간 술렁였다.

<권객>이 어떤 작품인가? 지난 2년 사이 웹소설 판매고 20억에 종이책 판매량 300만 부. 거기에 해외 수출까지 진행 중인, 오랜만에 나온 한국 무협의 대작이 아닌가?

심지어 중국 쪽에서는 본토의 무협 소설이 한류에 잠식될까 봐 두려워 참새치의 <권객>을 금지 도서로 지정했다고까지 들었다.

그 대작의 입찰 경쟁에 무려 여섯 명의 감독이 뛰어들었다. 강주범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 누구도 강주범이 입찰에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액션 하나는 기깔나게 만들지만, 자기 작품을 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감독.

그것이 여태까지 강주범에 대한 평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스패로우 팩토리는 강주범에게 판권을 팔았던 것이다.

후에 알고 보니, 원작자인 참새치 작가가 자신을 감독으로 쓰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강주범 감독님이 맡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그분보다 무협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보거든요. 결국 그렇게 돼서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형우가 한 잡지사의 기자와 나누었던 인터뷰가 공개되고 나서, 강주범의 주가 또한 덩달아 올랐다. 난생처음 지상파 TV 프로그램도 나왔다.

[참새치 작가의 <권객>, 강주범 감독과 만나다.]

[강주범 감독은 누구인가? 주성치에게 직접 사사한 정통 홍콩영화의 감독.]

[…이전 작품은 그다지 흥행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강주범 특유의 액션만은 극찬받았습니다. 그때도 장르의 문제라는 의견이 많았죠. 강주범은 무협에 특화된 감독이지만, 한국에서는 무협영화를 그리 많이 만들지 않으니까요.]

[…너무 홍콩식으로만 가면 또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 테니, <갓과 함께>처럼 한국적인 액션을 살짝 곁들여 줄 생각입니다.]

이번 기회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기회라고 생각하며, 배우들을 잠정 섭외하며 돌아다녔다. 예정된 각본만 도착하면 즉시 촬영으로 돌입할 수 있을 정도로 빡빡하게 준비해 놨었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각본가가 튀었다고? 그게 말이 돼?”

다 끓인 라면을 가져오다 냄비째로 엎어버린 기분이었다. 열불이 터지고 속이 아려와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이 개새끼! 어디로 튄 거야!”

“그…… 지병이 도졌다고.”

“그 새끼 지병은 아토피밖에 없는데, 아토피가 어떻게 걸려야 글을 못 쓸 정도가 되는 거지? 확 피부를 벗겨내 버릴라!”

“말려! 잡아! 저 인간 또 사고 칠라!”

스텝들이 강주범의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고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강주범은 겨우 조금 진정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내가 쓸까?”

“안 돼요, 감독님!”

스텝들이 강주범을 말렸다.

영화감독이라고 꼭 극본을 쓰라는 법은 없다. 연출에 능한 감독이 있는 법이고, 반대로 극본에 능한 감독이 있는 법이니까. 가끔 <밥은 먹고 다니냐?>라던지 <그래도 사랑하시죠?>를 쓴 공준호처럼 극본과 연출 모두에 능한 괴물 같은 감독도 있는 법이지만… 강주범은 아니었다.

“저번에 쓴 각본 진짜 상상만 해도 어질어질하거든요. 답답한 건 알겠지만…….”

“그럼 어쩌란 말야!”

강주범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순간, 영화장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광고촬영 팀이었다.

“여기 카메라가 이번에 영국에서 들어온 거죠? 잠깐 빌려 가겠습니다.”

“잠깐잠깐!”

강주범이 비명을 질렀다.

“너희 뭐야? 누구 허락받고 촬영 장비 빼가?”

“에이. 다 아시면서.”

광고 쪽 팀장이 피식 웃었다.

“이 영화 사실상 무산된 거 아닙니까?”

“무산? 무산?”

“에이, 알 거 다 아는 분이 왜 이러실까. 각본가 날랐으면 다음 각본까지 삼 개월은 걸릴 테고, 그러면 배우들도 이미 제 일 찾아 떠날 텐데?”

강주범의 머리에 투둑- 하고 핏줄이 돋았다.

동시에 그의 두 다리가 허공을 박차고, 두 손은 호랑이처럼 뿜어졌다.

“이 개새끼들아!”

그의 스승인 주성치는 영화감독이자… 최고의 무술 배우 중 한 명이었으니. 거기서 고생하는 동안 영화 연출만 배우진 않았던 것이다.

“으아아악, 강 감독! 진정해!”

“저리 꺼져, 이 새끼들아!”

일신의 무위와 미증유의 거력을 뽐내며 건방진 다큐멘터리 팀을 쫓아낸 강주범이 크흥! 하고 코를 풀었다.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저, 강 감독님.”

“또 왜?”

“…누가 찾아오셨습니다.”

“뭐야, 또 방송 장비 빌려달래?”

주먹을 들어 올린 강주범의 눈에 한 남자가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강주범 감독님, 저 기억하시죠?”

두툼한 종이 뭉치를 들고 있는 남자의 어깨 위에 앉은 참새가 뺘악- 하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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