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87화 (187/200)

#186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이야.”

스패로우 팩토리의 사무실에서, 천우희가 혀를 쯧 하고 찼다.

윤정식은 감옥에 가고, 그 누나인 윤정아는 그대로 지위를 유지하고, 혼수상태인 줄 알았던 윤태형 회장은 돌아왔다.

“이걸 좋게 봐야 돼, 나쁘게 봐야 돼? 그것부터가 잘 모르겠네.”

완전한 성공이라면 뒤돌아볼 것 없이 기뻐하면 그만이고, 완벽한 패배라면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거나 꽁무니를 뺄 준비라도 하면 되지만.

“덥네요, 슬슬 여름인가 봐요.”

지원은 괜히 손부채를 만들어 얼굴을 부치는 척을 했다. 승패를 이야기하기 힘든 애매함에 스패로우 팩토리 멤버들이 축축 처져가던 차.

“좋은 일이에요!”

고민을 마친 형우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물론 윤정아가 남아 있다는 건 조금 찝찝한 일이고, 믿었던 박재진 사장이 윤정아랑 손잡은 것도 마찬가지로 찝찝하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죠!”

“어…….”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풋!”

지원이 참지 못한 웃음을 흘렸다.

“…형우 작가님, 얼굴 빨간데요?”

“맞아. 왜 갑자기 안 하던 오버액션을 해?”

“글쎄요, 오늘따라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천우희와 혜선도 한마디씩 했고.

“선배, 어디 아파요?”

연수가 결정타를 박았다.

형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생각대로 분위기가 풀리긴 했는데…… 장난 아니게 부끄러웠다.

“이런 건 원래 정수나 연수가 해야 되는 건데…… 난 진지한 캐릭터잖아.”

듣던 연수가 히죽 웃었다.

“선배가 솔직히 진지한 캐릭터는 아니죠. 밀 땐 밀고 당길 땐 당기고~”

“연수야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줘…….”

“헤헷.”

부끄러워서 죽고 싶어졌다.

쥐구멍을 찾아 헤매는 형우를 보며 천우희가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래도 뭐,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마냥 좋아하기에는 좀 애매하긴 하지만… 애매하다는 건 더 나쁠 수도 있었다는 뜻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더 나쁠 확률이 배는 높지 않았으려나?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자기 편을 보자마자 형우가 반색했다.

“좋은 점은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잖아요? 윤태형 회장과 박재진이 있는 이상 윤정아도 맘대로 움직이지는 못할 테고, 윤정식도 없어졌죠. 물론 여전히 불리한 건 마찬가지지만.”

말을 고르던 형우의 머릿속에, 꽤 괜찮은 문장이 떠올랐다.

“그 불리함까지 쳐도 나쁘지 않아요. 우리는 불리함을 즐길 줄 알잖아요.”

불리함은 때때론 유리하다.

예전에 생물학책에서 봤던 구절이다.

본래 고대 인류는 여타 유인원처럼 아프리카의 풍족한 숲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숲 또한 영원하지는 않았고, 면적이 점점 줄어들었다. 타 영장류에 비해 장점이 없는 인류는 그 숲에서 순식간에 도태되고 말았다.

숲을 떠난 인류는 초원지대로 들어섰다. 인류는 많은 것을 잃었다.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 기존의 토착생물군들이 인류를 위협했다.

나무를 타기 위해 발달한 긴 손가락은 초원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인류는 매일같이 도망쳤다. 어느 순간부터는 냅다 도망치는 것보다 망을 보는 게 더 유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구부정한 척추가 펴졌다.

긴 손가락은 나무를 타는 데 말고도 쓸모가 많았다. 돌을 집어 던지는 건 좋은 시도였다. 움직이는 상대에게 돌을 맞추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이 필요했다. 뇌 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불리함이 준 선물이죠. 그렇게 230만 년이 지난 지금을 봐요. 인류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프리카의 유인원이었던 인류는 지금 지구를 넘어 우주까지 제 영토를 넓히고 있지 않은가.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이 있다면, 불리함마저도 즐길 수 있다.

그것이 오랜 고민 끝에 형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 * *

그날 저녁, 지원은 오랜만에 지갑을 열었다.

오래전 영화의 세트장으로 쓰였다는 가평의 한 펜션을 단지째로 빌렸다. 영화 세트장이라 비쌀 줄 알았는데, 그 ‘오래전’이 ‘오오오오오래’ 수준인 모양이라 값은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하기야, 그러니까 지원이 지갑을 열었겠지. 난다긴다하는 사람들이 모인 스패로우 팩토리었지만,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챙기는 재주만큼은 지원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여기 양파 좀 더 줘!”

“내가 예전에 <왕자의 게임>을 보는데, 거기서 고깃국물에 구운 양파를 찍어 먹더라고? 나도 한번 해 볼까?”

우적우적 양파를 씹어먹던 조준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안 익었어….”

“내 그럴 줄 알았지.”

아이스박스 4개를 번쩍 들고 옮기던 정주현이 근육을 꿈틀거리면서 웃었다.

“1조, 고기 뒤집어요.”

“옙.”

“2조. 그릴 갈아요. 육즙 다 빠진다.”

“알겠습니다.”

구민효는 능숙한 손길로 바비큐 현장을 지휘했다.

고기에 진심인 사람인 것 같았다.

“다 됐으니 먹자!”

“먹고 죽자!”

“와하핫!”

스패로우 팩토리의 식구들.

정주현과 조준구, 구민효를 비롯한 스패로우 아카데미 ‘지저귐’ 소속이었던 90명의 학생들.

거기에 이번에 새로 이적해 온 전직 C&N의 지망생들까지.

수십 명의 사람이 웃으며 떠들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할걸.”

“바빴잖아.”

혜선의 입가에는 번들거리는 기름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 칠칠치 못함에 형우는 안심했다.

이번 <월드 배틀>은 스패로우 팩토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힘겨운 행사였지만, 그들 중에 누가 가장 고생을 많이 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마 혜선이라고 생각한다.

몇 달 사이 트래픽이 스무 배도 넘게 껑충 뛴 ‘스페셜 위크’를 관리하는 일이나, 90명이 넘는 학생들의 작품을 편집하는 일뿐만이 아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아마도 마음고생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불과 몇 년 전, C&N에게 자신의 회사를 홀라당 빼앗긴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트리거라는 게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트라우마 발생 스위치 같은 건데, 전쟁터에서 총상을 입은 군인이 팝콘 튀기는 소리만 들어도 패닉상태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요 며칠 혜선의 상태도 그와 비슷했을 테다. 플랫폼 사이트를 운영하고, C&N과 싸우고, C&N은 출혈경쟁까지 불사하며 회사를 잡아먹으려고 들었으니까. 트리거가 눌렸어도 몇 번은 눌렸을 테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혜선은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텼다. 그렇게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조금 힘들긴 했지. 그래도 엄청 겁먹진 않았어.”

혜선이 말했다.

“완전히 비슷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전의 회사는 거의 나 혼자 했었거든.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만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

늘 사무실에 홀로 남아 외롭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나날들이었다.

“지금은 뭐, 부하보다 빨리 퇴근하면 세상이 멸망하는 줄 아는 사장님도 있고, 일하고 싶어서 투자금을 내미는 이상한 아저씨도 계셔. 그리고….”

힘들 때마다 늘 옆에 앉아 있는, 지나치게 성실한 작가 한 명도 있지. 라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그런 게 있어.”

눈치 빠르게 적당히 알아채 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지만, 둔해도 정도가 있지.

이렇게 눈치 없는 놈이 쓴 소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혜선이었다.

아니, 오히려 눈치가 없기에 소설이 재밌는 건가? 평생 사회비판적 소설을 써 왔던 소설가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온갖 비리를 저질렀을 때는 눈을 딱 감고 궤변이나 늘어놓았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는 세상에 많은 법이니.

“고기 익었나 봐. 네 것도 좀 가져다줄까?”

“……부탁해.”

그래도 고기는 먹고 봐야지. 형우가 접시 두 개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형우가 돌아왔을 때쯤, 지원의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부우우우운! 주모오오오옥!”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

“오늘 저희가 여기 모인 이유는 뭐냐, <월드 배틀> 시상식을 하기 위해섭니다!”

“아, 내 차례네.”

형우는 그대로 지원이 있는 곳을 향해 후다다닥 달려갔다.

* * *

역사라는 과목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시발점이 쉽게 잊혀버린다는 거다. 1차대전은 기억해도 사라예보는 기억하지 못하고, 부마항쟁은 기억해도 YH사건은 묻혀버리는 것처럼.

이번 사건도 그랬다.

뉴스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할 때는 윤태형 납치 감금 사건이나 C&N 스캔들이라고 부르지, <월드 배틀>을 언급하는 곳은 좀처럼 없었다.

하긴, C&N 사건이 폭탄이라면 <월드 배틀>은 기껏해야 그 폭탄에 불을 붙인 촛불인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당사자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시상식을 가지기로 했다.

“일단 3위부터 순위 발표하겠습니다! 3위는 조준구 소설가입니다! 수상은 천우희 작가님이 하시겠습니다!”

더이상 ‘학생’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100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어엿한 작가들이었으니까.

“완전 개고생했네, 조준구.”

천우희가 짓궂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흐읍, 감, 감사합니다.”

“울지 말고.”

“야, 양파가 덜 익어서요.”

소설가치고는 참 창의력 없는 변명이지만, 천우희는 속아 넘어가 주기로 한 모양이다.

그다음은 구민효의 차례였다.

이번에도 담임이었던 안재욱이 축하의 말을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구민효 작가님.”

“작가님도요.”

둘이 마주 보고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상쾌해 보이던지. ‘이게 어른의 중후한 멋이라는 거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정주현.”

형우의 호명을 들은 정주현이 쭈뼛거렸다. 덩치는 두 배로 커졌지만 소심한 건 여전했다.

“어깨 펴. 1등이잖아요.”

“운이 좋았어요.”

“그것까지 실력이죠.”

형우가 씨익 웃으며 주현의 어깨를 툭 쳐 줬다.

단단해진 어깨가 사뭇 믿음직스럽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저한테 그랬잖아요. 소설을 좋아했던 마음을 낭비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맞아요.”

“약속 지켰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주현은 생각했다.

‘지금이 그 순간이구나.’

가끔,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순간이 있다.

오늘 들은 한 마디가, 수년 전의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그런 순간.

“고맙습니다.”

자신의 은사인 형우를 향해, 정주현은 최대한 밝게 웃었다.

3년 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소설만 읽던 천덕꾸러기는, 지금 이 순간. 소설가라는 꿈을 위해 매일같이 돈을 아껴 책을 사 읽던 아이가 되었다.

오늘을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흑백인 과거를 색칠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이 문장도 소설에 넣어 봐야지. 잘만 쓰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하고, 천생 소설가다운 생각으로 소박한 시상식의 끝을 맺었던 것이다.

* * *

자그마한 포크레인 한 대가 위태위태하게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어어, 빠진다. 조심, 조심해!”

형우의 어머니, 송윤아가 소리를 질렀다. 6월의 뜨거운 태양조차도 그녀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하기야, 평생을 염원했던 일이 이루어지는 날이니 6월의 태양이 아니라 지옥의 겁화를 가져온들 그녀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을 테다.

“엄마! 삼촌 왔어요!”

멀리서 손을 흔드는 아들 녀석의 모습이 퍽 듬직했다. 며칠 전 고향으로 돌아온 형우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15억이 든 통장을 내밀었다.

-반은 글 써서 번 거고, 반은 스패로우 팩토리 투자로 번 거예요. 회사가 좀 잘 됐거든요.

-그렇구나.

-그러니까 엄마, 이제 아버지 이장해요.

작년 이맘때 했던 이야기의 연장이다. <전설의 보안관>으로 많은 돈을 번 형우는 아버지의 묘소를 선산으로 이장하고 싶어 했다. 그걸 말린 건 윤아였다. 그녀에게는 죽은 남편도 소중했지만, 살아 있는 아들은 더더욱 소중했으므로.

-아버지를 생각하는 네 마음은 잘 알겠구나. 하지만 여전히 큰돈을 들여 이장하는 건 반대다. 마음만으로도 죽은 네 아버지는 기뻐할 거야.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녜요.

형우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가끔 아버지 영정사진 보며 우시잖아요. 내가 바보라서 당신을 선산에도 못 모셨다고.

-그걸 봤니?

-보고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제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요?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어요.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형우가 윤아의 두 손을 꼬옥 붙잡았다.

-아버지 이장해요, 엄마. 우리 모두를 위해서.

모자母子는 서로의 손을 잡고 아주 오래 울었다.

“형님, 여기 형우 있소.”

순식간에 달려온 민준 삼촌의 두 팔에는 아버지의 유골함이 다소곳하게 들려 있었다. 아버지를 화장했던 날, 한 줌밖에 안 되는 뼛가루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아버지.”

단지를 받아든 형우는, 소담하게 쌓여진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 조심스럽게 단지를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그랬죠, 제 글이 재밌다고요.”

그대로 엎드려서는 가방을 뒤졌다.

가방에서 나온 것은, 인기에 힘입어 이번에 종이책으로 출시한 <전설의 보안관>과 <아이언 타이거>였다.

“그래서 가져왔어요.”

유골함 옆에 다소곳이 자신의 책을 내려놓았다.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꿈에 나와서 감상평이라도 말해 주시면 더 좋고요.”

세워진 유골함 위로, 포크레인들이 조심스럽게 모래를 흩뿌렸다.

“뺘아아악!”

순간, 등 뒤에서 들린 참치의 울음소리에 형우는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참새들이 날아다니는 맑은 하늘 아래로, 마을의 전경이 눈 안에 가득 찼다.

-형우야, 너는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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